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의 이문구, 김동리, 박두진, 천상병…
'김일주 문학인 사진전-한국문학 추억의 작고문인 102인' 전시회
등록일자 : 2007년 12 월 11 일 (화) 18 : 19   
 


  구상, 김동리, 김춘수, 박두진, 이문구, 천상병, 황순원 등 작고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문인사진작가이자 소설가인 김일주 씨가 지난 40년 동안 앵글에 담아 온 문인들의 사진을 모다 '김일주 제4회 문학인사진전-한국문학 추억의 작고문인 102인' 전시회를 연다.
  
  주최 측은 이번 전시회에 대해 "한국을 대표하는 작고 문인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문학인의 작업 공간과 일상의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문학에 대한 관심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해 한국문학박물관 건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작가 스스로 "제 사진은 작품사진이 아니라 기록사진이다"고 밝히고 있는 만큼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들의 시선은 문인들의 '얼굴'을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40년간 촬영된 102인의 문인 8만여 장의 사진에서 고른 문인들의 사진 속에는 그들의 생생한 작업 공간 및 생활 공간이 새겨져 있으며, 시대를 풍미하고 고민하던 모습들과 함께 문학에 대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는 평가다.
  
이봉구 ⓒ김일주

  '명동백작' 이봉구 선생이 수유리 변두리에 있는 선술집에서 안주도 없이 홀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찍을 때, 김일주 씨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당에서 명상에 잠긴 미당, 아이 돌잔치 때 고무신 신고 자전거포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이문구 선생, 중앙대 예술대 옥상에서 파안대소하는 김동리 선생, 고향 안성 들판에 누워 시심에 잠긴 박두진 선생 사진 등이 김일주 선생이 아끼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번 공연은 문화관광부와 국회문화정책포럼, 대산문화재단, 네이버, 교보문고 등의 후원을 받아 '문학사랑'과 '한국문화복지협의회'의 주최로 열리며, 12월 17일~23일까지 1주일 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 위치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열린다.
  
  전시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문학관,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순회 전시될 예정이며, 모든 작품은 문화예술위원회에 기증해 한국문학박물관이 건립되면 문학컨텐츠로 이용될 계획이다.
  
  다음은 김일주 씨가 공개한 사진들 중 일부이다.
  
▲ 구상 ⓒ김일주

  
▲ 김동리 ⓒ김일주

  
▲ 김춘수 ⓒ김일주

  
▲ 박두진 ⓒ김일주

  
▲ 이문구 ⓒ김일주

  
▲ 천상병 ⓒ김일주

  
▲ 황순원 ⓒ김일주

  
▲ 흑백필름속에 담겨있는 문인들의 모습을 꼼꼼히 챙기시는 김일주 선생님의 작업모습. ⓒ임안나

김하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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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05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새해에 행복한 일 많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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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1-04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과 함께 아름다움이 더 하는 배우에요. 정말 좋아하는 배웁니다.
 

황석영 “지금의 한국문학 침체기 아닌 중흥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3633.html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한국문학 활기 불어넣는 작가 황석영

<바리데기>의 작가 황석영(64)씨가 침체된 한국문학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한겨레> 연재를 거쳐 지난 7월 중순에 책으로 나온 <바리데기>는 출간 두 달이 채 안 된 현재 15만 부를 훌쩍 넘겨 팔리면서 주요 서점들의 종합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황석영씨는 책 출간 이후 서점과 학교, 공연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만나면서 <바리데기>와 한국문학의 부흥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04년 초 이후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그는 현재 한국문학이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활력을 보이고 있다면서 문단 안팎의 위기론을 일축한다. 부활된 ‘한겨레가 만난 사람’은 <바리데기>의 작가 황석영씨를 지난달 31일 만나 그가 생각하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젊은 작가와 평론가들에게 하고 싶은 당부, 다음달 영구 귀국을 앞둔 그의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었다.

- <바리데기> 출간 이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 등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여러 현장에서 독자들과도 자주 만나고 계십니다. 독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신문·방송에 웹사이트까지 한 바퀴 다 돌았는데, 확실히 한국 사회가 변하고 있더군요. 우리가 알던 종래의 미디어의 흐름들하고 인터넷에 나와 있는 젊은 사람들의 견해나 하고 싶은 일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젊은이들이 체제에 대해서 강력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전부 개인적으로 찢어져서 파편화되어 있어요. 그게 모아지면 어떤 여론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분히 아나키적이고 약간 불그족족한(=사회주의적이라는 뜻) 그걸, 정작 젊은이들 자신은 뚜렷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젊은이들의 큰 불만은 우선 굳건하게 변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직장과 일에 대한 것이더군요. 일이라는 게 인간적인 생활이랄까 삶의 질을 높이는 고용상태가 아니라는 건 전세계적으로 마찬가지인데, 특히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거기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대처방법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회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건 다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작년에 일시 귀국했을 때 종이신문이나 공중파 방송을 대하면서 느꼈던 것과는 굉장히 다른 걸 젊은 사람들에게서 느꼈습니다. 그걸 보수냐 진보냐 하고 갈라서 얘기하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상대하는 미디어도 달라지고 있고 자기를 표현하려는 미디어가 달라지고 있는데 이걸 기존의 시스템 안에 있는 언론이나 문학이 어떻게 대처하고 활용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사회 변화를
문학이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야 할 때

- <바리데기>가 벌써 15만 부 넘게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손님>이나 <오래된 정원> 같은 선생님의 앞선 소설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고 있는데요.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아보니까 <바리데기>를 사 간 독자의 70%가 20, 30대고 10대도 10%가 넘더군요.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젊은 독자인 거죠. 제 책 출판에 있어서는 초유의 일입니다. 거의 새로운 황석영 소설 독자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죠. 작가로서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죠. 어떤 점이 젊은 독자들의 반응을 끌어모았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종래와 달리 장황한 디테일 묘사 대신 함축된 영상적 구성과 문장들을 구사한 게 주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이 짧지 않습니까? 거기에다가 너무 사실주의적인 묘사보다는 약간 거리를 두고, 말하자면 이건 설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일 텐데, 상징적으로 현실을 잡아낸다든가 하는 점들 때문에 젊은 독자들이 읽기 편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또 하나는 군데군데 독자 서비스를 가미한 거죠. 그 전에는 작가는 냉정하게 뒤에 숨어서 직접 말을 하진 않고 등장인물들만 서로 얘길 주고받고 했는네, 이번에는 간간이 보이지 않는 작가가 말하자면 상징적인 얘기를 던진단 말이죠.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라든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다’ 같은 구절들이 그 예인데, 이런 독자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간간이 나와야 젊은 독자들이 음미하면서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는 거죠. 사실 처음엔 이런 것들을 집어넣으면서 굉장히 쑥스러웠거든요. 근데 지금은 ‘아, 이런 서비스가 필요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죠.

그리고 개중에는 예전 소설을 읽던 독법으로 <바리데기>를 읽고 나서, 디테일이 너무 건성건성한 것 아니냐, 또는 왜 바리가 그렇게 끔찍하고 엄청난 인생고비를 겪는데 스무드하게 물흐르듯 지나가느냐, <심청> 같은 이전 소설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젊은 독자들한테는 위와 같은 단계를 거쳐서 현실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작품을 쓸 때 컴퓨터 옆에 메모를 한 장 써 놓았습니다. ‘쉽게, 아주 쉽게 그리고 편하게 쓰자.’ 이렇게 붙어 있었는네 이건 종래 내가 엄정한 리얼리티, 말하자면 꽉찬 빈틈없는 구성, 이런 데서 조금 벗어나려고 했던 노력, 그런 노력을 하자는 얘기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느슨하게 쓰여졌다는 건 아닙니다. 느슨하게 쓰여졌다기보다는 느슨하게 읽히도록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평론가가 말하기를, 초·중학생 자녀들이 <바리데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자기 견해를 이야기는 걸 보고 당황하고 놀랐다더군요. 제 소설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바리데기>를 필두로 해서 한국 소설이 지금 약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일본 소설의 융단폭격 속에서 한국 문학의 위기론이 나오고 있는 중이기도 하구요. 선생님은 평소 한국 소설이 세계 다른 어느 나라 문학에도 없는 활력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계신데요.

“그건 진심입니다. 제가 밖에 나가 경험한 것도 그렇고, 올해가 이제 겨우 중반이 지났는데도 벌써 얼마나 많은 좋은 소설들이 출간되었습니까. 아마 하반기까지 계획되어 있는 몇몇 출판사의 장편소설 내지 창작집들까지 계산하면, 이건 가히 전례없던 일이라고 봅니다. 흡사 한국 문학의 중흥기 같은 느낌이에요. 빈소리가 아닙니다. 다양한 서사와 다양한 형식, 그리고 다양한 연령대 작가들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건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본격문학 소설이 한 달에도 몇 권씩 쏟아져 나오면서 경쟁을 한다는 건,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한국 독자들의 저력을 너무 폄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 소설에 대한 그간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한때 외국의 대중소설이 많이 읽힌다는 걱정도 했는데, 일단 그런 소설이라도 많이 읽는 건 좋은 일입니다. 다만 대중소설은 대중소설대로의 몫을 두되 본격문학과는 가치평가를 분리해서 할 필요는 있겠죠. 서구의 경우에도 사회 중추를 이루는 매체들은 끊임없이 본격문학에 대해 거론하고, 대중문학은 대중매체에서 다룹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그런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고, 특히 몇몇 문예지나 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계속 위축돼 오고 있지요. 우리가 미리 일본을 거울 삼아 조심한다면, 그러니까 문학적인 가치를 사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면, 틀림없이 우리 문학은 미디어 변화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남을 거라고 봅니다.”

- 선생님은 요즘 ‘시적 서사’니 경장편이니 하는 용어로, 원고지 600~800장 정도 분량의 압축적인 장편소설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바리데기>가 전형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경우겠죠. 그런 주장을 하시는 배경과 그런 장르의 필요성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영화 감독들과 얘기를 해 보니까, 몇천 장짜리 서사를 다루면 영화가 원작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디테일과 내용에 치이고, 단편을 다루면 예술영화의 맛은 나지만 소품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 때문에 고민을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까 서사를 가지고 있되 한 두 시간 분량의 필름에 담을 수 있는 걸로는 경장편이 맞겠다 싶은 겁니다. 중편보다 조금 더 긴 분량의 짧은 장편이죠. 그렇게 되면 작가 스스로도 압축하게 되고 지지부진한 묘사도 성큼성큼 건너뛰면서 영상적인 신으로 표현하게 되겠죠. 그게 영상에 어울릴 뿐만 아니라 요즘 독자들의 구미와 생활방식에도 맞는 형식이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원고지 7, 800장 분량이면 주말을 이용해 읽어 한 권을 읽어 치울 수도 있고, 직장인들은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며칠 만에 끝낼 수도 있겠구요. 그런 경장편은 쓸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형식의 작품을 몇 편 더 쓰면서 한편으로는 종내의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두세 권 정도로 압축한, 말하자면 경대하소설 작업도 병행하려고 합니다. 전부터 쓰겠다고 밝혀 온 철도원 삼대 이야기라든가 강남 형성사 같은 걸 그렇게 써 보려 합니다. 분량이 줄 뿐만 아니라 예전 소설 방식과는 다르게, 표현양식도 자유롭게 하려고 하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인물 구성 같은 것도 좀더 자유로운 방식입니다.”

- 그렇지만 90년대 초부터 몇몇 젊은 작가들이 영화적 기법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가 비판적인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문학이 영상에 투항한다는 식의 우려나 걱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제 문학은 출발부터 영화적이었습니다. <삼포 가는 길>도 그렇고 <장길산>까지도 그렇죠. 제 문장이나 구성을 보면 매우 영화적입니다. 가령 그리움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철길, 비어 있는 플랫폼에 어린아이가 우산을 들고 서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림을 보여주는 거죠. 작가의 문자 관념을 피하고 엄격한 자기규제 속에서 말하자면 냉정한 화면들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더 나아가서 거기에다가 시적인 메타포를 겸비하려는 겁니다. 시적 메타포라는 건 어떻게 생기는 걸까요. 사물과 사물이 단순히 카메라에 의해서 선택되어서 이어 붙여지면 그 속에서 ‘이미지’라고 하는 여백이 생깁니다. 그 이미지는 작가가 형성하는 게 아니라 독자가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시적 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두고 영화에 투항했다고 해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영화란 게 말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산물이고 총아였는데, 사실 영화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문학적 콘텐츠가 그 안에 있었거든요. 그런 기미를 알고 몇몇 영화인들과 문학인들이 최근에 ‘서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술 먹는 모임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기도 했지요(웃음). 농담이 아니라 그런 노력은 영화와 문학 양쪽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선생님이 소설가시라서 아무래도 소설에 관한 말씀을 주로 하십니다. 시가 대중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어진 듯한 서구에 비해 한국은 그래도 시 독자가 많은 편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우리도 서구의 전철을 밟아 가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도 듭니다. 시가 회생할 길은 없을까요?

“시의 경우에도 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끌어내야 합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건물 앞을 지나자면 계절마다 붙어 있는 시를 보게 됩니다. 볼 때마다 책에서 얻는 것과는 또다른 감흥을 줍니다. 잠시, 그 시간 그 장소에 서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거든요. 가령 출퇴근길에 만나는 전광판에 광고나 정치 뉴스만 나갈 게 아니가 시 몇 줄이 시적 영상과 더불어 흘러간다면 대단히 좋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광고 카피나 뮤직비디오 같은 데도 시적 영상이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문학 쪽에서 적극적으로 시적 영상을 제공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요컨대 산문의 변화나 시의 변화를 종래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고정된 방식으로가 아니라, 현대의 삶과 생활조건, 소비조건 같은 걸 다 감안하면서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오히려 문학 쪽에서 그 변화를 끌어당겨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전의 문화운동은 현장에 가서 탈춤이라든가 인형극이라든가 남사당놀이 같은 걸 변형시키고 그걸 현실에 접목시켜서 선전 선동하는 일을 주로 하면서 판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다른 장로까지 확산시켰던 게 7, 80년대의 성과인데, 요즘 같은 유시시(ucc)라든가 웹사이트 이런 것들이 적극 활용되면서 젊은 사람들이 서로 논의하고 모으는 과정이 새로운 문화운동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문화운동은 미디어운동이 아닌가 하는 거죠. 저는 10월에 완전 귀국해서 소설 쓰는 일 외에 여가가 생긴다면 이런 새로운 운동을 조직화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건 제 업종의 번영을 위해서도 대단히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 말씀을 듣다 보니 선생님이 평소에 문화 전문 라디오나 인터넷방송 같은 매체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역설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그런 쪽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게 있습니까?

“제 생각은,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 또 돈도 필요할 테니 여유가 있는 좋은 분들이 두루 힘을 모아서 미디어센터 같은 걸 하자는 겁니다. 하되 종래처럼 권력이나 무슨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문화를 기본 목적으로 하고 지금 현재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웹사이트들, 유시시 운동 같은 것들을 수렴하고 표현을 대행해 주는 미디어센터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궁리 중이니, 빠른 시일 내에 가시화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 얘기가 조금 돌아가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아까 일본문학에 대해 잠깐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독서 시장에서는 ‘일류(日流)’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일본 대중소설들의 인기가 높습니다만, 선생님은 일본문학에 대해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일본문학의 현황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일본문학이 대중화의 길을 걸으면서 본격문학의 회생과 존립을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죠. 본격 작가들의 경우 책이 팔리지를 않으니까 역시 안 팔리는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계속 영역이 줄어들면서 자폐의 길로 들어서는 거죠. 문학적 가치를 개인의 밀실에서 보전하려는 형태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일본의 선배 작가들이 다 그런 길을 걸으면서 말하자면 후반기 문학을 마무리했습니다. 지금도 일본문학에서는 본격과 대중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옥석을 구분하는 게 굉장히 어렵게 되어 있죠.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를 일본 대표작가처럼 알게 되는 사태가 그런 것입니다. 사실 하루키는 세계적인 문학행사라든가 문학의 가치평가에서 제외되어 있는 작가거든요. 저는 일본문학이 다시 중흥하기를 바랍니다. 일본문학은 좋은 바탕을 가지고 있어요. 동아시아에서는 제일 먼저 근대문학을 개척해 온 게 일본문학 아닙니까. 현재 일본문학의 모습은 저로서는 안타깝습니다.”

- 그렇다면 중국문학은 어떨까요? 일본 소설에 이어 요즘은 중국 소설들이 ‘블루 오션’으로 취급받고 있는데요.

“중국의 현대 문학에 대해선데,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하죠. ‘루쉰 이후 대가를 발견하기 힘들다.’ 저는 그 말에 어느정도 동의를 합니다. 중국이 사회주의 시스템 내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거대한 공룡 같은 자본주의가 진전 중인데, 일설에 의하면 검열제도가 그물망처럼 되어 있어서 작가들이 그다지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있답니다. 가령 문혁(문화대혁명) 이후 문혁에 대한 비판은 열려 있었는데, 중국 자본주의의 속도, 부패, 관료주의 같은 것들을 정면으로 비판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는 거죠. 자본주의의 발전상황과는 역으로 창작의 자유는 위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실제로 중국의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는 있는데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우리로 치자면 <물레방아>나 <벙어리 삼룡이> 같은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것들이거나 ‘새마을 소설’이라고나 할,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문학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개중엔 아주 뛰어난 작품들도 있죠. 그런데 중국의 현재의 모습, 현대 자본주의에 비추어 볼 때 그게 현대문학이냐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본과 중국문학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엄청난 가능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겁니다. 우리 문학도 훨씬 자유스러워졌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서사와 현실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한동안 방황도 있었다고 봅니다. 이제 서사를 회복하는 기미가 있구요. 이제는, 저를 포함해서 말인데, 서사와 현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대로 돌아오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젊은 작가들
독서와 체험 바탕
자기 냄새 나는 글 써야

- 한국문학의 가능성과 다양성에 대한 신뢰를 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후배 작가들에 대한 고언도 종종 하십니다. 이 기회에 젊은 작가들에게서 느끼는 아쉬움과 당부의 말씀도 한번 해 주시죠.

“나이 든 사람의 노파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 작가가 되려고 하는데 글을 어떻게 쓰는지, 실질적으로 배우고 싶다 해서 문예창작과를 많이 갑니다. 문창과가 이렇게 많은 나라는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문창과를 증오하는 건 아니지만, 참 좋지는 않은 게 어느정도 비슷하고 무난하게 구성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훈련을 시키는 것 같아요. 이건 마치 미술대학에서 석고 데생을 많이 시켜서 비슷한 경향의 화가들을 양산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만의 표현으로 그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독특하게 자기 냄새가 나는 글이 필요합니다. 남과 달리 쓸 때 작가의 개성과 힘이 나타나는 거죠. 그렇게 본다면 저는 창작의 기본 같은 건 한 두세 달 정도 자습하면 되지 않나 싶어요. 지금 창작론이니 하는 기법을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런 걸 한두 번 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건 결코 예술가에게 좋지 않거든요. 광범위한 독서와 체험이 젊은 작가들에게 중요한데 그 둘이 다 빠져 있지 않나 하는 염려가 드는 거죠. 그래서 젊은 작가들한테는 문학 이외의 다른 책들을 많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또, 한창 젊을 때인데, 더구나 소설 쓰는 사람은 다양한 체험을 할 기회가 많다고 봅니다. 정치 하는 사람들도 심기일전 할 땐 현장에 가서 일하지 않습니까. 작가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거죠.

또 하나,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황석영이라든가 아무개라든가, 그동안 대중독자와 접촉했던 브랜드 있는 작가들 몇을 빼고 다른 작가들이 충분히 재능을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재능 있고 가능성 있는 작가들이 출판시장에서 기껏 5천부나 1만부 팔리다가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면 일반 독자들은 그들을 다 놓쳐버린단 말이죠. 이걸 누가 제대로 소개하고 갈무리하고 정리해주고 할 것인가. 문학전문기자나 평론가들, 또는 문예지 편집진들 이런 사람들일 텐데, 이런 사람들 책임이 크다는 거죠. 가능성 있는 재능들을 발견해내고 독자에게 안내하려는 노력이 앞으로 더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화두는 언제나 변화
그 성과가 ‘바리데기’

- 이제 서서히 말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런던에 처음 가신 게 2004년 1월이었고, 2005년 12월에 프랑스 파리로 옮겨서 지금까지 살고 계십니다. 10월 말에 완전 귀국하신다니 3년 반 이상 해외에 체류하신 셈입니다. 처음 한반도를 떠나 해외로 나갈 때는 나름의 의도랄까 생각을 가지고 나가셨을 거라고 봅니다. 이제 귀국을 앞두고 계신데, 애초에 생각했던 바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보십니까?

“물론 생각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1998년 출옥 이후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그리고 또 <삼국지>까지 많은 작업들을 했죠. 북한을 방문하고서 제가 돌아오지 못하고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냉전의 끝무렵이었고, 세계가 변화하고 재편성되기 시작하는 즈음에 돌아왔어요. 출옥 이후 한참 미친 듯이 일을 하다 보니, 다시 변화된 세계의 모습을 체험하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하반기 문학이 나한테 매우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한반도를 밖에서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여러가지로 저에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저의 화두는 언제나 변화입니다. 동어반복하지 않겠다는 거죠. 세계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고 그런 변화를 담은 여러가지 기획을 가지고 돌아온 겁니다. 가장 큰 성과는 물론 <바리데기>였구요. 결과적으로, 의도하고 뜻했던 바보다 200%의 성과가 있었어요.”

- 영어는 많이 느셨는지요? 런던에 계시다가 잠깐 귀국했을 때 보니까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시는 걸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만(웃음).

“불란서로 가고 나서는 또 잊었어요. 런던에 있을 때는 영어는 어느정도 정리가 됐었죠. 지금은 많이 잊었어요. 아무래도 책을 봐야겠더군요. 영국에선 책을 많이 읽었는데, 불란서에선 포도주 먹고 글 쓰느라 영어 책을 못 봤거든요. 잡지나 신문 같은 걸 계속 보면 괜찮을 것 같아요.”

- 일전에 저희 신문에도 기사가 났습니다만, 10월에 완전 귀국하시면 전남 구례에 정착하고 그곳에 일종의 문화학교 같은 것도 세우실 계획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귀국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알려 주시죠.

“요즘은 지자체에서 문인이나 예술가들을 유치하려고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이더군요. 저에게도 몇 군데에서 오라는 제안이 있습니다. 황 아무개가 오면 그가 워낙 떠들썩한 사람이니까 다른 인사들 왕래도 잦아지고 문화행사도 많아질 거 아니냐 하는 기대를 하는 것 같아요. 구례도 그 중 하나일 뿐 아직 확정된 건 아니고 저로서는 기본 입장만 얘기한 겁니다. 작가들의 집필실이나 레지던스 프로그램, 또는 문화예술대학 같은 걸 운영할 만한 공간을 찾던 차에 구례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겁니다. 전북 진안에서도 폐교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해 와서 그렇지 않아도 곧 현장을 가서 보려고 합니다. 젊은 후배들을 위한 문화학교 같은 건 적당한 장소만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몇몇 분들과 얘기했더니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그런데 진안은 그렇다 쳐도 구례는 너무 먼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경기도쯤에 어디 적당한 데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영상 박수진 피디 jjinpd@ne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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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Rattawut Lapcharoensap

출처: <Alone in the kitchen with an eggplant> pp. 147-153.
검둥개 번역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끊이지 않고  텔레비젼에 방송되었다. 그들의 더러운 얼굴과 앙상한 뺨, 부어오른 배, 파리가 끓는 멍한 두 눈.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햇다. 뭔가 대책이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음식과 약품, 다른 필수품,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에티오피아로 보냈다. 팝스타들이 모여서 록 발라드 곡을 부르며 성금을 모았다. "위 아 더 월드," 팝스타들이 이렇게 구구구 그들의 상반신을 흔들며 합창했다. "위 아 더 칠드런. 렛 뎀 노우 잋츠 크리스마스."

그러는 동안 방콕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에티오피안"이라는 말이 말라빠진 아이들을 지칭하는 수식구가 되었다. 몸에 비해 커다란 머리를 가진 나처럼 말라빠진 아이 말이다. "이봐 에티오피안," 다른 일곱살 짜리들이 이렇게 희죽대며 야유했다. "너 말이야 너, 안경 쓰고 팔만 긴 놈. 머리가 완전히 큰바위다. 똥 같은 깜장색 피부,  너 말이야, 너 말이라구. 입 벌리고 숨쉬는 덜 떨어진 놈, 밥맛 떨어지는 에티오피아 놈."

나는 관심 없었다. 최소한 애들은 나를 중국놈이나, 캄보디아놈, 중동사람, 혹은 그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라오스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라오스 사람이란 말은 아주 못 생기고 찢어지게 가난하고 못 생기고 멍청하다는 소리였다. 아무도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다른 아이들과 말없이 쓰레기통 옆에 앉았다. 그들 공통의 라오스적임이라는 수치를 묵묵히 감수하면서.  바퀴벌레와 생쥐들이 그 아이들 주변을 서둘러 지나다녔다. 라오스인들 이라 불리는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선 전부 젖은 쓰레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매일 나는 혼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이 바트 오십 사탕을 주고 분명 그 자신 라오스 이민자일 라면장수에게서 라면을 사먹었다. 라면 장수는 타이말을 잘 하지 못했고 그녀가 타이말을 하면  리드미컬한 액센트가 섞였다. 라면 장수가 내 점심을 준비하는 데는 십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대접, 마른 면 한 덩어리, 한 국자의 뜨거운 국물. 라면 한 그릇을 받아들고 나는 늘 앉는 학교 구내식당 구석으로 향했다. 한 숟갈 한 숟갈 라면을 먹으면서 지루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비참한 아이. 이건 흔해빠진 시나리오, 수많은 시트콤과 청소년 소설에 널린 소재다. 그 이미지의 보편적 친연성은 분명 학교 식당이 갖는 동년배 아이들 간의 사회성이 제재 없이 드러나는 중심적 장소로서의 특별한 지위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아이는 한숟갈 한 숟갈 쓰디쓴 점심을 먹으면서 되풀이되는 불청객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따른다.  비참하기 때문에 아이는 혼자서 끼니를 떼우고, 혼자서 끼니를 떼우므로 아이는 비참하기만 하다. 하지만 비극은 혼자 먹는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먹는 일의 의미 자체가 변한다는 데 있다. 영양을 보충하고, 위안을 주는 익숙한 행위가 차갑고 병적이고 혼자서 외로이 수행해야 하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방콕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혼자 점심을 떼우는 것보다 더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진짜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에티오피아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 * *

태국 정부는, 다른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팝스타들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에티오피아 구호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쉽게 상하지 않는 종류의 음식을 태국 국민들과 기업들을 통해 모으기 시작했고 곧 라면 회사로부터 상당한 양의 라면을 기부받았다. 비행기 몇 대치의 라면이 태국 국민의 선의의 표현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라 공항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마자 라면을 싣은 비행기들은 수송품과 함께 태국으로 송환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 활동 중인 구호 단체들이 태국산 라면엔 영양이 될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고 도통 판단했던 것이다.

"이 라면들 당장 여기서 치우쇼," 구호단체의 반응은 이랬다고 전해진다. "이 라면들은 위기를 오히려 악화시키기만 할 거요. 라면은 몸에 나쁘다니까!" 

최소한 이 일화는 팔십년대 초 태국 아이들에게 그 당시 시장에 넘쳐나던 라면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이야기 역할을 했다. 무지하게 싸고, 알록달록한 포장에 싸여 있으며, 놀랍도록 다양한 종류의 맛과 국수 크기로 판매되던 이 수상스런 라면의 스프에는 마리화나가 들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 라면에 거의 중독이 된다는 말이었다. 당시 일곱 살이던 나 역시 마마 상표의 닭고기맛 라면을 여럿 내 방에 숨겼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불법 마약을 가지고 최초의 실험을 한답시고 들떠서 스프 봉지를 핥다시피 해서 마지막 스프가루 하나까지 다 삼키고는 침대에 누웠다. 뭔가 대단한 마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마법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황홀경에 빠지지도 않았다. 다만 겁나게 목이 말랐을 뿐이었다.

이 실험이 실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가 비밀을 알려주었다. 봉지를 열지 않은 채 안의 라면을 부순 후 속에 든 작은 스프 봉지를 열고 스프를 라면 봉지 안의 부스러진 면에 뿌리는 거였다.  친구는 라면봉지를 몇 초 흔들고 나서 맛을 보라고 했다.

"포테이토 칩이다," 자랑스럽게 웃으며 친구가 선언했다.
"태국식 포테이토 칩이라는 말이지," 내가 눈만 껌벅이고 있자 친구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외제 포테이토 칩의 반 가격에, 외제 상표보다 맛은 두 배나 좋다!"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때 친구는 내게 처음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거였다. 친구는 또한 검약과 독창성,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간을 교차하는 미메시스에 대해서도 뭔가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당시에 친구에게 말한 바로 그대로, 그게 무지하게 맛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라면을 거부한 그 에티오피아인들은 자기들이 놓친 게 뭔지를 까맣게 모를 터였다.

* * *

내 어머니는 어떻게 가스렌지 위에다가 라면을 끓이는지를 가르쳐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배운 요리법이 바로 라면 끓이는 법이었고 라면은 지금까지 내가 혼자일 때 요리해 먹는 몇 안되는 음식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부엌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천치 바미 라면, 이라고 말하곤 했다. 천치 라면이란 말은 한편으로는 천치도 끓일 수 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해서을 곁들이셨다. 라면만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먹으면 천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라고.

"이게 몸에 좋은 음식이 아냐," 어머니는 이렇게 강조하셨다.
"하지만 잘 만들 수는 있지," 어머니는 말을 이으셨다. "뭘 덤으로 넣느냐가 중요한 거지."

그 날 저녁, 우리는 배추, 그린빈, 파, 소세지 조각을 남비에 쓸어넣었다. 라면발이 부드러워지는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어떻게 달걀 흰자를 노른자에서 분리하는지를 보여주셨다. 노른자를 두 달걀껍질 사이로 왔다갔다 하게 하면서 반투명한 흰자를 라면에 푸는 거였다. 달걀 흰자는 보글보글 끓는 라면 국물과 닿으면 금새 밝은 흰색으로 변하며 부풀어올랐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노른자를 라면이 담길 빈접시에 놓아주셨다. 라면국물의 온도로 자연스럽게 익는다고 하시면서.

집에서 끓인 그 라면은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사먹던 라면과는 거의 닮은 구석이 없었다. 점심에 사먹는 라면은 국물과 면 뿐이었지만, 집에서 끓인 라면은 다른 재료들이 가득차 있었다. 학교의 라면 장수는 십초도 안걸려 음식을 만들어냈지만 어머니는 십분도 넘게 공을 들이셨다. 학교에서는 혼자서 서글프게 한 젓가락씩 라면을 먹었지만 집에서는 누나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라면을 먹었다.

* * *

1996년 나는 코넬 대학에 등록하기 위해 뉴욕주의 이타카로 이주했다. 혼자 살아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오후 13번 도로가에 있는 중국 식품점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그 식품점에는 마마, 염염, 와이와이 브랜드의 꽤 괜찮은 종류의 라면들이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라면들 옆에 나란히 놓인 그 태국 라면들의 알록달록하고 반들반들한 봉지를 보고 나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방콕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이래 나는 몇 가지 미국 라면 종류를 시도해봤지만 전부 맛이 별로였다. 국물맛은 항상 지나치게 인공적인 듯 했고 면발은 왠지 수상스러웠다. 그러다 드디어 내겐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같은, 내 과거의 삶과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고리--태국 라면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태국 라면이 마치 내가 잃은 자식들이기라도 한 듯이 양팔에 가득하도록  여러 봉지를 샀다.

하지만 라면은 단순히 향수병에 지친 사람의 노스탤지아를 달래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열두개에 이 불 이라는 그 저렴한 가격 때문에 라면은 또한 경제적이기도 했다. 이타카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의 바트화는 평가절하되었고 태국 경제는 그 여파로 인해 추락했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미국에 오래 머무르며 공부할 수 있는가는 오직 내가 미국에서 일해서 벌어먹을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고 전하셨다. 나는 태국 장학금들이 사라지고 중산층 가정의 재산이 소실되고, 몇몇 태국 학생들이 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원래 소수에 불과한 이타카의 태국인 수는 이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롭던 때였다.

새로 이민온 사람들은 누구나 종종 그들에게 익숙한 음식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고향 음식에 대한 그런 동경을 채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우선 음식 재료가 이민온 땅에는 극히 드물고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자원도 종종 제한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향 음식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는 원래 음식이 불충분하게 재현되어 나오게 마련이고 가격도 기절하게 바싸기까지 하다. 고향에서의 훌륭한 식사라는 기억과 고향에 좀더 가까운 듯 느끼고 싶은 마음에 그 식사를 낯선 땅에서 재창조하려는 시도 사이의 간격은 혼란과 향수병을 해소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실제로 거의 모든 면에서 진짜와 가까운 고향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타역만리 부엌에서는 결코 되살려낼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가적 감정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민자들은 먹는 일이 배를 불리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종종 금식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타카에서 내가 혼자 먹던 라면은 내가 어린 시절 먹던 그 라면과 똑같은 종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되는 라면의 맛은 완전히 달랐다. 이유는 명백하게도 내 어머니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가 거기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에티오피안이라고 부르던 초등학교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오스 출신 라면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어떻게 태국 포테이토 칩을 만드는지를 알려준 그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천 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 뉴욕 마을의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나는 수 해 동안 보지 못할 터였다. 나는 춥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밤에는  소란스런 사교클럽 대학생들의 고함이 나를  깨웠다.  그 대학생들은 맥주를 잔뜩 먹고 내 반지하방 창가에 방뇨를 했다. 그리고 종종 내가 거리를 걸어내려갈 때면 미국 아이들은 아마도 지어낸 중국어라고밖에는 달리 묘사가 불가능한 말로 나를 약올리곤 했다. 얼마나 철저하게 내가 내 어머니의 라면 조리법을 따라 하든, 결과물은 내가 집에서 먹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의 맛이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들여 그 전혀 다른 맛에서 위안을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참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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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에 갔더니 신간 중에 눈에 확 띄는 표지와 제목을 단 이런 책이 보였다.

<가지와 함께 홀로 부엌에서>
부제: 혼자 요리해 먹는 일에 대한 고백




스물 여섯 명의 작가, 요리사, 음식 비평가들이 각자 혼자 요리하고 먹는 일에 대한 일화를 적은 짧은 글이 모여 아주 재미난 책을 만들었다.  잡지 뉴요커에 번역되어 실렸던 하루키의 "스파게티의 해"를 제외하면 전부 에세이들이다.  문예창작과정을 밟으러 뉴욕시에서 날씨 쌀쌀한 미국 중서부의 한 대학원으로 이주한 여학생이 매일 혼자 끼니를 떼우는 일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기획된 책이다.

혼자 끼니를 떼우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비싼 음식 일인분을 용감하게 주문하고 느긋하게 즐길  용기가 있으신지?
혼자만을 위해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할 노동을 감수할 용의가 있으신지?
혹은 아무에게도 털어놓기 곤란한 희한한 조합의 음식을 모처럼 즐길 수 있다는 즐거움에 설레이시는지?
그저 아무거로나 대충 허기를 잠재워도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시는지?
아무래도 먹는 일은 혼자 하기에는 김이 빠지고 우울해지는 종류라고 생각이 되시는지?

작년에 작가 황석영씨의 <맛과 추억>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종류의 음식 이야기를 털어놓는 작가의 즐거운 목소리가 왠지 그 때까지 내가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뭔가 엄숙하고 절제된 이미지와 맞아떨어지지 않아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먹는 일만큼 삶을 잘 요약하는 행위가 있을까? 먹을 것을 고르는 손에는 과거의 기억이 묻어난다. 종종 우리에게 특별한 음식은 단순히 그 음식의 맛 때문이 아니라 그 음식을 접하던 때의 기억 때문이다. 이번 여름에 시댁 식구들과 함께 일식집에 갔다가 에피타이저로 나온 구워진 작은 물고기를 보고 망연자실했었다. 뉴욕의 일식집에서 특별한 메뉴로 소개된 그 물고기는 다름아닌 양미리였다. 강원도 출신인 아버지가 겨울이 되면 양미리 좀 만들라고 어머니를 다그치시곤 했던 그 양미리다. 양미리는 사실 보잘것 없는 물고기다. 대구처럼 국물이 시원한 것도, 고등어처럼 잘 생긴 푸른 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갈치처럼 살이 맛난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양미리를 고집하셨다. 양미리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특별히 늦둥이 막내 아들을 위해 차려내던 음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먹는 일이 이렇게 기억과 촘촘히 엮이므로 먹는 일 만큼은 즐겁게 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즐겁게 먹는다는 건 꼭 특별한 것을 먹어야 한다거나 대단한 격식을 차려서 먹어야 한다거나 꼭 여러 사람과 떠들썩하게 한 상에 앉아 끝내주는 대화를 나누며 먹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혼자 먹건 여럿이 먹건 특별한 음식이건 아니건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이 위장의 허기 뿐 아니라 마음의 허기도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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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2 0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4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