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피억압자가 먼저 폭력을 시작한 적은 없었다."


 "피억압자의 복종을 고착화시키는 폭력 상황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피억압자 자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예전의 피억압자가 억압자에게 제제를 가해 억압자가 예전의 지위를 되찾을 수 없게 하는 것은 억압이 되지 않는다."



요 며칠동안 읽고있는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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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돌아가 근본부터 다시 고민하고자 한다."

이젠 제법 나이를 먹은 현장교사를 위한 월간 [우리교육], 주로 (제도)학교 밖의 새로운 교육을 이야기하는 격월간 [민들레], 좀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교육현실을 바라보려는 계간 [교육비평]은 새 호가 나올 때마다, 이곳저곳 뒤적이는 것들이다. 이와 함께 언제부턴가 한 호 한 호를 책장에 꽂아 두는 것만으로도 흐믓해 하던 잡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격월간 [처음처럼]이다.

이 잡지를 통해, 톨스토이, 프레네, 코르착, 간디, 그룬드비, 비노바 바베, 함석헌, 김정환, 홍순명, 윤구병, 이철국, 채규철 등 그동안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귀한 교육실천가들의 글을 만나고 사귈 수 있었으며, 우리 서당교육의 소중함, 몸교육, 노작교육, 영성교육, 예술교육, 아동권리의 중요성, 그리고 현 교육이 처한 위기와 그것을 걷어차기 위한 대안적 가치들(이를 테면, 생명중심․자연친화․공동체 같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울러, 현장교사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교육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좀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교육을 바라보려는 이들에겐 어떤 순진함이, 오랜 구독자들에겐 점점 식상함과 고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잡지가 보여주려고 그동안 애써왔던 “새로운 삶과 교육”의 모습은 이 잡지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요인이다. 창간사 “살아 있는 교육을 꿈꾸며”에서 밝힌 창간 의도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면, 현재까지 이 잡지는 그것의 존재이유에 충실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실천들(‘대안학교,대안교육운동’, ‘야학운동’이나 ‘참교육 운동’-옮긴이)에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이 잡지가 그러한 가치 있는 실천들에 싱그러운 자양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아가 더 많은 교육자(교사와 학부모들)와 교육 관계자들에게 그러한 실천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삶과 교육을 살리는 연대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삶과 교육의 고전들 위에 켜켜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그 속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또한 우리 잡지가 맡고자 하는 역할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삶의 주제들- 대안적인 삶, 환경과 생태, 인권, 평화, 통일, 문명, 종교, 성평등 같은- 에 접근하여 ‘삶의 문제’와 ‘교육의 문제’가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또한 나라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교육 실천들 가운데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들을 발굴하여 널리 알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런 노력을 거쳐, 이 작은 잡지가 새로운 삶과 교육의 바탕이 될 철학과 가치를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올 상반기에 통권41호가 발행된 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하지만, 곧 다시 찾아와 책꽂이 한 곳을 채워주기를 기대 한다. 여전히 “‘처음으로’ 돌아가 근본부터 다시 고민해야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비슷한듯하면서도 서로 달라 나름대로 훌륭한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교육], [민들레], [교육비평]도 각 잡지별 특성을 계속 살찌우며, 그 소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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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Ⅰ. 우선, 몇 가지 용어들의 의미를 분명히 해보자.
첫째, 일리히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학교는 “특정의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고, 의무적인 커리큘럼에 풀타임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가 관계하고 있는 과정”, 곧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를 의미한다.

둘째,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脫학교(deschooling)”의 의미는 학교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단일종파에 의한 종교의 독점이 폐지됐던 것처럼, 학교에 의한 교육독점을 폐지하자는 것, 곧, 미국에서 교회가 탈(脫)국가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 역시 국가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학교의 탈국가화” 주장이다. 이는 학교에 독점적으로 공공재원을 쏟아 부으며 낭비하지 않는 것이고, 교회나 학교에 출석하는 이들에게 어떤 사회적 특권을 주던 시스템을 없애는 일이다.
참고로, 이후에(1995) 일리히는 자신의 주장이 학교제도를 폐지하자는 오해를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켰다고 하면서 자신의 긴급한 과제는 “교육을 무료로 즐기는 선물이나 서비스라기보다 강제된 의무사항으로 고착화시키는 흐름을 역전시키는 것”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그가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이 갖는 위험성이 학교를 폐지하고 학교 밖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는데 있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학교의 안이든 밖이든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교육이 전문가에 의해 감독되고, 학생은 완전히 도움을 받는 수동의 형태로 취급되는 교육”에 있다(이반 일리히, 1997:171).


Ⅱ. 그에게 “강제된 의무사항으로 고착화된 교육”이 지배적인 “학교화된 사회”는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자신의 인생지도, 세계관 형성, 합법성과 비합법성의 구분 등을 학교라는 제도에 의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병원이라는 제도적 기관에서 치료받지 않고, 개인 스스로 치료하는 행위를 무책임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여, 병원에 치료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학교에 가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게 하여, 학교가 배움을 제공하는 하나의 특권화된 곳이라 여기게 한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의존(특히, 학교)이 문제인 이유는, “한번 학교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들은 학교 이외의 제도의 필요성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된다. 젊은 사람이 일단 스스로의 상상력을 커리큘럼에 따른 교수활동에 의해서 형성하는 데 버릇이 들게되면 그들은 어떠한 유형의 제도적 계획도 받아들이는 상태가 된다. 그들은 ‘교수’받음으로 해서 상상력의 발전이 억제된다.......이와 같이 책임을 자신으로부터 제도에 전가해버리게 되면 사회는 틀림없이 퇴보해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의무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 특권화된 학교가 수행하는 3중의 기능이다. 곧, “학교화된 사회”에서 학교는 사회적 신화(소비화, 물신화)의 저장소의 기능, 그 신화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제도화하는 일, 그리고 그 신화와 현실간의 차이를 재생산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의례의 장소로 기여한다는 것이다.

셋째, 학교에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해도 빈민층의 교육은 개선되지 못하고, 특정한 아이들에게만 공적자금이 사용된다. 곧, 학교에서 혜택을 받는 이들은 그 혜택을 누릴 준비와 조건이 갖추어진 부유한 아이들이다. 그는 이를 공적자금으로 건설된 고속도로의 혜택이 결국 자동차를 지닌 이들에게만 돌아가지, 자동차를 부릴 여유가 없는 이들에겐 거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학업성적을 개선시키기 위해 투여되는 비용이 불충분하며, 투여된 자금 역시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어 빈곤층을 위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빈곤층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학교)제도의 혜택이 아닌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가 보기에 교육상의 불리함은 현재의 학교 내 교육에 의존해서는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넷째, 위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을 학교로 끌어들이는 기제가 필요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이다. 우선, 학교가 학업성취(자격)의 공인기구로 기능하면서, 개인의 자격(능력)과 (학교)이력(履歷)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할당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한 방안으로 일리히는 자격과 (학교)이력을 분리하기 위해 학력조사를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제는 학업성취의 평가준거가 되는 교육과정(커리큘럼)인데, 그것이 다름 아닌 상품처럼 “패키지된 (지배)가치”라는데 있다. 곧, 현재의 패키지된 (지배)가치를 얼마나 잘 숙지했느냐가 곧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학습은 학교수업(자격증을 지닌 교사의 가르침)의 결과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신화의 조장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고, 의도적 학습의 상당부분도 계획적 교육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

다섯째, 이러한 사회에서 학교는 기능(skill)교육에도 무능하고,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에도 무능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곧, “교육” 기능의 상실이다.

Ⅲ. 그렇다면, 일리히가 말하는 제도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난 “脫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가 지향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일리히에게 이는 “공생(혹은 상호친화적, conviviality)”의 제도, 곧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교류가 가능하고,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는 사회이다. 좀더 덧붙이면, 이 사회에서 가능한 학교를 대치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대안은 모든 사람들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동일한 학습의욕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그 기회를 동등하게 나눠가질 수 있는 네트워크나 서비스를 갖는 것이며, “탈학교 사회”는 우발적인 교육이나 비공식적(informal) 교육에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훌륭한 교육제도는 1) 학습하고자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인생의 어느 때에도 학습에 필요한 수단이나 교재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 2)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가지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그러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3) 공중(公衆)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학습을 위한 네 가지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한데, 그것은 교육 목적 달성을 위해 참고자료를 서비스하는 것(도서관 등), 기능(skill)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교환소(일종의 역할 모델링) 설치, (학습활동을 위한)동료 맺어주기(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자에 대한 자료 서비스이다.

Ⅳ.
정리하자면, 현재의 제도화된 학교는 현 사회의 물신(物神)화, 소비화를 조장하며, 그것의 가치체계를 재생산하는 의례(儀禮)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계속해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학교에 개인들을 계속해서 끌어들이는 것이 필요한데, 그 방안이 바로 “학교화된 사회”를 조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학교의존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학교를 의무화하고, 그곳에 학력인정의 특권을 부여하여 학교가 사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도록 한다. 이에, “학교이력(履歷)=개인능력”이란 공식이 조장되고, 개인들은 의례기관인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학교가 수행하는 3중의 기능에 따라 현 지배가치의 신화를 계속해서 내면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의례기관에서 어떤 기능(skills)의 효율적인 습득이나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 역시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서는 제도화된 학교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 교육제도를 새롭게 재편하는 일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일리히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벗어난 사회”이며, 학습을 위한 네 가지 네트워크를 통해 자유롭고 즐거운 배움이 존재하는 “공생의 사회”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인적 학습이나 사회적 평등도 학교교육이라는 의례에 의해서 촉진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교육개혁을 시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거기에서 어떤 것이 가르쳐질지라도 의무제의 공교육이 필연적으로 소비사회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우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소비자 사회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 많은 공적자금을 투입해도 빈민층의 교육은 개선되지 못하고, 특정한 아이들에게 공적자금이 사용된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교육공공성”에 있다면, 과연 어떤 체제가 그것을 담보하기 좋은 조건인지는 한번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의 의견에 어떤 논쟁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일단 나름대로 이해한 바를 정리해 둔다. 200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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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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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러 주제글로 엮인 칼럼집을 읽은 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현실과 관련된 대목들일 것이다. 한 시점에서 적절한 시대적 발언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지체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듯 하여 씁쓸함이 느껴진다. 글쓴이의 삶 자체가 바로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이니, 이 책의 가치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이 암담한 시대. 도덕적 우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라는 자신 있는 언명은 바로 그 자신이 그런 “도덕적 우위”를 지녔기 때문에 더욱 힘을 지닌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그의 책이 단지 “소비되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_____________________

현 시점에서 몇 가지 기억해두고 싶은 것들을 정리해 둔다.

우선, “‘계급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사회구조의 문제에 육박하지 않고, 인권이 구현되는 세상으로의 ‘초월’이나 변혁을 꿈꾸지 않고 그리고 조국 통일에의 소망을 품지 않고서 어떻게 ‘보편적으로’ 인권을 구현시키기 위한 고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곧, “계급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인권이론은 사이비 보편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인권이해이다. “원래 한 사회의 인권 상황에는 당대 지배계급의 지배의지가 그대로 반영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둘째, 원론적이고 이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포르노?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어차피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캐서린 A. 매키넌의 말을 빌려 그가 한 답이다. ‘평등’이 현실이 아닌 단지 말뿐인 사회에 머물러 있는 한 포르노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평등이 현실이며 ‘말뿐’이 아닌 사회에서는 인종적, 성적 공격이나 성적 비방의 말은 의미가 없는 말이 될 것이다. 인간과 물질과의 성행위, 인간과 종이 쪼가리와의 성행위, 현실 세계의 남자와 비현실 세계의 여자와의 성행위는 사람들의 성적 흥분을 싸늘하게 식혀 버릴 것이다.”(캐서린 A. 매키넌)

셋째, “이제부터라도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의 중심에 ‘남북’의 관점이 아닌 철저한 ‘인권’의 관점을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국가보안법이 ‘북한의 존재’ 때문에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애당초부터 국가보안법의 본질은 ‘북의 위협’을 빙자한 남한 내 진보세력과 민중에 대한 억압이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는 북한과 화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쪽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당하고 있는 이 암담한 인권침해를 분쇄하기 위해서 보안법을 철폐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상호주의가 끼어들 필요가 없다.”

넷째, 우리 국가의 꺼림 직한 기억 그것은 다름 아닌,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인간의 권리일 것이다. 이에 “국가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독점하고 그 중 ‘유익’한 기억은 열심히 광을 내는 한편 꺼림 직한 기억은 집요하게 말살하려 한다.”

끝으로, 유엔 “어린이 권리조약”을 “널리 알리는 일”의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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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과 늙음


새해에 48, 29, 36살 되는 친구들이 말했다. “내 나이가 끔찍해(징그러워, 무서워…).” 그들은 자기 나이로부터 상처받고 있다. 나도 그렇다. 최근 나에게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정체성은 여성이라기보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 검열 논란 당시, 나는 주변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분개했었다(젊은 사람의 섹스는 ‘아름답고’, 나이 든 사람의 섹스는 ‘변태’인가). 일상과 역사를 대립시키며 가두에서 20대를 보낸 나는,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사느냐’보다 더욱 ‘본질적인’ 살벌한 인생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이 듦. 지나고 보니, 20대는 성별, 계급을 초월하여 그 자체로 기득 계급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폭력, 성차별, 인종주의, 연령주의(ageism)는 모두 인간의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다. 몸은 ‘구별 짓기’를 통해 인간을 계층화시키는 물리적 공간이 되고 있다. 성별과 나이에 따른 차별과 혐오의 시선은, 몸에 ‘근거한’ 자연스러운 문제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너무도 쉽게 가해자로 동참시킨다.

한국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다. 지식인, 여성 지식인, 게이 지식인이란 말은 있지만, 노인 지식인이란 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의 칭호를 붙인다. 이것은 나이 듦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여성은 늙지만 남성은 나이 든다. 자원이 있는 사람의 나이 듦은 나이 듦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나이 듦은 늙음이고 추함이다. 늙음은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다.

연령주의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아름다움,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속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한때 학생운동을 구국운동이라고 하는 것(젊은이만 나라를 구하나),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정희성의 싯구를 싫어한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사람(남성)으로 한정된다. 그래서 남성이나 젊은 여성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표준적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 나이든 여성에게는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어 비난받는 일이 일상에 지뢰처럼 깔려 있다. 어떤 사람의 욕망은 질문되거나 문제화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의 욕망은 늘 해명하거나 용서를 빌거나 투쟁해야 할 과제가 된다.

연령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생애 주기’식의 연령주의와 나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연소자 혹은 연장자 우선주의다. 한국사회는 ‘나이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패배자’로 간주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직업, 지위, 외모, 언어, 태도, 습관, 문화적 취향, 성생활, 결혼 등 삶 전반에 걸쳐 특정한 나이에 맞는 정상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다. 나이에 맞는 삶에 대한 문화적 규율과 통제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생을 다르게 살 자유, 방황할 자유가 없고 그것은 낙오로 연결된다. 취업시 나이 제한이 당연한 규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곧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치밀하게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

인간의 나이는 임의적인 인식과 제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억압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학적, 사회 심리적인 물적 토대를 가진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려면,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나이에 따라 인간의 권리가 다르지 않다면, 박혜란의 말대로 노후(老後)라는 말부터 없어져야 한다. 노전(老前) 생활이 따로 없듯이, 노후 생활도 따로 없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http://www.hani.co.kr/section-001038000/2003/12/0010380002003123117223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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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나이듦에 대한 고민이 깃든 친구의 메일을 받고, 무슨말을 할까 고민하다 예전에 읽었던 이 글이 생각났다. "인간의 나이는 임의적인 인식과 제도의 산물이다."라는 말을 해주고싶었으나, 아직 까지 답메일을 보내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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