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발, 빗발 (장석주)

 

빗발, 빗발들이 걸어온다 자욱하게 공중을 점령하고 도무지 부르튼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얼마나 먼 데서 예까지 걸어오는 걸까... 천 길 허공에 제 키를 재어가며 성대제거 수술 받은 개들처럼 일제히 운다... 자폐증 누이의 꿈길을 적시며 비가 걸어온다... 봐라, 발도 없는 게 발뒤꿈치를 들고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과수원 인부의 남루를 적시고 마당 한 귀퉁이의 모과나무를 적신다... 묵은 김치로 전을 붙이고 있는 물병자리 남자의 응고된 마음마저 무장해제 시키며 마침내는 울리고 간다... 저 공중으로 몰려가는 빗발, 저 쬐끄만 빗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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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0-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요...

검둥개 2005-10-07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셔요 ^^
 

음악들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
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
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
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
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
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
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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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10-0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 크아악~~ 담주 중에 무위도에 다녀올건데 나는 왜 이리 늙어버렸는지...

검둥개 2005-10-0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덩달아 크아악~~~ ^^ 무위도요? 와? (어디 있는 섬여요?)

로드무비 2005-10-0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가 이 시에서 나오는구만요.
박정대 시인의 우울한 외모도 시인으로서의 매력에 한몫했다죠.

검둥개 2005-10-0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좀 걸렸지만, 찾기는 찾았습지요. ^ .^ 으흐흐 전 이제 시인의 외모 같은 건 안 따지는 아줌마라고 말하고 싶지만, 과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헤헷 =3=3=3

돌바람 2005-10-0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와서 사진이 생기면 올려볼게요. 지금 일하는 속도로 봐선 갈 수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인천에서 들어가는 섬이라 서울서는 좀 가까운 편이에요.

검둥개 2005-10-0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올려주세요. 섬사진 ^^*
 

약수를 길어오며 - 철화네 집, 벽제에서 (유하)

  새벽녘 약수를 주전자에 넣고
  출렁출렁 산길을 내려왔다
  까치가 눈앞에서 날아오르고
  여지껏 내 생의 헛된 욕망의 소식들과
  솔방울처럼 말라버린 기다림들이 푸르르
  깃을 치며 떠올랐다 내 발걸음은 약수를 길어
  산길을 내려오는 것만도 벅찬 호흡인데
  산 위의 물은 어떤 절망의 터널을 뚫고 내려와
  이렇듯 온전한 약수로 샘솟았는가
  주전자의 벌린 입처럼 해찰하며
  냇물의 나른함으로 흘러내려온 내 삶의 버릇이
  아깝게 자꾸 약수를 쏟게 했다
  삶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출렁대며 내려오다보면
  약수처럼 슬금슬금 쏟아져버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난 차 한 잔과 국물 한 사발이 더 필요했으므로
  다시 오던 산길을 거슬러올라갔다
  까치 떼가 지금까지 걸어온 내 발길의 기억처럼
  날아오르고, 난 다시 거슬러올라갈 수 없는
  내 삶의 산길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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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읽다보면 자웅동체 혹은 남녀양성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에 인간들은 전부 지금의 인간 둘이 등과 등이 맞닿은 형태로 존재했으며, 그 둘은 남남이기도 남녀이기도 여여이기도 했다. 어느 날 제우스가 이 인간들의 지혜와 힘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벼락을 내려 인간들을 전부 반토막내버렸는데, 그 결과 이제 사람들은 각각 그 때 잃은 자신의 반쪽들을 찾아 헤매인다.

플라톤이 전하는 이 신화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같이 포함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는 반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등장하는 남녀양성체는 정신과 육체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를 상징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일본작가의 선택으로는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만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 사이 이단심문이 횡행하던 서양 중세이다. 주인공은 토마스 철학 연구자이며 또한 도미니크 회 수도사인 니콜라이. 그는 귀중한 헌 책들을 찾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는 도정에 연금술 연구자 삐에르 뒤뻬르를 만나기 위해 한 작은 마을에 들른다. 이 곳에서 그는 그 존재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남녀양성체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 장면과 그 시각에 동시에 발생한 기이한 사건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젊은 교토대학 법학부 학생이 쓴 것으로 명망 높은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유명세를 탄 이 소설의 주제를 읽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제도적 종교로서의 교회가 포용하지 못하는 일반 민중의 삶의 영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이단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영과 육의 합일, 신성과 인간성의 일체화는 바로 이 이단 혹은 제도로서의 교회 외부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의 주장에 해당한다. 금을 만드는 기술에 국한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실은 당시로서는 오늘날의 과학탐구와 유사한 기능을 하기도 했던 연금술의 이상이 자세히 기술되는 것은 이러한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적 장치이다.

이 책에 함께 실린 작가 인터뷰와 아쿠다가와 상 선정경위는 심사위원들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 이 소설의 장중한 의고체 문장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번역을 통해서도 그런 분위기는 그런대로 전달이 되었으나, 아무래도 원래 언어의 사용자들이 받은 충격에는 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의 주제는 남녀동형체라는 상징과 연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잘 표현되었다. 그러나 서양중세가 배경이라는 점만 빼면 주제 자체가 크게 신선하다고는 평하기 어렵다. 젊은 작가의 패기 어린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좋을 듯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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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0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이 그래서 그런가 리뷰가 평소보다 조금 딱딱한 감이......
그래도 님의 팬으로서 추천 꾹 누릅니다.^^

검둥개 2005-10-05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다음에는 부드러운 리뷰를 쓰도록 할께요. 헤헷. ^ .^
 

이 놈의 바지 같으니라고! 버럭. ^^;;;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장석주)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위를 버거워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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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10-0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가 이제 꽉 쪼이게 되었을 때의 슬픔...

검둥개 2005-10-0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두요 그거 공유에요. 금주 계속하고 계신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