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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읽다보면 자웅동체 혹은 남녀양성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에 인간들은 전부 지금의 인간 둘이 등과 등이 맞닿은 형태로 존재했으며, 그 둘은 남남이기도 남녀이기도 여여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제우스가 이 인간들의 지혜와 힘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벼락을 내려 인간들을 전부 반토막내버렸는데, 그 결과 이제 사람들은 각각 그 때 잃은 자신의 반쪽들을 찾아 헤매인다.
플라톤이 전하는 이 신화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같이 포함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등장하는 남녀양성체는 정신과 육체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를 상징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일본작가의 선택으로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만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사이 이단심문이 횡행하던 서양 중세이다. 주인공은 토마스 철학 연구자이며 또한 도미니크 회 수도사인 니콜라이. 그는 귀중한 헌 책들을 찾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는 도정에 연금술 연구자 삐에르 뒤뻬르를 만나기 위해 한 작은 마을에 들른다. 이 곳에서 그는 그 존재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남녀양성체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 장면과 그 시각에 동시에 발생한 기이한 사건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젊은 교토대학 법학부 학생이 쓴 것으로 명망 높은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이 소설의 주제를 읽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제도적 종교로서의 교회가 포용하지 못하는 일반 민중의 삶의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이단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영과 육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화는 바로 이 이단 혹은 제도로서의 교회 외부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의 주장에 해당한다. 금을 만드는 기술에 국한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실은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과학탐구와 유사한 기능을 하기도 했던 연금술의 이상이 자세히 기술되는 것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이 책에 함께 실린 작가 인터뷰와 아쿠다가와 상 선정경위는 심사위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 이 소설의 장중한 의고체 문장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서도 그런 분위기는 그런대로 전달이 되었으나, 아무래도 원래 언어의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에는 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의 주제는 남녀동형체라는 상징과 연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잘 표현되었다. 그러나 서양중세가 배경이라는 점만 빼면 주제 자체가 크게 신선하다고는 평하기 어렵다. 젊은 작가의 패기 어린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듯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