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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죽었다 ㅣ 한마당 글집 3
에버레트 라이머 지음, 김석원 옮김 / 한마당 / 1987년 3월
평점 :
Ⅰ. 일리히와 나눈 15년간의 대화가 바로 이 책을 나오게 한 원인이라는 라이머의 진술처럼,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은 일리히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의 내용과 비슷하다. 저자 자신이 “일리히 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의 다른 편제란 생각이다.
Ⅱ-1. 이를 테면,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학교 역시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 곧 “일정한 연령집단(취학연령 규정)이, 단계적인 교육과정(표준화된 수업순서, 표준화된 능력과 성과측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질문보다 정설定說만을 제시하는)가 감독하는 교실(시공간의 규정과 통제)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차원의 학교교육은 민족국가의 발전과 함께 도래한 것으로, OO 민족국가라는 건축물의 설계도에 가장 적합한 시민을 만들어 내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유는 “현대사회의 여러 제도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고 있는데, 이 제도 중에서 학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학교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인 양 가장하는 사회의 현실과 신화를 조화시키는 의식(儀式)을 찬양한다. 학교는 인간을 전문화된 제도로서 기술과 가치의 관점에서 그들을 선택하고 형성해간다. 학교는 그 자체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를 통하여 권력과 특권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도록 학생들을 길들이며”, “학생들에게 다른 사회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Ⅱ-2. 덧붙여, “교육을 위한 국가기금(國家基金)의 혜택은 현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어,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기회평등>, <자유>, <진보>, <능률>에 대한 사회적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Ⅲ-1. 결국, “학교가 교육의 유일한 방법으로 독점적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데, 이 과정의 가장 큰 위험은 “(학교)교육과정으로 조작 배출되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가치와 계층화된 질서의 교의(敎義)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데 있다. 이상의 제도화된 학교에서 흔히 학교 찬성론자들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다음의 논리들은 그릇된 신화일 뿐이다(일리히가 기능교육과 자유교육 모두가 무능하다고 지적한 바처럼). 1) “학교가 없다면 어린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책 읽는 법이라도 배울 수 있겠는가?”(실제에 있어서 문자 해득력은 학교교육을 받기 이전에 익히는 것이 보통이다), 2)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배우지 못하는 개념들을 배운다”(이는 학교 외 다른 학습 환경이 가져다주는 학습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3) “학교가 문법이나 수학 및 과학의 이론, 그리고 예술을 가르친다”(그런 것을 과연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란 반론이 가능하다), 4) “학교는 유년시절에서 성인 생활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교량의 역할을 하며, 제멋대로 자란 어린아이들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변화시켜 준다.”
Ⅲ-2. 이에, 학교제도는 교육자원(여러 가지 형식의 기록체제가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언제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성하는 도서관 같은)과 기술 모델(컴퓨터에 의한 수업 같은 것(CBI같은), 기술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역할모델) 그리고 동료집단(공통된 관심사를 지닌)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다음의 세 유형의 교육자가 꼭 필요하게 된다. 1) 교육자원망의 설계자와 관리자, 2) 개인적인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적인 어려움을 진단하고 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교육자, 3) 각 학업 분야의 지도자. 이러한 대안적 체제는 일리히가 말하는 네 가지 ‘학습 네트워크’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Ⅳ. 헨티히가 [왜 학교에 가야하나요?]에서 학교에 가야한다고 드는 이유나(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지적하며), 일리히와 라이머가 “탈학교”를 주장하며, 자유로운 “학습”(“교육”이기보다는)이 가능한 교육체제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헨티히는 그것을 “학교”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고, 일리히와 라이머는 제도화된 학교의 독점에서 벗어난(탈脫학교된), 새로운 교육체제에서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도화된 학교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어떤 형태의 교육체제가 공공자금의 낭비 없이 교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참된 “배움”을 가능하게 할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일리히와 라이머가 던져주었다고 본다. 그런데, 라이머가 자신이 정의한 학교 형태에 대한 반작용의 예로, 섬머힐, 퍼시픽 고등학교Pacific High School, 자유학교, 야외학교를 든 것을 보면(이는 지금의 제도권밖 대안학교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제도화된 학교의 교육독점”이지, 학교라는 형태 자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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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간의 욕구를 제도적으로 충족되게 만들어 통제하는 방식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는 학교뿐 아니라, 건강, 여행 등 다른 여러 가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1.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규정하고(학교는 교육education을 학교활동schooling으로 규정),
2.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러한 규정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사람들은 교육을 학교활동과 동일시하도록 유인된다),
3.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일부분은 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도록 배제해 버리며(어느 수준에 이르면 단지 일부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게 된다),
4.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을 매점매석한다(학교는 교육에 유용한 자원을 매점매석한다).
<2005.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