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사 년 전 여름이가 문갑 위에 놓인 텔레비전을 밀어서  떨어뜨렸다. 브라운관이 고장났고 수리비나 새로 사는 거나 비용이 비슷하다고 그랬다. 당시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가을에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내 처지에서 십 원 한 푼도 아쉬웠고 텔레비전을 새로 살 돈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처음 텔레비전이 없애고 나니 금단현상으로 제일 괴로와하는 사람은 의외로 가을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켜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야 겨우 텔레비전을 끄는 가을은 드라마도 좋아했고 스포츠도 좋아했기에 텔레비전이 없는 현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제일 많이 걸렸다. 나는 종종 농담으로 손이 떨리고 숨이 가쁘지는 않느냐며 가을을 놀리곤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마냥 좋던 아이들은 텔레비전이야 있건 없건 상관없었고 나 역시 평소에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았기에 우리 가족은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제일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냐 하면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유월이었다. 때마침 기말고사기간이라서 가을은 어쩔 수 없다치지만 온 나라가 들썩거리는 그 흥분의 도가니 속에 살면서 텔레비전 없이 지낸다는 건 고문이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을 구원한 건 때마침 불어닥친  응원열기였다. 서울의 광화문에서처럼 여기서도 네거리나 공원에서 함께 경기를 보며 응원을 했었는데 아이들과 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예 공원과 네거리에 도시락 싸가지고 나가서 살았다.

어쨌든 텔레비전이 없어서 좋은 유익 한두서너가지를 대자면 우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늦어도 열시 이르면 여덟시만  지나면 잠자리에 든다. 저녁 먹고 실컷 놀고 나도 아홉시고 그 시간이 지나면  지쳐서라도(?) 잘 수밖에 없다. 덕분에 우리 봄&여름은 여섯 시쯤이면 일어나서 아침 달라고 그런다.

그리고 또 좋은 점은 가족끼리 함께 할 시간이 굉장히 많아진다는 거다. 저녁 먹고 나면 대부분의 가정에선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기 일쑤겠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는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러 나가기도 하고 가까운 뒷산에 산책도 가고 옥상에 있는 채소랑 화분들 돌보기도 한다.

친정 동생들이 때마다 사다주는 보드게임에 눈을 뜬 것도 다 텔레비전이 없는 덕분이었다.보드 게임에 아이스크림을 걸면 다들 정신을 못차린다. 있는 게 시간이니 퍼즐맞추기도 우리가 즐기는 놀이다. 물론 맘만 먹으면 책 읽는 시간은 무한정 확보된다.

이런 유익들을 이야기하며 텔레비전을 없애보라고 여러 친구들에게 권해봤지만 아직 따라하는 사람은 없다. 좋은 점이 귀에 솔깃하긴 하지만 막상 텔레비전 없이 사는 게 왠지 두려운 모양이다. 우리 가족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누가 공짜로 텔레비전 준대도 들여놓기가 싫다.

텔레비전을 끈 우리 가족이 하는 일들을 하나 둘 써 보려고 오늘 카테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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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6-14 22:39   좋아요 0 | URL
어머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도 텔레비젼은 거의 안 보고 사는데 텔레비전 좀 없앴으면 좋겠어요.

딸기엄마 2005-06-15 08:38   좋아요 0 | URL
진주님은 텔레비전이랑 안친하실 줄 알았어요~ ^^

비로그인 2005-06-16 11:44   좋아요 0 | URL
텔레비전 없애는 거 저도 소원인디.....
그럼 아마 우리 남편은 금단현상으로 죽을거야요ㅠ.ㅠ

딸기엄마 2005-06-16 12:06   좋아요 0 | URL
안죽고 살아난 저희 집 남편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