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열 달 전쯤 점심시간에 대학 후배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다. 학번 차이가 한참 나서 학교 다닐 때는 잘 알지 못했던 후배였으나 이역만리에서 보니 반가웠다. 직장의 점심시간이라는 게 빠듯하게 마련이어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후배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사교성이 없는 나는 뭐 바쁜가 보지 하고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어쩌면 내가 준 휴대폰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는지도 모르지만 메세지를 남기지 않아서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갑자기 그 후배 생각이 났다. 자그마치 삼 년 전에 내가 번역해서 넘긴 책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연락을 받고 사시사철 자나깨나 책을 읽는 것으로 유명한 선배에게 한 권 책을 보내려고 선배의 이메일주소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한 선배였는데 지난 몇 년 새에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몇 년 전에 두서너번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신이 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공짜 책을 준다니 연락을 하겠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깐깐한 성격에 이메일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누구 손해냐 하고 미리 마음 상하기 전에 준비도 해두었다.)
연장자를 공경하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서인지 도움 받은 은혜는 꼭 기억하라는 옛이야기에 만연한 교휸 때문인지, 우리는 후배들보다는 선배들에게 늘 훤씬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후배인 나는 공짜 책을 못 줘서 안달인데 (물론 대단한 책도 아니기는 하지만...) 선배는 연락도 안 하지를 않는가. 공짜책을 준다는데 후배가 연락을 안 하면, 얼씨구 배부른가 보네, 했을 것이다. 하긴 그보다는 책을 준다고 하면 후배 입장에서는 입이 찢어졌겠지. (일단 내용을 보면 흥분이 쫙 가라앉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나는 대체로 선배들에게는 평균적 후배 노릇을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한심한 선배임에 분명하다.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열 달 전에 우연히 보고 다시 연락을 안 한 후배한테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 그런 짓을 하는 적 없는 나로서는 적잖이 무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용기를 내서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한 줄 띄웠다.
설마 했는데 바로 다음날 줄줄이 내가 보낸 한 줄의 대여섯배 되는 분량의 (그래봤자 대여섯줄이지만) 이메일이 왔다. 한글이 다 깨져서 고쳐서 보느라고 고생좀 했다. 겨우 html파일로 전환해서 보니 후배의 이메일의 첫줄이 글쎄글쎄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제가 사교성이 없어서"가 아닌가.
유유상종이고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데 사교성 없는 성격의 극치인 나는 사교성 없는 이 후배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훨씬 전에 연락을 했을 것을... 그러면서 앞으로 내 무심함으로 연락이 끊긴 사람들에게 연락할 때는 이 구절을 써먹어야겠다, 하고 외워두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알고 써먹을 줄 아는 후배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사교성에서 한 발짝 앞선 듯.
"글쎄 제가 사교성이 워낙 없어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사교적인 서두가 또 어디에 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