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우리는 물을지 모른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의 정규직 노조원들의 임금은 왜 높으면 안 되는가? 회사가 이들의 자녀들에 대해 대학까지 학비를 지원하고, 이들의 가족이 의료보험혜택을 받을 때, 그것을 왜 특혜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의 임금수준과 회사복지가 중산층의 범주에 들어갈 대졸사원이나 임원진 또는 대학교수들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고, 왜 비정규직 노동자나 중소기업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그것에 비교돼야 하나? 정규직노동자들이 중산층으로 상승이동을 하면 잘못된 것인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왜 정규직 노동자들이 책임져야하나? 그것은 국가와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기업의 오너, CEO, 경영진, 정부의 공직자, 중산층, 대학교수, 교사 등, 다른 집단이나 계층에 비해 노동운동은 왜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하나? 그들이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것만 왜 특별히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혹은 선진국의 노조원들이 향유하는 경제적 시민권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 과격한 기준일까? 나아가 민주정부의 노동정책이 시장과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혹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정부의 정책이 총량적 경제성장만을 지향하기보다 평균적 공동체성원의 경제적 조건이 개선되는 것을 동반하는 성장을 지향하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을까?” (최장집강연에서)

출처: <한국의 노동,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 http://www.prometheus.co.kr/article.php?section=000&no=2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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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죽었다 한마당 글집 3
에버레트 라이머 지음, 김석원 옮김 / 한마당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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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일리히와 나눈 15년간의 대화가 바로 이 책을 나오게 한 원인이라는 라이머의 진술처럼, 이 책의 많은 부분들은 일리히의 [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의 내용과 비슷하다. 저자 자신이 “일리히 조차도 부분적으로는 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의 다른 편제란 생각이다.
 
Ⅱ-1. 이를 테면,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학교 역시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 곧 “일정한 연령집단(취학연령 규정)이, 단계적인 교육과정(표준화된 수업순서, 표준화된 능력과 성과측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질문보다 정설定說만을 제시하는)가 감독하는 교실(시공간의 규정과 통제)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이다. 이러한 “제도적인 차원의 학교교육은 민족국가의 발전과 함께 도래한 것으로, OO 민족국가라는 건축물의 설계도에 가장 적합한 시민을 만들어 내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이유는 “현대사회의 여러 제도는 기존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고 있는데, 이 제도 중에서 학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학교는,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인 양 가장하는 사회의 현실과 신화를 조화시키는 의식(儀式)을 찬양한다. 학교는 인간을 전문화된 제도로서 기술과 가치의 관점에서 그들을 선택하고 형성해간다. 학교는 그 자체의 위계질서적인 구조를 통하여 권력과 특권이 하나로 통합된 사회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도록 학생들을 길들이며”, “학생들에게 다른 사회기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Ⅱ-2. 덧붙여, “교육을 위한 국가기금(國家基金)의 혜택은 현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어,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 기회life chance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기회평등>, <자유>, <진보>, <능률>에 대한 사회적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들에서도 비슷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Ⅲ-1. 결국, “학교가 교육의 유일한 방법으로 독점적 위치를 굳히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하고 있는데, 이 과정의 가장 큰 위험은 “(학교)교육과정으로 조작 배출되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가치와 계층화된 질서의 교의(敎義)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데 있다. 이상의 제도화된 학교에서 흔히 학교 찬성론자들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다음의 논리들은 그릇된 신화일 뿐이다(일리히가 기능교육과 자유교육 모두가 무능하다고 지적한 바처럼). 1) “학교가 없다면 어린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책 읽는 법이라도 배울 수 있겠는가?”(실제에 있어서 문자 해득력은 학교교육을 받기 이전에 익히는 것이 보통이다), 2)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배우지 못하는 개념들을 배운다”(이는 학교 외 다른 학습 환경이 가져다주는 학습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3) “학교가 문법이나 수학 및 과학의 이론, 그리고 예술을 가르친다”(그런 것을 과연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을까란 반론이 가능하다), 4) “학교는 유년시절에서 성인 생활로 건너가는 데 필요한 교량의 역할을 하며, 제멋대로 자란 어린아이들을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변화시켜 준다.”
Ⅲ-2. 이에, 학교제도는 교육자원(여러 가지 형식의 기록체제가 거의 모든 사람에 의해 언제라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편성하는 도서관 같은)과 기술 모델(컴퓨터에 의한 수업 같은 것(CBI같은), 기술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역할모델) 그리고 동료집단(공통된 관심사를 지닌)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다음의 세 유형의 교육자가 꼭 필요하게 된다. 1) 교육자원망의 설계자와 관리자, 2) 개인적인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교육적인 어려움을 진단하고 그 대책을 수립할 수 있는 교육자, 3) 각 학업 분야의 지도자. 이러한 대안적 체제는 일리히가 말하는 네 가지  ‘학습 네트워크’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Ⅳ. 헨티히가 [왜 학교에 가야하나요?]에서 학교에 가야한다고 드는 이유나(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지적하며), 일리히와 라이머가 “탈학교”를 주장하며, 자유로운 “학습”(“교육”이기보다는)이 가능한 교육체제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헨티히는 그것을 “학교”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고, 일리히와 라이머는 제도화된 학교의 독점에서 벗어난(탈脫학교된), 새로운 교육체제에서 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도화된 학교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어떤 형태의 교육체제가 공공자금의 낭비 없이 교육의 “공공성”을 유지하며, 참된 “배움”을 가능하게 할것인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일리히와 라이머가 던져주었다고 본다. 그런데, 라이머가 자신이 정의한 학교 형태에 대한 반작용의 예로, 섬머힐, 퍼시픽 고등학교Pacific High School, 자유학교, 야외학교를 든 것을 보면(이는 지금의 제도권밖 대안학교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제도화된 학교의 교육독점”이지, 학교라는 형태 자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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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간의 욕구를 제도적으로 충족되게 만들어 통제하는 방식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을 듯싶다. 이는 학교뿐 아니라, 건강, 여행 등 다른 여러 가지 인간의 욕구에 대해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1.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재화나 서비스를 규정하고(학교는 교육education을 학교활동schooling으로 규정),
2. 이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러한 규정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사람들은 교육을 학교활동과 동일시하도록 유인된다),
3. 필요로 하는 사람 중에 일부분은 그 생산물을 향유할 수 없도록 배제해 버리며(어느 수준에 이르면 단지 일부 사람들만이 다닐 수 있게 된다),
4.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원을 매점매석한다(학교는 교육에 유용한 자원을 매점매석한다).
<200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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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심재철을 비롯하여, '서울역 회군'에 동의했던 그 누구도 이틀 후에 5.17 계엄확대가 터져나오고 또 그 다음날부터 광주에서 대학살이 저질러질 것이라고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광주학살은 인간의 두뇌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당시 학생지도부의 과실이라면, 인간, 아니 한국인이라는 동족의 이성을 믿은 게 아니었을까?"

 

"대개 광주항쟁을 말할 때 과잉진압이니 하는 따위의 '진압'이라는 말을 쓴다. 현장에서 겪어본 나는 '진압'이라는 말의 허구를 지적한다. 그건 진압이 아니다. 무엇을 진압한다는 말인가. 오월의 햇살을? 한가로이 오가는 선남선녀를? 그들은 그냥 평화로운 광주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면 어디든 군화발을 들여놨다. 학원도, 독서실도, 가정집도, 그 때 광주엔 진압을 할 일이 없었다. 도청에서 구 노동청 사이에 학생 이삼백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인도 쪽으로 바짝붙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이야 늘상 있었던 일이다. 아무도 신경쓰는 사람도 없고 평화롭기만 했다. 적어도 공수군이 군용트럭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저항을 했을 뿐이다."([김대중 죽이기] 독자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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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다리-학교의 위계질서, 진급의 위계질서, 소득수준의 위계질서, 사회적 신분의 위계질서-를 한 칸씩 올라가는 의식적(意識的)인 진행에 의해 균등한 기회가 주어진다고 믿게 되었다. 사람들이 한 계단씩 올라가는 동안 모든 길이 꼭대기까지 통한다는 환상을 갖기 쉽다. 한번에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이 꼭대기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 속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서는 꼭대기까지 갈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해버리고 만다. 당신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 언젠가는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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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만화가 생각난다.

(출처: http://www.hani.co.kr/section-011014000/2001/11/011014000200111301051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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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보는 재미하나가 사라졌다.

<마주보기>가 이번으로 끝난다. 실상 마주보기를 한 적은 드물다. 이번 마지막 마주보기가 그렇듯이, 마주보기가 아니라 ‘함께 보기’가 되곤 했다. ‘마주’ 보고 싶은 분들, 가령 정부나 열린우리당의 인사들은 이에 쉽게 응하지 않는 대신, ‘함께’ 볼 분들은 선선히 응했다. 왜 그럴까? 독자의 생각에 맡긴다. 나로선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아쉬움이 더 크다. 그동안 이에 응한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다른 방식으로 ‘마주’ 볼 기회가 있기 바란다.

기획위원 홍세화

인권위 '제몫인가' '월권인가' 취임 한달 조영황 위원장: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5/05/0010650002005050217161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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