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아버지 (최승자)

 

눈이 안 보여 신문을 볼 땐 안경을 쓰는

늙은 아버지가 이렇게 귀여울 수가.

박씨보다 무섭고,

전씨보다 지긋지긋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움트는 새싹처럼 보일 수가.

 

내 장단에 맞춰

아장아장 춤을 추는,

귀여운 아버지,

 

오, 가여운 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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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귀여워보일 때 시인에게는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을까.

아마 세상 다 살았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귀엽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도, 동정한다는 것도, 공감한다는 것도 아니다.

귀엽다는 것은,     아마도 쓸쓸하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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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2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저도 요즘 아버지를 보며 이런 느낌,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이 많이 시리구요...

검둥개 2005-05-2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가슴 따땃하게 만들 시를 찾고 있어요 ~~ ^^
 

서른 (이수명)

 

밖이 이렇게 따뜻한 줄 몰랐다. 따뜻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옛 애인에게 전화하는 실수를 하고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서른 살에 나를 낳으신 어머니, 어려서부터 통 울지를 않아 박약아로 아셨다는 어머니, 이제 서른 살이 된 진짜 박약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삶을 꿈꾸는 어머니.

새벽의 여명과 저녁의 어스름이 같은 푸르름이듯이, 이십대의 긴 터널에 언뜻언뜻 비춰졌던 너에 대한 욕망과 너의 부재가 같은 것이었듯이, 나는 아주 어릴 적에 내가 가졌던 공포와 낯설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내 방문을 두드리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거리의 햇빛은 그렇게 닮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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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의 '서른'이라는 시를 올립니다. 오늘은 이 시가 다시 무척 매력적이고 호소력있게 다가오네요. 시를 읽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같은 시도 늘 다르게 읽히는가 봅니다.

많은 작가와 시인들, 그리고 일반인들에 의해서도 역시 무수하게 변주되는 주제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참 미묘한 것 같아요.

유년에는 성년의 문턱에 도달하기를 꿈꾸며 그 문턱 너머에는 앎과 명확함, 공포가 없는 익숙함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문턱을 넘어 몇 발짝 가니 그런 세계란 존재하지를 않는 거였나, 그런 생각이 뒤늦게 머리를 치는 경험. 

그런 생각이 어쩌면, 어린 딸을 둔 어느 어머니의 머리를 쳤을지도 모르지요.

어째서 30대의 여성이라면 여전히 방황하는 잿빛 청춘의 영혼 쯤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어머니라는 통칭만 하나 붙으면 금새 배반할 수 없는 책임과 기대가 그야말로 한보따리쯤 머리 위에 무겁게 얹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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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2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조증으로 올려놨더니 님이 저를 다시 울증을 만드십니다 ㅠ.ㅠ

검둥개 2005-05-24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이럴수가, 저는 나쁜 사람이네요. 큰 알사탕 같은 거 하나 드시고 부디 기분 업하시어요 ~~ T.T
 

저수지 (이윤학)

 

하루종일,

내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그 저수지가 나오네

내 눈 속엔 오리떼가 헤매고 있네

내 머릿속엔 손바닥만한 고기들이

바닥에서 무겁게 헤엄치고 있네

 

물결들만 없었다면, 나는 그것이

한없이 깊은 거울인 줄 알았을 거네

세상에, 속까지 다 보여주는 거울이 있다고

믿었을 거네

 

거꾸로 박혀있는 어두운 산들이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

 

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

곧 진흙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섞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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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의식의 표면으로 솟아올라 생채기를 내고 진물을 흘리고 피를 쏟게 만드는 상처들. 그것들을 겨우겨우 가라앉혀도, 시인은 그 상처가 없어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의식의 밑바닥까지 가닿은 상처는 그것의 존재의 일부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입어온 가지가지 상처들이죠. 그 중의 몇가지는 치명상이었고, 나머지는 중경상이었을 그 상처들. 기억이 없어지기를 빌며 간신히, 간신히 그 암초들을 눌러박으며 지내는 동안 그 돌들은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았고, 그런 후엔 그 돌들이 아예 뿌리를 내려, 결국 우리들 자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혈관 속에 그 돌들이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알들이 흐르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요...

 

p.s.

[그런데 요리까지 이렇게 말하고 다시보니 갑자기 혈전이 혈관 속에서 부유하는 상상이 들어 좀 끔찍스럽군요... T.T  낭만이 한 방에 날아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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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이 2005-05-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애기같이 생긴 친구가, 아마도 스물 네 다섯 살 쯤, 어느 식당에 앉아 할머니같이 지혜로운 말을 했어. 식탁 옆에 서 있는 나무가 진짜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모든 살아있는 것엔 상처가 있는 법이라고. 그런데 그 나무는 상처가 없다고, 자세히 보라고 했지. 상처도 삶의 무늬일까.

검둥개 2005-05-2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경숙 소설에 나오는 구절 같은데요... 아닌가? 흠흠...
 

식탁 (이수명)

 

식탁 아래 토마토 밭이 있어요.

식탁을 휘감고 토마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밭이에요.

보세요, 식탁 위엔 토마토가 없어요.

보세요, 식탁을 찍어 올린 당신의 포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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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집 담 옆으로 어머니가 토마토를 키우셨다. 장대를 휘휘 감고 쑤욱쑥 올라가던 토마토 줄기들. 초여름 그 향이 얼마나 싱그럽고 향기롭던지. 토마토 덩굴들 사이를 걸어다니면 꼭 꿈 속에 있는 것만 같았었다. 아직 반팔을 입고 나가기엔 좀 이른 날씨지만 여름이 코 앞에 닥친 지금쯤 읽기 딱 좋은 시다. 

식탁을 휘감고 토마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밭에서 식사하는 상상을 해보라. 식탁에 놓인 토마토를 포크로 딱 찍어올리려는데, 그 사이에 토마토가 뭉게뭉게 자라서 그만 포크에 대신 찍혀올라온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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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검둥개 2005-05-1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죄송해요, 물만두님, 제가 어제 퇴근해서 너무 피곤한 바람에...ㅎㅎ 포크에 대신 찍혀올라온 포크! 라고 해서 이런 코멘트를 남기셨군요 ^^ "포크에 대신 찍혀올라온 식탁!"이죠, 헤헤. [그런데 이미지 또 바꾸셨어요? 이번 것도 무척 귀여운데요!]
 

서른살의 시  (서원동)

 

도시에서 살아오며 수십년

기댈 언덕도 없이

무작정 정해놓은 제목도 없이

찢겨진 깃발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몫이

있으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끝끝내 아무것도 없으면서

술을 마시거나 걷거나 책을 보다가도

먼 일처럼 이따금 세상을 생각하면

세상은 누구의 품속에 간직된 바 없이

돌아앉아 저 혼자 있는 것 같은데도

누군가 열심히 회전시키듯 잘도 돌아가고

그러나 아무도 주인이 되어 본 적은 없으며

누구도 주인이 될 순 없었다

 

시작도 끝도 없지만

우리들은 반드시 무엇이 있으리라 믿으며

생각하고 살아간다

막연히 죽고 태어나 뜻없이 연명하며

그렇지만 나는 삼십이립의 서른살

나이수만큼 살아왔었고

모르지만 앞으로도 어떻게 지낼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살다 떠났으며

나 또한 그들의 방식처럼

눈물겹도록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도 수십년 덜닦인 면도날처럼

스스로 살갗을 찔러대면서

막연한 무엇인가를

새처럼 허공에 날려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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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원동이란 시인을 몰랐고 이 시도 처음 읽어보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게 좋은 거여서 이렇게 이국 타향에 나와서도 맘이 땡길 때 그럴듯한 시를 찾아볼 수가 있으니, 나는야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서른에 관해 쓰인 시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을텐데도 딱히 마음이 가는 것이 없다. 최승자의 것은 너무 악스럽고, 이수명의 것은 왠지 간유리처럼 모호한 느낌이 들고, 한 때 인구에 회자된 최영미의 것은 대책이 없다. 이러저러해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시를 발견했다. 

시를 읽고서는 막연히 젊은 시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 시인은 1950년에 출생했고 77년에 등단했단다. 그러니까 이 시는 시인 자신이 서른이 되었을 때쯤 무렵에 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80년도다. 그러니 구세대에게나 신세대에게나 서른을 맞는 느낌이란 것에는 뭔가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는가보다.

정작 나 자신이 서른 고개를 넘던 순간에는 서른이란 나이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복잡한 일들이 있었고 머리는 뒤숭숭했으며 풍랑 많은 바다의 쪽배처럼 몸은 자주 뭔가에 부대낌을 당했었다. 이 시에 나오는 구절대로 그야말로 '찢겨진 깃발마냥' 만신창이가 된 줄도 모르고 살았던 거다.

봉천동의 철거촌에 한 번 갔던 적이 있다. 경사진 언덕에는 부서진 건물들의 철근이 흉하게 구부러진 채 드러나 있고 벽에는 구멍들이 커다랗게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을 채운 것은 전부 하늘. 그래도 골목길에는 콧물이 말라붙은 얼굴을 한 아이들이 있었다. 이 시가 마음에 들었던 건 잊고 있었던 그 풍경을 내게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철거민들의 고통을 내가 십분의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랴마는, 그 풍경에는 뭔가 서른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과 상통하는 것이 있는 듯 싶다.

알라딘의 작가파일을 지나가다가 소설가 김형경이 이렇게 말한 것을 읽었다. '30대란 마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 시기'였다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로 무릎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 마음은 늙지 않는 것이다. 20대의 공명욕이나 쓸데없는 감상은 싹싹 쓸어다버린대도 남는 것은 늙지 않는 마음이었다는 작가의 그 말.

그래서 남들 태어나 연명하며 살고 죽고 하듯 그렇게 저도 살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늙지 않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짐스러우면서도 애틋한 그 마음과 더불어 가는 것이 서른 이후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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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5-18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 하고 싶어요, 쥴님.. ^^.

애송이 2005-05-20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늙지 않는 것을 알았는데, 난 왜 절망이 안되지? 내 마음은 늙기는 커녕 아직 철도 안 든 것 같군. 그래서 만년 애송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왜 절망해야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검둥개 2005-05-2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음, 제 생각에, 마음이 좀 늙었으면 싶은 사람은 안 늙는 마음이 좀 절망스럽기도 하겠지요. 안 늙는 마음이 기특한 사람은 절망할 일이 없겠지요? 작가에게 한 수 가르쳐드리러 갔다오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