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국내 출간 도서는 모두 다 읽었다고 하는 내 말을 듣고 당시의 신간이었던 이 책을 누군가 내게 건넸다. 농담반으로 책은 빌려주면 못받는데? 라고 하자 그냥 읽고 가져도 상관없다며 웃어보였다. 휘리릭 빠르게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눌러가며 하루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이 책을 읽은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때의 농담은 현실이 되어 여전히 이 책은 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이 책이 다시 눈에 들어온건 하루키의 신작을 예약구매하려다 불쑥, 그러니까 정말 불쑥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마라톤.. 하루키의 달리기 책.. 그게 어딨었지? 책은 거실 책꽂이도 아닌 내 방 책꽂이 중에서도 최근에 증설(?)한 눈에 잘 띄는 곳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늘 거기 있었건만 못봤던 셈.
달리기, 라고 해봐야 아주 최근에 KTX 놓칠까봐 눈썹 휘날리며 달린것 빼고는 이렇다할 기억이 없다. 걷기도 아주 가끔씩 했던지라 달리기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어려서는 천식 때문에 늘 오래달리기를 기권했고 아무리 기록이 늦어도 완주하는 아이들이 부러웠었다. 중학교때는 한번 무리해서 달렸는데 얼굴은 시뻘개지고 목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혀 끝에서는 피맛이 나는 등 아주 난리였다. 그나마 기록은 차마 기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완주도 달려서 완주가 거의 걸어서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달리기, 특히 오래 달리기는 나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그런 단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데 새삼 하루키의 책을 다시 집어들고 보니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오래 달려본 거리는 3000 미터가 조금 넘는게 전부다. 대학생 때 친구가 4.19 마라톤 대회 나간다고 연습하는데 옆에서 따라서 뛰다가 최장기록을 세운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내 도전이라고 해봐야 그 시작은 참 민망한 길이부터여야 할 것 같다. 날도 쌀쌀하고 점점 더 바빠질텐데 언제 달리나 싶지만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달려볼 생각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가능한 오래. 조금씩 늘려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놀랄 거리를 달릴 수 있으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