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실에서 책을 샀다...

내가 수많은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학교도서관에서 일을 하는 첫번째 이유. 수백만 원을 그냥 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어린이들과 학부모, 교사들의 추천도 받아야 하고, 그 중에 선별해야 하고, 그걸 예산에 맞춰야 하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느라 야근에 주말까지 일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리스트를 뽑을 때는 거의 희열을 느낀다. (아마 알라디너들은 알 거야...*^^*)

아직 교장선생님의 결재가 떨어진 건 아니지만, 이번에 구입할 책들에는...

땡때의 모험 24권까지, 한국생활사박물관 10권까지, 로마인이야기 12권, 책만들며크는학교 5권까지... 뭐 이런 시리즈들이 있다. 아, 교양있는 우리아이를 위한 세계역사이야기 3권까지...^^

그런데...

그래, 그럼 그렇지. 어디 좋은 일만 있겠나.

다시 또! 교육청에서 공문이 왔다고, 책을 열두 권을 의무적으로 첨가시키란다.

올 여름방학 숙제란다. 작년엔 50권씩 샀다. 이번엔 담당선생님이 교장선생님한테 엄청 야단맞아가면서 20권까지 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종을 20권씩 사니... 정가로 2백만원 가까이 된다. 헉, 이번에 사려는 책값의 3분의 1이 넘는다. 다시 말하자면 리스트 뽑아둔 책의 3분의 1을 빼야 한다는 것!

도대체 어떤 책인가 봤더니, 알라딘에는 팔지도 않는다. 출판사는... 지난 번 그 엽기 과학도서(모르는 분은 학교도서관 일기를 뒤져보시면 된다) 를 출판한 곳이다.

도서선정위원회. 어머니회 대표어머니와 내가 얘기해봐야, 지금 20권으로 줄인 것도 교장선생님께 찍혀 가면서, 얼마나 노력한 결과인지를 강조하는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빼지도 줄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대신 빠진 책들...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22권, 방귀쟁이하곤 결혼 안 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등 각종 그림책과 동화책들(똑같이 문학 파트라서 얘네들의 출혈이 가장 컸다), 나무숲에서 나온 미술가시리즈 책들...

그렇게 빼다가 울었다. 고르면서 벌써 정이 들어버린 이 책들을 지우면서, 진짜 자식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니다. 학부모대표가 운영위원에게 이야기했고, 운영위원은 정식으로 문제를 삼겠다고, 교육청에도 연락하겠다고 한다. 그래도 운영위원회는 겨우 한 달에 한 번이다.

이번 책, 혹시 들어온다면, 붉은 색으로 교정교열 봐서, 교장선생님께, 그리고 교육청 담당 장학사님께 갖다드리고야 말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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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2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장실뿐 아니라 교육청에도 오선지 그으러 가야할까요. -.-;;

로렌초의시종 2004-07-2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고르신 책을 뺴다가 우셨다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말이지 아이들에게 읽힐 책을 가지고도 더럽고 알량한 로비술을 발휘해서 한 몫 챙기려드는 그 작자들의 아이들은 정작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네요.

숨은아이 2004-07-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이 울고 싶어져요. 열심히 정성 들여 좋은 책 만드는 곳도 많은데, 그런 데에서 나온 책은 외면당하는 경우도 많은데...

반딧불,, 2004-07-2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속 많이 상하셨겠어요.
얼마나 고민되는 책인데요..좋은 책들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는데...참..

그나저나..생활사박물관에 세계사신문에 역사신문까지 다 있는디요(염장임다^^)
나무숲에서 나온 미술가시리즈 정말,정말...아깝네요.

반딧불,, 2004-07-2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참...같이 울고싶군요.

얼마나 얼마나 책 사는 것이 ,,
고르는 것이 힘든데요..행복한 고민만 했으면...

아영엄마 2004-07-20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고를 때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사라지는 기분, 애써 고른 책 손에서 빼앗기는 기분, 책 고를 때의 행복감마저 빼앗기는 기분....
정말 속상하셨겠어요.. 무슨 선정도서.. 이런거 혹시 무슨 뒷돈 주고 받아가면서 만드는 거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입니다.

미완성 2004-07-21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호랑녀님..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대체 뭐하는 겁니까, 이 사람들이..!!! 나빠요, 나빠.
정말 온갖 일을 감수해가며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열심히 고르신 책일텐데, 오죽하셨으면 눈물이 나오셨을까요. 휴.
호랑녀님......힘내세요. 종래에는 승리하셔야죠.....!

호랑녀 2004-07-21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조선인님... 손톱 길게 길러야겄어요...ㅋㅋ 운영위원 중 한 사람이 교육청에 연락한댔으니 뭔가 답이 있겠죠.
로렌초시종님, 저두 진짜 궁금해요. 그 사람들 아이들이...책이라는 걸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게 정말 미워요 ㅠㅠ
숨은아이님, 그러게요. 정말 정성 들인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숨어있는 책들도 얼마나 많은데...최소한 학교도서실에 있는 책만은 믿고 읽도록 하고 싶은데...
반딧불님... 하하... 제가 직접 갖고 있는 것도 좋지만, 저는 일부러 아이들에게 도서실에서 빌려 읽기를 권장한답니다. 아이들이 도서실이라는 곳을 자주 이용하도록. 나무숲 책... 내 언젠가는 꼭 사고야 말리라 다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절반쯤은 갖추고 있는데, 것두 작년에, 지금 교장선생님 부임하시기 전에 구입했던 책들입니다 ㅠㅠ
아영엄마님... 진짜 제 책 빼앗긴 기분이라니깐요. 저 진짜 이번엔 책 12권 다 교정봐서 우리 교육청 초등교육과장(이번 공문 보낸 사람)에게 보낼 겁니다. 방학 내내 할 거예요.
멍든사과님... 승리...ㅋㅋ 이미 님들의 성원에 절반은 승리한 기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