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의 [엣세]와 함께, 프랑수아 라블레의 이 책-[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기억해두자.

"이 [팡다그뤼엘 이야기] 가운데 몇 부분, 특히 가르강튀아 주인공인 아버지 가르강튀아, 아들 팡타그뤼엘의 성장과정을 서술해가면서 라블레는 그의 교육관을 매우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가르강튀아의 소년시대의 교육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확실히 르네상스 교육학의 바이블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우메네사토루. [세계교육사], 187쪽

 그의 교육론은 당시 자유도시(상업도시)에서 발달한 여러 종류의 세속적인 학교의 교사들이  이전 사원학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책 중심적이고 난해한 책을 통째로 암기시켰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시민사회에서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인간, 강제와 압박을 싫어하고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는 인간- 이러한 당시의 시민적 인간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낸 교육개혁론이었다." [세계교육사], 192쪽.

라블레의 교육론은 루소와 더불어 20세기 초엽  활발히 전개된 새교육(운동)에 중요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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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25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어제 이 책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반갑네요.

bildung 2005-01-2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갑습니다. 책 다 읽으시면 좋은 서평 부탁드릴께요.^^ 미스 하이드님
 

ㅋㅋㅋ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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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어공부를 따로 한다는 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를 뜻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영어를 잘 못한다. 거의 벙어리, 귀머거리 수준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비록 그것 때문에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부끄럽다거나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영어만은 아니다. 10여년 전에 우연한 기회로 베이징에서 열린 로자 룩셈부르크 대회에 발표자로 참석할 일이 있었다. 발표문의 작성과 발표는 모두 독일어로 한다고 했다. 독일어 역시 읽는 것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영어보다 상태는 더 처참했다. 중국어 통역이 있었지만, 그건 거의 외계인의 언어였다. 하지만 아마도 다음번인가에 이 난에 칼럼을 쓸 친구 덕분에 논문을 독일어 번역본으로 제출할 수 있었고, 발표문은 그 번역본을 토대로 대강 편집과 교열을 통해서 만들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주제와 목차만 보면 대략 알 만한 내용의 글과 달리 로자의 사상을 푸코와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이질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뒤섞어 해석해서였는지, 유달리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걸 내가 무슨 수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중국어 통역을 재통역해주겠다던 후배도 있었지만, 일단 중국어 통역이 거의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고, 그 친구 역시 능숙하진 않아서, 나는 질문자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미안한 웃음으로.

이런 사태에 대해 사회를 보던 네덜란드의 한 교수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델 왜 오나? 한심한 넘!” 아마도 이런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순간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열이 치받았다. “씨X, 지는 한국어 기역자도 모르면서….” 나는 독일어를 읽거나 써도 욕을 먹고, 지는 한국어 한자도 모르면서 뻔뻔스레 남을 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비대칭성, 그것은 언어와 겹쳐진 권력, 제국주의적 지배의 산물일 뿐이지….

그 ‘방송사고’ 와중에 옆에 앉아 있던 학회의 회장은 나에게 “이 논문이 이번 대회에 제출된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며 말해주었다. 마지막 날 저녁 ‘파티’에서 독일의 늙은 교수 한 사람이 웃으며 다가와 나에게 논문이 재미있었다면서 내년에 유럽에서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심포지엄을 할 건데, 참석해줄 수 있겠냐고 말했다. 덕분에 오기로 버티던 마음이 자존심을 찾았다. “그래, 독일어가 문제가 아니야! 독일어 잘하는 넘들이야, 독일 가면 길거리에 흘러넘치잖아!”

그런데 최근에 송년모임에 갔다가 서울대 사회대학에서 교수채용시 영어 발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고려대에선 한국학을 하는 사람조차 영어 발표를 해야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영어 가르칠 사람을 뽑는 건가? 그런 거라면 미국의 거지들이 더 잘하잖아! 게다가 그런 걸 일종의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는 걸 듣고는 어이없어 코웃음이 나왔다. “영어 잘한다고 엘리트 될 거면 미국이나 영국은 엘리트 천지겠네! 그래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나보지?”

솔직히 말해 영어 실력 말고는 발표자의 ‘내공’을 알아볼 능력도, 그럴 의사도 없는 사람들, 유학 가서 배운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지금도 할 줄 아는 거라곤 영어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을 이처럼 처참하게 만들고 있는 거 아닐까? 중등 학생 시절에는 세계 2, 3위를 다투던 아이들, 거기서도 잘한다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영어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식 평가기준으로 보아도 100위, 200위를 넘는 열등생으로 만들어놓는 게 한국의 ‘잘 나가는 대학’들 아니신가!

검은 피부를 희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가득 찬, 백인보다 더 백인 같은 흑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과 달리 저 본토의 대학들은 ‘영어 발표능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한국의 대학교수들이 ‘외면’한 우리 연구실의 고미숙 선생- 그 역시 나만큼이나 영어를 못한다!- 은 지금 코넬대학에서 한국어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하버드와 시카고대학 등에서 강연요청이 이어져서, 예정되어 있던 귀국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다. 다들 걱정하고 있다. “이러다가 저 양반 미국 대학에 덜컥 눌러앉게 되는 건 아냐?” 반면 지난달 미국에서 한국학 대회에 참석했던, 유학간 후배들은 미국의 한국학자들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전해준다. “그들이 잘하는 건 영어밖에 없더군요.”

영어, 잘하면 좋지! 영어뿐인가? 불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어떤 것도 잘하면 좋지! 그러나 그것으로 대학교수의 지적 능력을 혹은 사람들의 능력 전체를 재고 확인하려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을 재는 어설픈 애꾸눈 개구리의 세계관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출처: 씨네21 [483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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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1-17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픈 말을 이진경씨가 다 해버렸네요. 보고 갑니다. 영어 못하는 자의 컴플렉스인가? 전 영어를 거부하죠. ㅋ

bildung 2005-01-18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부하실거 까지야...^^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좋은 영화 한편을 만났다. "착하게 살자.", 그런데 "우울하다."

_________<관련글>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제부터 그랬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옥탑방 풍경을 자주 보게 됐다. 주인집 옥상이지만 내 집 마당처럼 쓸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는 옥탑방.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그곳은 사랑과 낭만이 숨쉬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옥탑방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도 저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마 전 <마이 제너레이션>을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남자주인공이 사는 방이었다. 좁고 칙칙한 그 방을 보면서 어, 이건 못 보던 풍경인데, 싶었다. 현실에선 너무 익숙한 단칸방의 모습이건만 화면으론 처음 접하는 공간으로 느껴진 탓이다. 익히 봤던 옥탑방의 화사함이 현실엔 없는 것임을 불현듯 깨닫게 됐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미덕은 무엇보다 바로 그 정직함에 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현실 공간을 찾아간 것처럼 등장인물들도 어딘가 꾸민 흔적이 없다. 출생의 비밀도, 의외의 반전도,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트라우마도 없는,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 그것 또한 꽤나 낯선 경험이었다. 지아장커의 영화에 대해 장이모가 했던 표현을 빌리면 노동석 감독은 분명 “서울을 아름답지 않게 찍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 제너레이션>에서 카드빚에 시달리는 젊은 남녀를 보다가 문득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씨네21>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도 카드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월말만 되면 카드 돌리는 데 하루를 소요했고 또 한 사람은 “대출하게 도와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매달 급여를 받아도 이런 일이 생기는데 영화 한다고 1년에 500만원도 못 받고 일하는 초보 스탭은 말해 뭐하겠는가. 독립영화감독이라면 사정은 더 딱하다. 아르바이트로 지하철역에서 도넛을 팔기도 하고 공사장 막일을 해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주인공처럼 결혼식 비디오 아르바이트를 하는 감독 지망생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가난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차압당하는 삶에 힘들어했다. 그래서 생긴 의문 하나. 다르지 않은 현실인데 어째서 <마이 제너레이션>은 지금에야 만들어졌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디지털의 도움으로 값싸게 찍을 수 있었다는 것, 제작비를 각종 제작지원제도에서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지아장커의 <소무>로 대표되는 중국 지하전영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 등.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발상의 전환이고 젊은 감독다운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마이 제너레이션>은 가난을 정면으로 보는 영화다. 겪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난을 남에게 내보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못사는 자기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 초대하기가 겁났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반대로 그런 집에 초대받는 일도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솔직히 <마이 제너레이션>을 볼 때 느낌도 마냥 즐거운 쪽은 아니었다. 현실도 우울한데 이렇게 우중충한 얘기를 봐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마이 제너레이션>의 잔상은 오래 남았다. 돌이켜볼수록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걱정되고 안타깝고 사랑스러워졌다. 감독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배우들도 자신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게 살자”는 그들의 말이, 한심하긴 하지만,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솔직한 고백은 마음에 오래 남는 법이다.

이번호에는 이창동 감독이 문화관광부 장관을 그만두고 처음 가진 인터뷰를 실었다. 지금은 소설가가 된 조선희 전 <씨네21> 편집장이 인터뷰어로 나서 이창동 감독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더불어 <씨네21>에서 만드는 새로운 영화정보 격주간지 < ME >의 편집장인 김봉석 영화평론가가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현장을 방문한 기록이 이번호의 더블 특집으로 마련됐다. 한때 열혈 문학 청년이었다가 소설가와 감독이 되어 재회한 자리, 영화광 대 영화광으로 차기작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눈 자리, 두개의 특별한 만남을 얼른 만나보시라.

남동철 <씨네21. 4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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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대중정권까지의 정치현실뿐 아니라 지금의 정치현실을 이해하고 확증(confirmation)는데 도움을 준 책이다. 이를테면, 우선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들어오긴 했지만, 최근의 정치행태는 “매우 보수적인 이념적 범위 안에서 기존의 정치행태를 지속함으로써 사회적 기대와는 거리가 먼 정치계급(political class)의 쟁투장에 가까운 것”으로 “사회의 근본적 이슈와 괴리된 권력투쟁 이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누더기 4대입법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내년 보궐선거와 그 이후를 위한 권력투쟁이상은 아니다.
둘째,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 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냉전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결과는 무수히 많”은데, “직접적으로 그것은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지속시킨다.” 얼마 전 정부가 보여준 공무원노조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비정규직법안을 보라. 열린우리당 역시 개혁적 레토릭을 구사하긴 하지만, 보수독점의 정치체제를 이끌어가는 한 축 이상은 아니다. 
셋째,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공고화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개혁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기득권 세력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제나 민주화에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란 점이다. 따라서, 현재의 개혁부진 원인의 한 측면 역시 “변화에 저항하는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민주 세력이 보여준 무능력에” 있다. 

참고로, 글쓴이가 이 책에서 요구하는 바는,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고,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여러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자유주의적 재편, 민주적 재편(재벌구조, 관료체제, 노사관계 등)이다. 이는 마지막부분에서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언급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자조차 빨갱이 사냥으로 몰았던 일은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문일까, 민주화를 저해하는 주범 중의 하나인 보수언론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보수언론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보수적 부문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권위주의 하에서 성장한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왜곡되었”으며, “다른 가치와 이념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냉전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가치와 병립하기 어렵다.”

김규항은 [B급좌파](야간비행, 2001)에서 “구사대”를 모르는 라디오DJ를 두고, “교양”을 언급한 바 있다. 얼마 전의 경험은 다음과 같은 대학의 현실에서 그 일화가 먼 이야기 같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 바 있다.

“지난 날 권위주의의 강권통치에 맞서 민주화를 이뤄 낸 대학사회는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이 살아 숨쉬는 전당이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 4년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미래의 노동시장에 남보다 좋은 조건으로 진입하기 위한 준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러는 사이 교육의 가치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에 압도되어 버렸다. 캠퍼스에서 운동이 소멸한 이후 이를 대체한 것은 진리탐구를 위한 지적 열정이나 작업도 아니고 사회현실에 대한 지적 비판도 아니다. 비판정신이 거세된 대학사회는 마치 거대한 사회입시 학원과 같은 것이 되었다.”

한국사회를 위한 “교양” 차원에서라도 이 책은 한번쯤 읽어보았으면 한다. 글쓴이는 “개인들이 그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될 때,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타락하기 쉽다”라고 말하는데, “개인들이 그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추고 있는 것” 역시 “교양”의 한 측면이다.

얼마 전, 언론을 타고 화제가 된 바 있는 글쓴이의 논문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정당들과 민주정부에 의해 정치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론은 이미 이 책에서 예비 되고 언급된 것이며, 누군가 지적한 바대로 이러한 현실해석과 발언이 가능한 사람들이 대학강단에 거의 없거나 사라지는 현실이 바로 우리 대학(학문)의 큰 위기가 아닌가한다. <200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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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에 대한 갈증의 해결, 생산적인 연구와 학문적 성과는 점차 제도권 대학밖에서 이뤄지고, 대학(원)은 단지 자격증을 위한 통과의례이자 간판따기가 되고있는 현실에서도, "학교이력=개인능력"이란 도식의 힘은 여전히 그 간판에 우리를 옭아맨다. 도덕적 차원을 떠나, 돈과 인맥으로 얻어지는 00대학원 00과정수료라는 최종간판이 아닌 고등학교 간판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그냥 씁쓸할 따름이다.

--<관련글>----------------------------------------------------------------------------------------

이달 초까지만 해도 개인적으로 꽤 기분 좋은 연말이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8년을 끌어 온 박사 과정이 끝나기 때문이다. 학위를 받는다고 지금 생활에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속시원함 같은 것을 기대했던 셈이다. 하지만 심사가 끝난 지금의 나는 그다지 즐겁지도 시원하지도 않다. 반은 필요에 의해서, 반은 관성처럼 얻고자 했던 앎의 자격증. 그것의 획득을 앞둔 지금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의식적으로 쌓아왔고 그 안에서 편안했으며 때론 우쭐대기까지 했던 벽의 존재를 실감하며 우울하다.

내 12월의 기대가 뒤틀어진 직접적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이상락 의원 구속 기사였다. 그의 구속은 국가보안법을 사이에 둔 여야의 가파른 대치 속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그의 의원직 상실로 여당의 과반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의 구속 이유는 ‘초졸’의 학력으로 ‘고졸’ 행세를 한 것에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너무 부끄러운 말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초졸’의 학력을 숨겼다는 것보다 ‘고졸’로 ‘행세’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졸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이왕 거짓행세를 하려면 최소한 ‘명문대 졸’, 아니면 돈 주고 산다는 ‘명예박사 학위’ 정도는 적어두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한겨레21〉에서 그 복잡한 사연을 읽고 나서 내 기분은 착잡해졌다. 그는 충남의 어느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 농사를 짓다가 상경한 그는 공장 노동자, 밤무대 가수 생활을 했고, 1980년부터 성남 지역에서 과일 노점상, 목수 보조 등의 막일을 했다. 그러다 성남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눈을 떴고, 이후 운동가로 변신해서 80, 90년대 수도권 빈민 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성장한 운동가가 그런 거짓행세를 해야 했을까? 바리케이드 너머의 무서운 적들에도 꿈쩍 않던 그를 이토록 왜소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싸우기 힘든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적이고, 나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적이라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무학’의 부끄러움이 괴물이 되어 한 운동가를 먹어치운 것이다. 가난 때문에 채우지 못한 학력이 빈민 운동가를 무너뜨린 이 슬픈 현실에 무어라 말해야 할까.

지난 주 학위논문 심사가 끝났을 때 내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어머니였다. 무사히 통과되었다는 말에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잘했네, 잘했네”를 연발하셨다. 아들의 학위 소식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어머니의 관심은 각별했다. 심사일정을 자주 물었고 그 뒤에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바심과 기쁨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어머니의 최종학력은 ‘초졸’이다. 그것도 서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2년 정도 학교에 나간 게 전부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마도 읽고 쓰고 셈하는 것 대부분을 살아오면서 터득하셔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삶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셨지만, 어머니의 최종 학력은 평생 그대로였다. 어머니도 마음 속에 슬픈 괴물을 키워 오셨던 것이다. 어머니 스스로 ‘한’이라고 말했던 그 괴물은 내 학위를 나보다도 더 오랫동안 기다려왔을 터이다.

많이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자격증이 되고 차별의 근거가 된다면 배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배운 자가 배웠다는 이유로 혜택을 요구하고 못 배운 자는 바로 그 때문에 또 다른 불이익을 받는, 이중의 혜택과 이중의 불이익 속에서 살고 있다. 차별하는 자는 우쭐대고 차별받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니, 우리 맘 속 괴물을 도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올 연말 내게 슬픈 물음이 던져졌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인터넷한겨레, 등록 2004.12.19.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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