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젠가 얘기했던가?

내 남편이란 사람...

내가 결혼 전에 뽕! 간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서였다.

드라이브를 하는데, 그는 시속 60이라고 쓰여 있으면 진짜로 60으로 가고, 시골길에 시속 40이라고 쓰여 있으면 진짜로 40으로 갔다.

뒷차들은 혹시 속도감지기가 있나 싶어서 속도를 줄여 한참을 따라오다가 앞질러 가면서 꼭 유리창을 내리고 운전자를 확인하고 갔다. 심지어는 위협적으로 끼어들어서 우리 앞에서 일부러 천천히 가면서 남편의 부아를 돋우려고 했지만 남편은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아, 법대로, 곧이곧대로인 사람... 멋있었다.

오늘은 이 남자의 아들.

지난 주 월요일이 생일이었다. (산타할아버지에게 편지 쓴 얘기는 지난 페이퍼에서 이미 했다.)

다른 놈들 보니 집에서 생일파티라는 걸 해주더라고, 너도 원하면 해주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물론 일하는 엄마이니 그 날은 안 되고, 일요일에 부르라고.

그랬더니 미적댄다. 하고 싶긴 한데, 뭔가 걸리는 모양이다.

엄마 힘든 건 괜찮다고, 엄마도 한 번쯤은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더니, 그게 아니라...

다음 12월에 반장선거가 있는데(얘네 학교는 반장을 분기별로 뽑는다), 자기가 출마를 하려고 한단다. 그런데 생일이라고 친구를 초대하면 반장이 되려고 그러는 것 같단다...

옆에서 듣다 못한 우리 남편,

야, 임마, 차라리 니네 반 다 불러 와. 아예 다음에 반장 뽑아달라고 말도 하든지!

라고 소리를 꽥 질렀다. (흥, 죽었다 깨어나도 자기는 그런 거 못하면서...)

그랬더니 순진한 아들놈 두 눈이 똥그래지면서

안돼, 그건 뇌물이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라고 더듬대면서 열심히 말한다.

솔직히 나나 남편이나, 여우같은 놈보다는 곰같은 놈을 선호한다. 우리 둘 다 여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여우과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런데 곰과 곰이 만나 아이를 낳아보니, 세상에 곰도 곰도 이런 미련곰탱이가 없다...ㅠㅠ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놈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꼬.

우리 아들놈이 살아갈 세상은, 그냥 정해진 길을 묵묵히 걷더라도 손해를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 그래야 이놈이 밥 먹고 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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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2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스러운 아드님, 꼭 껴안아주고 싶어요!

깍두기 2004-09-2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남자와 아주 대조적이시군요. 고속도로에서 160을 밟는 사람인데....^^
근데 말리는 척 하면서 저도 그 스피드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으니...이글 읽고 반성하고 갑니다.

진주 2004-09-2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묵묵하고 성실한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으로 만들겠지요?
이집 저집 미련 곰탱이들 화이팅~

비로그인 2004-09-2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전 ... 어떤 부모님을 만나서 이렇게 되어버린건지 모르지만, 약속시간 30분 전에는 가야지 불안하지 않고, 수업 한 번 빠지는 것을 목숨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지각하게 되면 수업 듣고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 방해될까봐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한 체 앞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강의를 듣는....;;; (지난 학기에 전공 수업 하나를 한 번 5분인가 지각했는데,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모든 내용을 필기하는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렀다지요. 과 친구들이 다들 입에 거품을 물더군요 -_-;;)

호랑녀 2004-09-2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그게... 당장 제 아들이면 사랑스러워서라기보다는 안스러워요 ㅠㅠ
깍두기님... 반성까지야 하실 일이 있나요? 함께 살다 보면 닮던 걸요 ^^
박찬미님... 찬미님네도 곰탱이 아드님을 두셨군요... 그 아들 꽤 뛰어나다던데요? 우리집 곰은 구르는 재주도 없어서 ㅠㅠ
평범한여대생님... 헉... 정도가 심하시군요 ^^ 거품 물게 되었네요. 어쨌든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행동들이 정당하게 대접받아야 하는데...쩝...

tarsta 2004-09-2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말 바람직 소년이군요. 마음씨가 정말 이쁩니다.
이런저런 요령이 성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호랑녀군(?) 같은 인성은 어디서나 결국 가치를 인정받을꺼에요.

starrysky 2004-09-2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아우, 너무 예쁩니다. >_<
우리 어른들이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호랑녀님 아드님 같은 사람들이 최고 멋진 사람으로 대접받으면서 살 수 있게 해요!! ^-^

하얀마녀 2004-09-22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들이 많이 배우고 가야겠군요. 특히...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는 사람들.

호랑녀 2004-09-23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어른들이 노력해야 할 일 같아요. 좀 답답했는데, 그냥 요령이 없는 놈도, 요령이 많은 놈도 모두 쓰일 곳이 있겠지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안 되는 놈한테 자꾸 강요하는 건 아이를 더 스트레스받게 하더군요 ㅠㅠ
결국 제일 친한 놈 세 놈만 불러서 수영장에 갔답니다. 신나게 잘 놀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