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이수명)
밖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 따뜻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옛 애인에게 전화하는 실수를 하고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서른 살에 나를 낳으신 어머니, 어려서부터 통 울지를 않아 박약아로 아셨다는 어머니, 이제 서른 살이 된 진짜 박약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어머니.
새벽의 여명과 저녁의 어스름이 같은 푸르름이듯이, 이십대의 긴 터널에 언뜻언뜻 비춰졌던 너에 대한 욕망과 너의 부재가 같은 것이었듯이,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공포와 낯설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내 방문을 두드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거리의 햇빛은 그렇게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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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의 '서른'이라는 시를 올립니다. 오늘은 이 시가 다시 무척 매력적이고 호소력있게 다가오네요. 시를 읽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같은 시도 늘 다르게 읽히는가 봅니다.
많은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일반인들에 의해서도 역시 무수하게 변주되는 주제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참 미묘한 것 같아요.
유년에는 성년의 문턱에 도달하기를 꿈꾸며 그 문턱 너머에는 앎과 명확함, 공포가 없는 익숙함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문턱을 넘어 몇 발짝 가니 그런 세계란 존재하지를 않는 거였나, 그런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치는 경험.
그런 생각이 어쩌면, 어린 딸을 둔 어느 어머니의 머리를 쳤을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30대의 여성이라면 여전히 방황하는 잿빛 청춘의 영혼 쯤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어머니라는 통칭만 하나 붙으면 금새 배반할 수 없는 책임과 기대가 그야말로 한보따리쯤 머리 위에 무겁게 얹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