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옮기게 됐는데 엉뚱스럽게 컴퓨터의 달력 프로그램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다.

직장에서 제공하는 meetingmaker 프로그램에 아주 익숙해진 나는
거기다가 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메모도 많이 해두었는데,
 이제 그걸 다 옮겨 적자니 머리가 아프고 다 잃어버리면 큰 일 날 것 같고 해서
아주 머리가 뽀가지게 아프다.

새로 가는 직장에도 meetingmaker가 있는지 알 수 없고 해서,
구글 칼랜더에다가 이식을 해보려고 하니까 그것도 잘 안 된다.

요즘 애용하고 있는 RTM (Remember the milk) To- do list 는
최근 들어 구글 칼랜더에 매쉬업을 할 수 있게 해준 기능이 있어서 좋긴 한데,
좀처럼 산뜻하게 시간대에 맞추어 구글 칼랜더 위에 깔리지는 않고
그냥 클릭하면 포스트잍처럼 작은 창이 뜨는 거여서,
가히 맘에 썩 들지 않다.

싹 구글  칼랜더하고 하나인 것처럼 깔려야 진짜 매쉬업이지,
이런 건 눈속임이이다. 투덜투덜.

시간 관리를 할 수 있는 여러가지 도구가 많이 생긴 건 좋은데
그 도구들을 관리하는 데 따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편리한 시대의 약점은 이런 건가.
편리함의 무게 아래 깔려서 정작 사람들은 압사하는 것.

게다가 난 너무 두꺼워서 잘 납작해지지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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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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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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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0 2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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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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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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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난곡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이들을 몇 알았었다. 나는 게을러빠져서 가끔씩 놀러만 갔지만 헌신적인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의 한 선배는 강남에서 곱게 자랐지만 야무지고 깡다구가 있는 멋진 여인네였다. 아이들 다루는 재주가 가히 뛰어나 유아원을 차렸으면 재벌이 될 만 했다. 하지만 유아원 재벌이 되는 대신에 선배는 난곡 달동네에서 아기방을 운영하는데 헌신했다. 노가다만 한솥이고 활동가들 사이에 내놓아도 폼도 별로 안 서는 그런 일이었다.

애기들만 보면 기가 죽어서 설설 기어다니는 나는 그 선배가 대장인 아기방에 가서 대타로 애들도 얼러주고 놀아주고 하는 일을 하루 했다. 아이들은 선배가 짠  활동계획에 따라 여러가지 공부 겸 놀이를 하고 놀다가 선배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드디어 아기방 활동가들이 한숨 돌리는 낮잠 시간이 왔다.

나는 아기들 옆에 누워서 자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아기들이 프랑크푸르트 쏘세지를 점심으로 먹는다고 부러워했다.
정말이다.
나는 참 유치찬란했다.
그  쏘세지가 나온 점심을 강남에서 곱게 자란 선배가 아기방을 운영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기방을 운영했으면 도대체 아기들에게 뭘 먹였을까?
콩나물? 된장국? 소금 찍은 삶은 달걀?
쏘세지에 투사된 나의 열등의식!

동네서점에서 재고로 파는 걸 사온 조이스 캐롤 오츠의 에세이집에는 남편 테드 휴즈의 편집삭제 없이 새로 원문 그대로 출판된 실비아 플라쓰의 일기에 대해 그녀가 논평한 글이 있다.

거기서 오츠는 플라쓰에 대해 말하기를,  "조숙함이 성숙함은 아니다."

오금이 다 저렸다.





낮잠을 다 자고 난 애들은 더욱 에너지가 넘쳐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작은 사자들 마냥 이모 삼촌들의 무릎을 잡아당겼다.  시끄럽기는 또 얼마나 시끄러운지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한참 놀아주고 있는데, 아니 놀아주고 있다기보다는 놀음을 당하고 있는데, 아기 중의 한 명이 내 양말을 보더니 이렇게 코멘트를 하는 게 아닌가.

"에, 이모 양말이 온통 씨꺼매, 얼레리 꼴레리"

비오는 날 검은 신발에서 물이 빠졌는지 내 보라색 양말 바닥은 정말 시꺼멓게 발가락 있는 데가 물이 들어 있었다.

아니 이넘의 자식이 쪼만한 게 오늘 첨 보는 이모 쪽팔리게 하는 말은 쏙쏙 잘도 골라서 한다.

갑자기 얼마나 내 초라한 양말에 온통 신경이 쏠린 나는 다른 데 구멍이라도 혹여 없는지 재빨리 확인하고 얼른 발바닥을 장판에 딱 붙여 양말 바닥을  안 보이게 했다.
그리곤  말까지 더듬어가며 변명을 했다.
비가 오는 날 검정 신발을 신으면 양말에 물이 들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얼굴도 시뻘갰을 게 분명하다.

오늘 온라인 신문에 난 난곡 관련 기사를 읽다가 그 옛생각이 났다.
왠지 그렇게 내게 톡톡한 창피를 준 그 아기의 씩씩함이 자꾸 떠오른다.
남의 양말 검은 걸 검다고 할 줄 아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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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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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4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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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동네는 사라졌지만…."
  [인권오름] 난곡 재개발 이주민 최정순 씨 이야기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823091307
▲ 서울 관악구 난곡.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인권오름


  서울 마지막 달동네로 유명했던 난곡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 1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난곡이 가난한 동네가 아니라 한다. 달동네가 없어졌으니 가난도 없어진 걸까?
  
   난곡에서 재개발 전 가옥주 가운데 새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9%가 채 되지 않는다. 세입자 중 일부는 임대아파트에 들어갔지만, 다섯 가운데 하나는 결국 임대료에 밀려 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천만 원이 넘는 임대 보증금을 구하지 못한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인근 지하방이나 옥탑에 월세를 얻었다.
  
  최정순 씨(49, 가명)도 달동네에서 월세 방으로 옮겨온 세입자이다. 그는 난곡에서 자란 토박이인데, 결혼하면서 떠났다가 95년에 다시 어린 딸과 들어왔다. 3백만 원 보증금으로 둘이 살 방을 구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재개발 소식이 전해졌고, 2000년부터 마을은 철거에 들어갔다.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어요
  
   지금 정순 씨는 옛 달동네에서 멀지 않은 주택에 두 칸짜리 방을 얻어 살고 있다. 산자락에 있어 한참을 올라가야 하지만 창밖으로 산이 마당처럼 펼쳐져 있는 집이다. 집이 참 좋다고 하자, 정순 씨는 "주거 조건은 좋아져도, 먹고 사는 게 힘들어졌다."고 했다.
  
  "내려와서는 안에 화장실도 있고 주거 환경은 좋아졌어요. 그 대신에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를 가지고 한 달 생활을 해야 하나 계산을 해 봤어요. 겨울에는 딸이 지내는 방을 잠그고 안방만 써요. 가스를 약하게 틀어놓고. 그렇게 절약을 해도 겨울에는 아무리 아껴도 가스비가 10만 원씩 나오니까, 백만 원을 넘게 가져야지 생활이 가능하더라고요. 먹어야죠, 떨어진 옷 입고 다닐 순 없죠, 또 겨울에 여름 신발 신고 다닐 수도 없잖아요. 쉽게 말해서 재개발하기 전에는 이틀에 한 번씩 고기 먹었다면,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먹기도 힘들어요."
  
  정순 씨는 재개발 후 월세 부담으로 더해진 생활고를 가장 큰 어려움이라 했다.
  
  "산동네 살 때는 대부분 전세 값 3백만 원이나 많으면 5백만 원에 살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사비용 20만 원 받아가지고 나온 세입자가 그 돈 가지고 내려와서 어디로 가겠어요."
  
  " 지금 사는 집이 보증금 5백에 월 25만 원씩 해요. 그러면 산동네에서 살 때 안 들어가던 돈이 평균적으로 25만 원씩 집 세로만 들어가는 거예요. 25만 원이면 두 사람 한 달 생활비예요. 산동네에서는 둘이서 공과금 내고 그 걸로도 살았는데 여기에서는 살 수가 없어요."
  
  정순 씨는 자기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주민들이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있을 거라고 했다. 더군다나 많은 세입자들이 단기간에 목돈을 구하지 못해 빚더미에 올랐다. 재개발을 빨리 진척시키기 위해서인지, 지금은 해 주지 않는 무담보 대출도 당시에는 신용불량자만 아니면 쉽게 해 주었단다.
  
  "산동네에서 3백만 원 전세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내려와서 집을 구하려고 하면, 예를 들어 보증금이 5백 만 원짜리 집에서 살아야 하면 2백만 원을 어디서 급하게 구해야 하니까 빚을 지지요. 거기다가 이사 가려면 차를 불러야 가지요, 잔손질 하고 이것저것 하고 나면 최소 못 들어도 이사 비용이 50만 원에서 백만 원이예요. 그러면 3백만 원을 빚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자가 안 늘어나겠어요? 그러다 보면 또 생활비가 없으니까 빚내서 살아야 하고."
  
  빚을 갚지 못해서 신용불량이 된 사람들에게는 일자리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정순 씨는 "컨테이너 박스 하나라도 주고 여기 들어가서 살라고만 했어도 여기 사람들 이렇게 엉망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을 급하게 내몰지만 않았어도 목돈을 구하느라 빚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불어나는 이자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테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일을 구하지 못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 난곡 재개발 공사 현장 ⓒ인권오름

  허울 좋은 임대아파트
  
   물론 이주 대책이라는 것은 있었다. 재건축 할 때부터 지낼 수 있는 임대아파트를 마련하는 순환식 재개발이 난곡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격렬했던 난곡의 철거민 투쟁이 얻어낸 성과이긴 하지만,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 3백에서 5백만 원 전세로 살던 세입자들에게 보증금 1350만 원과 월 16만 5천 원의 임대료는 턱도 없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대료는 해마다 올랐다. 당시 세입자 1501가구 가운데 44%인 666가구가 임대아파트에 들어갔지만, 이 가운데 20%인 142가구는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해 결국 임대아파트를 떠나고 말았다.
  
  " 임대 아파트 들어간 사람들이 데모 하는 걸 내가 뉴스에서 봤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비새는 집에 앉아 있다가 아파트에 가면 처음에야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임대 아파트 들어가면 1년에 한 번씩 임대료 올려, 또 보증금 올려. 그거 못 내서 임대아파트에서 쫓겨 난 사람들 허다해요. 그 사람들이 이 동네 와서 지하실 간다니까. 100만 원에 10만 원 하는 단칸방 같은 데로요. 임대료가 17만 원으로 책정 되었으면 17만 원으로 가만 놔둬야지 다달이 왜 올려요?"
  
  공인된 폭력, 재개발
  
  "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은 10원짜리 하나도 함부로 안 쓰거든. 양말도 500원짜리 사다 신고, 그것도 똑같은 걸 두 개 사는 거야 같은 색깔로. 왜냐면 한 짝 떨어지면 나머지 짝 맞춰서 신어야 되니까. 그렇게 사는 실정을 지네가 아느냐 이거예요? 허울 좋은 재개발, 주민들을 위한 재개발, 주거환경 개선하기 위한 재개발? 절대 아니에요."
  
  정순 씨는 재개발이 없는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뿐임을 지적했다. 주거환경을 개선하겠다면 동네 무너진 담장을 고치든지, 화장실을 짓든지, 부서진 길을 내 주는 게 옳지 않느냐는 것이다.
  
  " 산동네는 주거 환경이 나빴어도 살기 좋았어요. 일 나갈 때 이웃 사람한테 아이 좀 봐 달라고 부탁하면 애들 밥 주고 씻겨서 재워놔요. 그러면 나도 콩나물 사 무쳐서 같이 나눠 먹어요. 그 집에서 된장국 끓이고, 난 콩나물 무치니 반찬도 두 배가 되어 좋고. 이렇게 살았어요."
  
  "그때 제가 불 지를 때 까지 있었으니까, 거의 마지막 까지 있었어요. 일을 갔다 오니까 옆집까지 싹 다 부수어 놓았어요. 길 잘못 밟으면 무너지는 거야, 낭떠러지예요. 그래서 집에 올라갈 때 기어서 올라갔어요. 그 때 사람들 알게 모르게 많이 죽었어요. 아파서 간 사람들도 있고, 술에 폐인이 되어서 간 사람도 있고."
  
  용역 깡패, 철거반이 동원되어 물리적인 폭력이 자행되던 때를 기억한다. 그들이 집을 두들겨 부수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재개발로 인한 고통은 아주 오래 간다.
  
  " 거기에선 식당이나 여기 저기 나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보통 노동 일 하는 사람이 많았고. 직장 생활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데 거기서 내려오고 나서 빚을 많이 지고, 신용불량 된 사람들은 직장 생활 못할 거 아니에요? 그럼 그런 사람들이 할 게 뭐가 있겠어요. 먹을 게 술 밖에 더 있겠어요? 그럼 몸 나빠지죠. 그래서 결근해. 그럼 또 일 떨어지고 그런다고요. 생활에 무슨 낙이 있어요. 애들은 커가지, 들어갈 돈은 많지, 먹고 살 길은 막막하지. 그러니 술에 자꾸 의존하죠. 폐인 된 사람들 많아요. 그러면 병들고 일 못해 수급자 돼. 그러다가 '아, 이제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 일을 해야겠다.'해서 취로 사업을 나가요. 그 걸로는 생활이 나아질 수 없으니까 토요일 일요일에 따로 나가서 일을 하려고 하면, 또 그걸 못하게 한다고요."
  
  자활을 막는 생활보호제도
  
   정순 씨도 공공 근로를 나간다. 기초생활보장 수급비 30만 원과 공공근로로 받는 26만 원을 합친 약 60만 원이 모녀의 한 달 생활비. 공공근로는 일주일 5일, 한 달에 많아야 13번 밖에 할 수 없다. 이렇게 버는 돈으로는 근근이 먹고살기도 힘들다. 그러나 수급을 받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수입이 일정액을 넘으면 수급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정순 씨에게는 의료비를 비롯한 수급혜택이 절실하다.
  
  "나는 진짜 몸만 안 아프면 정부에서 주는 돈 안 받아요. 이건 일을 하지 말라는 거죠. 그럼 수급자들은 주는 일만 하다가 가난에 쩔어서 죽고, 이게 우리 자식한테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대물림 되는 거거든. 토요일 일요일 수급자들이 일을 나가면 놔둬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야 얼른 벌어서 월세 벗어나서 전세라도 가지. 애도 대학도 보내야겠고. 그런데 거기서 주는 돈만 가지고 살라 하면, '너네는 주는 일만 하고 가난에 찌들려 살아라.' 이거 아니에요? 지금 정책이."
  
  정순 씨는 저소득층에게 창업 자금을 저리로 대출해준다는 공고를 보고 가슴이 설레었다. 분식집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급권자라 안 된다'는 답을 듣고 실망했다.
  
  "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뭐를 만들어 놨다, 뭐를 만들어 놨다하는데, 가서 해 보면 문턱이 너무 높은 거야. 가게를 내기 위한 자금을 대출을 해 준다기에 갔어요. 가보니까 연대 보증을 두 사람 세우라는 거야. 우리 같은 수급자한테 연대 보증을 누가 서 줘요? 그게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 준다는 거면 자기네들이 보증을 서 주던가. 연대 보증만 세우면 되냐고 물었더니 또 등본 가지고 오래요. 그래서 가지고 갔더니 수급자는 안 된다는 거야."
  
  "현실이 안 따라주니까, 희망이 없다, 그런 말 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며 가슴을 치기도, 분노하기도 한 그에게 정말 희망이 없냐고 물었다. '너무 칙칙한 얘기만 했나 보네.'라며 웃는 그에게 우스운 질문이었나 보다.
  
  " 얼른 얼른 돈 벌어서 예쁜 집도 갖고 싶고, 우리 딸내미 예쁜 집에서 살게 해 주고 싶고. 꿈이야 많죠. 근데 현실이 안 따라주니까 희망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거지요. 좌절도 안 해요, 무덤덤하게. 오늘 하루도 무사히 감사하게 살아요."
  
   힘겨운 삶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부조리함에 분노할 줄 아는 정순 씨. "우리 같이 없는 놈 열 명이 가서 백 마디를 지껄이는 것보다 있는 놈이 가서 한 마디를 지껄이는 게 먹힌다니까. 그 사람들 데려다가 석 달 열흘 굶겨봤으면 좋겠다는 말 꼭 써주세요. 허허."
  
  흔히 재개발에 대한 관심은 철거 시점까지만 그치고 만다. 그러나 오늘 정순 씨는 재개발이 얼마나 오랫동안, 원 주민들을 더욱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이야기했다. 지금도 여전히 서울 곳곳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속에서 난곡 재개발 문제는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달동네가 사라지고 도시 겉면은 화려해지고 있다. 그러나 열악해진 삶의 조건은 지하방 구석구석으로 숨어들고 있다. 재개발이 변화시킨 원 주민의 삶은 지금 재개발에 직면한 이들이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재개발은 그저 새 아파트를 짓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빼앗는 폭력이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우성희/전 난곡교육센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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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적 같은 일어났다. 푸시업에 성공했다. 그것도 열 번이나.

처음에 팔굽혀 펴기를 시도했을 때는 웃기지도 않았다. 그냥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서 무릎 아래로는 그냥 땅에다 대고 상체만 조금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래도 죽을 맛이었다.

가끔씩 하다가 말다가 했는데.
요즘 가을 날씨가 도래함에 따라 식욕이 동했는지 또 과식주의보가 내리는 바람에.
그래서 며칠 전부터 좀 열심히 하기 시작했는데.

글쎄 오늘 글쎄 진짜 팔굽혀 펴기를 한 것이다.
흥분해서 삼돌이한테도 시범을 보였는데 코멘트가 뭐, "굽힐려면 확실하게 굽혀야지".
이런 식으로 시시하다.

이거 하는 데 몇 달이 걸렸구만은 노력을 몰라줘도 정말 몰라주는군.

사실 팔굽혀펴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며칠 전에 하진의 뒷이야기를 쓴 이래로 안방 책꽂이에 가서 하진 섹션을 살펴봤다. 안 읽고 사두기만 한 단편집이 눈에 띄어서 목차를 보니까 "미스 지"라는 아주 캐치한 제목이 가운데 등장한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미스 지는 19살 고아인 중공군 군인 지준의 별명이다. 피와 목숨을 다 바쳐 러시아 제국주의자들에게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철저한 애국 공산주의자 지준은 그 굳은 신념에도 불구하고 영 신체적으로 군바리 노릇하는데 결함이 많다. 

비상 점호에 바지 앞뒤를 거꾸로 입고 신고를 하지를 않나, 수류탄을 던진다고 코 앞에 떨어드려 죽을 뻔 하지를 않나, 식당 국수 통 엎지른데 빠져 옷을 다 적시지를 않나, 남 먹는만큼 안 먹고 행군 나갔다가 기절을 안 하나, 술 시합 내기를 했다가 맛이 가서 응급실로 실려가지를 않나.  혁명적 지준의 인생이 군바리로서는 쑤나미급 재난이다.

심심한 동료 군바리들은 지준을 미스 지라 명명하고는 그의 사건사고를 기록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낸다.

미스 지 국경을 순찰했네
바지 지퍼 새로 엉덩이 내보이며

미스 지 수류탄을 던졌네
얼굴만 새로 곱게 단장하려고

미스 지 국수에 넋이 나가
단숨에 국수 솥 안으로 잠수를 했네

미스 지, 소식가
전투 중에는 밀빵 하나에 울었지

미스 지 고래처럼 폭음을 했지만
여전히 사내임을 증명하지를 못했네


겨우 열아홉의 혁명전사가 참 불쌍하게도 됐다.  단편 자체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읽었는데 읽고 나니 대학 동기 하나가 생각이 났다. 지준 만큼이나 열혈적인  혁명전사 후보였다. 그러고보니 나이도 소설 속의 지준과 비슷하군.  지준처럼 빼빼 마르고 눈이 번쩍번쩍 하는 이였다. 혁명, 계급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흥분한 어조에 경상도 사투리가 더해져  내용이 열배는 덩달아 과격하게 들리곤 했다.

우리 대다수는 농활을 대략 일해야 술마실 수 있는 엠티 정도로 이해했지만, 그 친구는 분명 농활이 현장학습의 기회라고 결의를 다졌을 것이다. 충청도에 도착해서 마을 회관 앞에선가 이장님 집 앞 마당에선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무슨 기억도 안나는 진짜 시시한 게임을 했다.  불행히도 자꾸만 그 친구가 걸렸다. 우리는 재미있어서 그 때마다 깔깔거렸다. 한 열번쯤 걸렸을까 그 친구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일어나 뛰어나갔다.

아아 우리의 소심한 열혈 전사여.
기껏해야 한 살 많은 선배들은 상황 수습한다고 덩달아 뛰어나가고.

그 외에도 보신탕 먹는 문제와 반바지 착용 문제로 침 튀는 이념 논쟁을 벌이는 등 그 해 농활에선 참 재미있는 일이 많았었다.

그 친구는 마지막 봤을 때 무슨 노동문제 연구소던가 하는 데서 실무적인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어려서는 좀 쪼잔했지만 나는 그 친구의 열받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날좋은 따스한 봄날 산업혁명과 노동운동 강의시간에 꾸벅꾸벅 강의실에서 조는 나를 사정없이 볼펜심으로 찔러대던 그 얄미움을 잊지 못하겠다. 아이구 강의도 꼭 그렇게 혁명적으로 들어야 하냐.  혁명도 좀 살살 해야지.

육백원하던 사식당 짜장면 생각이 그리워진다.
방금 푸시업 했는데 먹으면 안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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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0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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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1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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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열 달 전쯤 점심시간에 대학 후배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다. 학번 차이가 한참 나서 학교 다닐 때는 잘 알지 못했던 후배였으나 이역만리에서 보니 반가웠다. 직장의 점심시간이라는 게 빠듯하게 마련이어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후배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사교성이 없는 나는 뭐 바쁜가 보지 하고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어쩌면 내가 준 휴대폰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지만 메세지를 남기지 않아서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갑자기 그 후배 생각이 났다. 자그마치 삼 년 전에 내가 번역해서 넘긴 책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연락을 받고 사시사철 자나깨나 책을 읽는 것으로 유명한 선배에게 한 권 책을 보내려고 선배의 이메일주소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한 선배였는데 지난 몇 년 새에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몇 년 전에 두서너번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신이 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공짜 책을 준다니 연락을 하겠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깐깐한 성격에 이메일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누구 손해냐 하고 미리 마음 상하기 전에 준비도 해두었다.)

연장자를 공경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서인지 도움 받은 은혜는 꼭 기억하라는 옛이야기에 만연한 교휸 때문인지, 우리는 후배들보다는 선배들에게 늘 훤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후배인 나는 공짜 책을 못 줘서 안달인데 (물론 대단한 책도 아니기는 하지만...) 선배는 연락도 안 하지를 않는가. 공짜책을 준다는데 후배가 연락을 안 하면, 얼씨구 배부른가 보네, 했을 것이다. 하긴 그보다는 책을 준다고 하면 후배 입장에서는 입이 찢어졌겠지. (일단 내용을 보면 흥분이 쫙 가라앉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나는 대체로 선배들에게는 평균적 후배 노릇을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심한 선배임에 분명하다.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열 달 전에 우연히 보고 다시 연락을 안 한 후배한테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그런 짓을 하는 적 없는 나로서는 적잖이 무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용기를 내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한 줄 띄웠다.

설마 했는데 바로 다음날 줄줄이 내가 보낸 한 줄의 대여섯배 되는 분량의 (그래봤자 대여섯줄이지만) 이메일이 왔다. 한글이 다 깨져서 고쳐서 보느라고 고생좀 했다. 겨우 html파일로 전환해서 보니 후배의 이메일의 첫줄이 글쎄글쎄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제가 사교성이 없어서"가 아닌가.

유유상종이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데 사교성 없는 성격의 극치인 나는 사교성 없는 이 후배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훨씬 전에 연락을 했을 것을... 그러면서 앞으로 내 무심함으로 연락이 끊긴 사람들에게 연락할 때는 이 구절을 써먹어야겠다, 하고 외워두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알고 써먹을 줄 아는 후배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사교성에서 한 발짝 앞선 듯.

"글쎄 제가 사교성이 워낙 없어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사교적인 서두가 또 어디에 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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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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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3 1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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