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Rattawut Lapcharoensap
출처: <Alone in the kitchen with an eggplant> pp. 147-153.
검둥개 번역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끊이지 않고 텔레비젼에 방송되었다. 그들의 더러운 얼굴과 앙상한 뺨, 부어오른 배, 파리가 끓는 멍한 두 눈.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햇다. 뭔가 대책이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음식과 약품, 다른 필수품,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에티오피아로 보냈다. 팝스타들이 모여서 록 발라드 곡을 부르며 성금을 모았다. "위 아 더 월드," 팝스타들이 이렇게 구구구 그들의 상반신을 흔들며 합창했다. "위 아 더 칠드런. 렛 뎀 노우 잋츠 크리스마스."
그러는 동안 방콕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에티오피안"이라는 말이 말라빠진 아이들을 지칭하는 수식구가 되었다. 몸에 비해 커다란 머리를 가진 나처럼 말라빠진 아이 말이다. "이봐 에티오피안," 다른 일곱살 짜리들이 이렇게 희죽대며 야유했다. "너 말이야 너, 안경 쓰고 팔만 긴 놈. 머리가 완전히 큰바위다. 똥 같은 깜장색 피부, 너 말이야, 너 말이라구. 입 벌리고 숨쉬는 덜 떨어진 놈, 밥맛 떨어지는 에티오피아 놈."
나는 관심 없었다. 최소한 애들은 나를 중국놈이나, 캄보디아놈, 중동사람, 혹은 그 중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라오스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라오스 사람이란 말은 아주 못 생기고 찢어지게 가난하고 못 생기고 멍청하다는 소리였다. 아무도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라오스놈이라 불리는 다른 아이들과 말없이 쓰레기통 옆에 앉았다. 그들 공통의 라오스적임이라는 수치를 묵묵히 감수하면서. 바퀴벌레와 생쥐들이 그 아이들 주변을 서둘러 지나다녔다. 라오스인들 이라 불리는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선 전부 젖은 쓰레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매일 나는 혼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이 바트 오십 사탕을 주고 분명 그 자신 라오스 이민자일 라면장수에게서 라면을 사먹었다. 라면 장수는 타이말을 잘 하지 못했고 그녀가 타이말을 하면 리드미컬한 액센트가 섞였다. 라면 장수가 내 점심을 준비하는 데는 십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대접, 마른 면 한 덩어리, 한 국자의 뜨거운 국물. 라면 한 그릇을 받아들고 나는 늘 앉는 학교 구내식당 구석으로 향했다. 한 숟갈 한 숟갈 라면을 먹으면서 지루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비참한 아이. 이건 흔해빠진 시나리오, 수많은 시트콤과 청소년 소설에 널린 소재다. 그 이미지의 보편적 친연성은 분명 학교 식당이 갖는 동년배 아이들 간의 사회성이 제재 없이 드러나는 중심적 장소로서의 특별한 지위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는 아이는 한숟갈 한 숟갈 쓰디쓴 점심을 먹으면서 되풀이되는 불청객으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따른다. 비참하기 때문에 아이는 혼자서 끼니를 떼우고, 혼자서 끼니를 떼우므로 아이는 비참하기만 하다. 하지만 비극은 혼자 먹는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먹는 일의 의미 자체가 변한다는 데 있다. 영양을 보충하고, 위안을 주는 익숙한 행위가 차갑고 병적이고 혼자서 외로이 수행해야 하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방콕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혼자 점심을 떼우는 것보다 더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나는 진짜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에티오피아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 * *
태국 정부는, 다른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팝스타들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에티오피아 구호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쉽게 상하지 않는 종류의 음식을 태국 국민들과 기업들을 통해 모으기 시작했고 곧 라면 회사로부터 상당한 양의 라면을 기부받았다. 비행기 몇 대치의 라면이 태국 국민의 선의의 표현으로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라 공항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마자 라면을 싣은 비행기들은 수송품과 함께 태국으로 송환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 활동 중인 구호 단체들이 태국산 라면엔 영양이 될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고 도통 판단했던 것이다.
"이 라면들 당장 여기서 치우쇼," 구호단체의 반응은 이랬다고 전해진다. "이 라면들은 위기를 오히려 악화시키기만 할 거요. 라면은 몸에 나쁘다니까!"
최소한 이 일화는 팔십년대 초 태국 아이들에게 그 당시 시장에 넘쳐나던 라면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이야기 역할을 했다. 무지하게 싸고, 알록달록한 포장에 싸여 있으며, 놀랍도록 다양한 종류의 맛과 국수 크기로 판매되던 이 수상스런 라면의 스프에는 마리화나가 들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 라면에 거의 중독이 된다는 말이었다. 당시 일곱 살이던 나 역시 마마 상표의 닭고기맛 라면을 여럿 내 방에 숨겼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불법 마약을 가지고 최초의 실험을 한답시고 들떠서 스프 봉지를 핥다시피 해서 마지막 스프가루 하나까지 다 삼키고는 침대에 누웠다. 뭔가 대단한 마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마법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황홀경에 빠지지도 않았다. 다만 겁나게 목이 말랐을 뿐이었다.
이 실험이 실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친구가 비밀을 알려주었다. 봉지를 열지 않은 채 안의 라면을 부순 후 속에 든 작은 스프 봉지를 열고 스프를 라면 봉지 안의 부스러진 면에 뿌리는 거였다. 친구는 라면봉지를 몇 초 흔들고 나서 맛을 보라고 했다.
"포테이토 칩이다," 자랑스럽게 웃으며 친구가 선언했다.
"태국식 포테이토 칩이라는 말이지," 내가 눈만 껌벅이고 있자 친구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외제 포테이토 칩의 반 가격에, 외제 상표보다 맛은 두 배나 좋다!"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때 친구는 내게 처음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 거였다. 친구는 또한 검약과 독창성,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간을 교차하는 미메시스에 대해서도 뭔가를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당시에 친구에게 말한 바로 그대로, 그게 무지하게 맛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라면을 거부한 그 에티오피아인들은 자기들이 놓친 게 뭔지를 까맣게 모를 터였다.
* * *
내 어머니는 어떻게 가스렌지 위에다가 라면을 끓이는지를 가르쳐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배운 요리법이 바로 라면 끓이는 법이었고 라면은 지금까지 내가 혼자일 때 요리해 먹는 몇 안되는 음식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부엌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천치 바미 라면, 이라고 말하곤 했다. 천치 라면이란 말은 한편으로는 천치도 끓일 수 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해서을 곁들이셨다. 라면만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먹으면 천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라고.
"이게 몸에 좋은 음식이 아냐," 어머니는 이렇게 강조하셨다.
"하지만 잘 만들 수는 있지," 어머니는 말을 이으셨다. "뭘 덤으로 넣느냐가 중요한 거지."
그 날 저녁, 우리는 배추, 그린빈, 파, 소세지 조각을 남비에 쓸어넣었다. 라면발이 부드러워지는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어떻게 달걀 흰자를 노른자에서 분리하는지를 보여주셨다. 노른자를 두 달걀껍질 사이로 왔다갔다 하게 하면서 반투명한 흰자를 라면에 푸는 거였다. 달걀 흰자는 보글보글 끓는 라면 국물과 닿으면 금새 밝은 흰색으로 변하며 부풀어올랐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노른자를 라면이 담길 빈접시에 놓아주셨다. 라면국물의 온도로 자연스럽게 익는다고 하시면서.
집에서 끓인 그 라면은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사먹던 라면과는 거의 닮은 구석이 없었다. 점심에 사먹는 라면은 국물과 면 뿐이었지만, 집에서 끓인 라면은 다른 재료들이 가득차 있었다. 학교의 라면 장수는 십초도 안걸려 음식을 만들어냈지만 어머니는 십분도 넘게 공을 들이셨다. 학교에서는 혼자서 서글프게 한 젓가락씩 라면을 먹었지만 집에서는 누나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라면을 먹었다.
* * *
1996년 나는 코넬 대학에 등록하기 위해 뉴욕주의 이타카로 이주했다. 혼자 살아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오후 13번 도로가에 있는 중국 식품점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그 식품점에는 마마, 염염, 와이와이 브랜드의 꽤 괜찮은 종류의 라면들이 있었다. 한국, 중국, 일본 라면들 옆에 나란히 놓인 그 태국 라면들의 알록달록하고 반들반들한 봉지를 보고 나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뻔 했다. 방콕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이래 나는 몇 가지 미국 라면 종류를 시도해봤지만 전부 맛이 별로였다. 국물맛은 항상 지나치게 인공적인 듯 했고 면발은 왠지 수상스러웠다. 그러다 드디어 내겐 프루스트의 마들렌느와 같은, 내 과거의 삶과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고리--태국 라면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태국 라면이 마치 내가 잃은 자식들이기라도 한 듯이 양팔에 가득하도록 여러 봉지를 샀다.
하지만 라면은 단순히 향수병에 지친 사람의 노스탤지아를 달래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열두개에 이 불 이라는 그 저렴한 가격 때문에 라면은 또한 경제적이기도 했다. 이타카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의 바트화는 평가절하되었고 태국 경제는 그 여파로 인해 추락했다. 어머니는 내가 얼마나 미국에 오래 머무르며 공부할 수 있는가는 오직 내가 미국에서 일해서 벌어먹을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고 전하셨다. 나는 태국 장학금들이 사라지고 중산층 가정의 재산이 소실되고, 몇몇 태국 학생들이 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원래 소수에 불과한 이타카의 태국인 수는 이제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롭던 때였다.
새로 이민온 사람들은 누구나 종종 그들에게 익숙한 음식 생각을 한다. 하지만 고향 음식에 대한 그런 동경을 채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우선 음식 재료가 이민온 땅에는 극히 드물고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자원도 종종 제한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향 음식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에서는 원래 음식이 불충분하게 재현되어 나오게 마련이고 가격도 기절하게 바싸기까지 하다. 고향에서의 훌륭한 식사라는 기억과 고향에 좀더 가까운 듯 느끼고 싶은 마음에 그 식사를 낯선 땅에서 재창조하려는 시도 사이의 간격은 혼란과 향수병을 해소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실제로 거의 모든 면에서 진짜와 가까운 고향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타역만리 부엌에서는 결코 되살려낼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양가적 감정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민자들은 먹는 일이 배를 불리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종종 금식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타카에서 내가 혼자 먹던 라면은 내가 어린 시절 먹던 그 라면과 똑같은 종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되는 라면의 맛은 완전히 달랐다. 이유는 명백하게도 내 어머니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가 거기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에티오피안이라고 부르던 초등학교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오스 출신 라면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어떻게 태국 포테이토 칩을 만드는지를 알려준 그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천 마일 거리에 있는 작은 뉴욕 마을의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였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나는 수 해 동안 보지 못할 터였다. 나는 춥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밤에는 소란스런 사교클럽 대학생들의 고함이 나를 깨웠다. 그 대학생들은 맥주를 잔뜩 먹고 내 반지하방 창가에 방뇨를 했다. 그리고 종종 내가 거리를 걸어내려갈 때면 미국 아이들은 아마도 지어낸 중국어라고밖에는 달리 묘사가 불가능한 말로 나를 약올리곤 했다. 얼마나 철저하게 내가 내 어머니의 라면 조리법을 따라 하든, 결과물은 내가 집에서 먹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의 맛이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들여 그 전혀 다른 맛에서 위안을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참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