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해 전화하고 다음날 쥐구멍 찾는 한심한 반복적 추태를 스스로 제어해볼 요량으로 금주 중인 바, 다섯 시간 동안 참이슬 네 병과 매화수 두 병이 비워지는 사이 오로지 물만 마셨다. 물도 소주잔에 따라 탁 털어넣듯 마시면 은근히 취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튼, 담배도 끊은 독한 인간이 뭘 못 하겠냐마는..

평소 위나 아래로 나이 서너 살 차이 나는 사람들과 동년배 보다 더 친하게 지내곤 했는데 어제의 술 자리는 그 차이가 평소보다 더 했다. 어제의 멤버는 연애한지 갓 100일 정도 된 풋풋한 커플(네살 차이)와 '86이라도 괜찮은' A와 나였다. 우리는 가식따위는 홀랑당 발라당 시원스레 벗어던지고 맨살같은 속내를 탈탈 털어내 보이며 술잔과 물잔을 비워나갔다. 한 자리에 모인 넷은 각자의 너덜거리고 찌질한 부분들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용쓰는 모습들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자의 나이 차이 만큼 상황의 차이도 커서 그 부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 또한 필요했다. 

내가 좀 더 살았답시고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뭔가 이야기를 해대고 있었으나 따지고 보니 내가 A보다 뭐 하나 나은 구석이 없었다. 단순히 나이 차이가 제법 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A에게 편견을 갖고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A보다 나은 구석이 아니라 다른 구석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난처한 상황을 빠져 나가는 술수를 부리는 능력이 조금 더 있다는 것 뿐이었다. 내가 이미 정서적으로 늙어가고 있구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그런 나를 더 머쓱하게 만든 것은 A의 배려였다. 허물없는 사이라 해도 1:1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자리에 따라 충고의 수위가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을 A는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주점에서 넷 중 누군가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생리현상 해결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A는 1:1이 될때 할 수 있는 수위의 충고를 했다.

나이 서른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이의 수가 늘어나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일에 견줄만큼 어려운 일이다. 같이 어울려 시간을 보내며 즐거움을 나누고 힘든 일 있을때 푸념 들어주는 정도의 사람들 수야 늘리면 늘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살갗을 뚫고 뼈마디 마다 스며들어 부르르 떨게 만드는 독하디 독한 충고, 그러나 흉터가 남지 않도록 두툼한 애정을 상처 위에 발라주는 그런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9-02-20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 축!

이리스 2009-02-20 10:10   좋아요 0 | URL
경축 우리사랑! 아니 경축 우리 우정! 인거죠 ㅎㅎ

프레이야 2009-02-2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듯하시겠어요.^^

이리스 2009-02-20 10:12   좋아요 0 | URL
^_^;;

라로 2009-02-20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같은 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은데,,,,
암튼 부럽사옵니다.^^;;;

이리스 2009-02-20 10:12   좋아요 0 | URL
그치만 나이 값을 하긴 해야해서 이것도 참 힘드네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2-2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벗과 행복한 술자리 정말 부럽습니다~~

이리스 2009-02-20 10:13   좋아요 0 | URL
네네, 물자리라도 상관없어서 다행이었죠. ^^;

울보 2009-02-2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으시겠어요
저에게는 언제 저런 친구가 생길까요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친구 사귀기가 더 힘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ㅎㅎ

이리스 2009-02-20 10:13   좋아요 0 | URL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어서 그런것 아닐까요?
울보님에게는 류가.. 좋은 친구!!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