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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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가 만들어 내는 감정들은 마음이 외부적인 요인과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물론 그 외부적인 요인들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변하기 쉽다.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있음’의 상태이다. 감정은 반대되는 것들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흐려질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사랑, 기쁨, 평화로서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온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다.

-앎은 받아들임이 뒤따라야 한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앎을 다시 흐려 놓을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의 일부이다. 있는 그것에 반론을 던질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떠다니는 다양한 사상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행복인 ‘순수한 있음’의 기쁨은 형상, 소유, 성취, 사람 또는 사건을 통해 오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의 형상 없는 차원으로부터, 의식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본래의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공간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이, 또한 고요 없이는 소리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존재의 중요한 본질인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차원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있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순수한 있음’은 사물의 존재에 앞선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이고 내용물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생명(삶)의 전면에 있고, ‘순수한 있음’은 이른바 생명(삶)의 배경에 있다.

-우리의 행성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이다. 공간 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이제 당신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당신은 창조의 춤에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나를 만족시켜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것들을 줄 수도 없으며, 그런 기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런 모든 고통들은 형상의 과대평가와 내적 공간의 차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당신 삶에 내적 공간의 차원이 생길 때, 감각의 즐거움 속에 실종되는 일도 집착함도 없이, 즉 이 세상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이다. (...) 그것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공간이다. 고요이며, ‘순수한 있음’의 달콤함인 동시에 이런 언어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언어는 다만 그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직접 느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소리, 풍경, 감촉 같은 어떤 단순한 것의 가치를 알아볼 때, 아름다움을 볼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느낄 때, 그 경험의 원천이며 배경인 넓은 내적 공간을 감지해 보라.

-그렇다면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신이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대상을 왜곡한 것이고 그것을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든 것이 된다. 전통적으로는 ‘영혼’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안다’는 것은 모두 주체와 객체, 아는 자와 앎의 대상이 있는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의 일이다. 주체인 나, 그 ‘아는 자’ 없이는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지만 그 ‘아는 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형상만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형상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형상 없는 차원은 형상들의 세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빛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나의 ‘순수한 있음’의 삶이다.

-생각의 흐름에 틈을 만듦으로써 내적 공간을 발견하라. 그 틈이 없으면 당신의 생각은 어떤 창조적인 불꽃도 없는 반복적이고 활기 없는 것이 된다. 이 행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이다. 그 틈의 시간적 길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몇 초만이라도 충분하다. 그 틈은 당신 쪽에서의 어떤 노력 없이도 저절로 점점 길어질 것이다. 시간적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틈을 자주 가져와서 당신의 매일의 활동들과 생각 흐름의 여기저기에 그 틈이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내적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의식을 탄생시키는 한 방법이다. (...)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내적 공간은 또한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필요성을 내려놓을 때마다 일어난다. 그 필요성은 에고의 필요성이다. 그것은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한 행동 패턴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내적 공간이 나타난다.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에고에게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깨어 있다면 이런 무의식적인 패턴들 중 몇 가지를 자신 안에서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

*자신의 문제나 병에 대해 말하거나 소란을 피움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았고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더 신경 쓰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자기 에고의 반영이나 에고 강화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소유물, 지식, 외모, 지위, 신체적 힘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찬 반응을 통해 에고를 일시적으로 부풀리는 것.

*일들을 개인적으로 해석해 감정이 상하는 것.

*마음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으로 만드는 것.

*주목받기를 원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

일단 이러한 행동 패턴을 자신 안에서 탐지했다면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패턴을 버리면 어떤 느낌이 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그 패턴을 중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고요와 마주칠 때마다 그 고요를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와 에고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고요일 수도 있고, 이른 아침 방 안에 깃든 고요일 수도 있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놓인 조용한 틈일 수도 있다. (...) 고요는 형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통해서는 고요를 알아차릴 수 없다. 생각은 형태이다. 고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고요하게 멈추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보다 더 본질적으로, 더 깊이, 자기 자신일 때는 없다. (...)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개인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형상을 일시적으로 취하기 전의 그 당신이다. 또한 그 형상이 소멸했을 때에도 있게 될 그 당신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일시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당신이다.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의식이다.

-깨어남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깨어남이나 깨달음을 가치 있는 소유물로 추가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려는 에고의 시도가 될 것이다. 깨어남 대신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덧붙이거나, 깨어 있는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은 이럴 것이라는 정신적 이미지를 추가하고서, 그 이미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가 연기하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본질은 의식입니다. 의식, 즉 당신이 생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그 본질과 본성을 망각할 때 의식은 생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고의 주된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 감정적 구조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구조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대응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의 단순한 기쁨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대용품으로 쾌락과 때로는 고통까지 추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존재를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성공도 지나가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성취하든 당신은 곧 다시 불행해질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문제나 딜레마가 생겨 당신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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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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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일단 일정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면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도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이 되기를 원하는가? 현재의 순간은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하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순간을 친구로 삼으려는 결정은 에고의 종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현재의 순간과 사이좋게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에고의 본성 자체가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 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이 시간에 얽매여 기능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가장 나쁜 경우는, 이것 또한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거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난 일에 욕을 퍼부을 때, 혹은 마음속 대화가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이루어져 있을 때, 비난과 남 탓으로 흘러넘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미 그것인 것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삶을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삶도 “싸움을 원하면 싸우게 해 주지.”라고 응답한다.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혹시 그것을 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현재의 순간만이 당신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삶은 ‘지금’과 분리시킬 수 없으므로, 그 질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인가?”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시간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는 것은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현재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면 삶의 수직축 차원, 깊이의 차원이 열린다. 그리고 그 수직축 차원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무한의 가치를 가진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파묻혀 있었을 무엇인가가 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의 제거이다. 심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에고의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직후의 실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에고는 현재의 순간과 우호적이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어떤 것도 에고를 긴 시간 만족시킬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혹은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지금’이 취하는 모습들이다. 당신이 내면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한, 그 모습들은, 바꿔 말해 세상은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그 장벽은 모습(형상)을 초월한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형상 없는 ‘한 생명’으로부터 당신을 분리시킨다. 형상 없는 ‘한 생명’이 당신의 본래 존재이다. ‘지금’이 취하는 형상에 내면으로부터 긍정을 말하면, 그 형상이 형상 없는 세계로의 문이 된다. 세상과 신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다. / ‘한 생명’이 이 순간에 취하고 있는 모습(형상)에 반발하고 ‘지금’을 수단, 장애물, 적으로 여기면 형상으로서의 정체성, 즉 에고를 강화하게 된다.

-형상에 대한 무저항을 통해 당신 안의 형상을 초월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현존(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서 나타난다. 단기간에 소멸하는 형상 정체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침묵의 힘이다. 그리고 형상 세계의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당신 자신이다.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존재와 행위가 연결됩니다.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은 에고를 무효화시키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특별히 잘하게 될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에 온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신의 행위는 의식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화번호부를 넘기거나 방 안을 걷는 일처럼 가장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입니다. 방 안을 걷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걷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됩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하는 일들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당신의 행위에는 영적인 힘이 충만해집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하는 일 자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어떻게 하는가’만 변할 것입니다. 당신의 주된 목적은 이제 당신의 일 속으로 의식이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무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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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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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체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 속에서 살아가는 반자립적인 에너지 형태로, 감정으로 만들어진 독립체이다. 이 고통체는 교활한 동물처럼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원시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성을 주로 자신이 살아남는 데 활용한다. 모든 생명 형태와 마찬가지로 고통체에게도 주기적으로 먹이가,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신을 새로 보충하는 데 필요한 그 먹이는 자신의 에너지와 호환이 되는 에너지, 다시 말해 비슷한 주파수로 진동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은 무엇이든 고통체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무거운 고통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우는 활동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 이상일 수도 있으며, 처음에는 그 활동도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동에 흐르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적과 분쟁을 필요로 하는 무의식 때문에 반대파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활동은 대개 자기 조직 안에서 적을 만들면서 끝이 난다. 어디를 가든 그들은 기분 나쁠 이유를 찾으며, 그들의 고통체는 정확히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통체로부터의 자유는 먼저 자신이 고통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후에, 더 중요한 것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는 능력, 충분히 깨어 있는 능력이다. 그럼으로써 고통체가 활성화될 때 부정적인 감정이 심하게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자신 안에 있는 고통체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으로만 느낄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고통체를 인식하는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고통체가 활성화되었을 때 그 감정이 생각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바꿔 놓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모든 불행이 고통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불행도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조건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불행을 창조하는 일도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저항이 사라지면 삶 그 자체가 당신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고통체의 불행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불균형하다. 말하자면 과잉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고통체에 사로잡힌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무거운 고통체를 지닌 사람은 동요하고 분노하고 상처받고 슬퍼하고 두려워할 이유를 쉽게 발견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가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이 심한 불행의 명백한 원인이 된다. 물론 그것들은 불행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단지 방아쇠에 불과하다. 축적된 오랜 감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 감정이 머릿속으로 옮겨 가 증폭되어서, 에고에 지배되는 마음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고통체와 에고는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양쪽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고통체를 촉발시키는 사건과 상황은 몹시 감정적인 에고의 화면을 통해 해석되고 반응을 일으킨다. 즉, 사건과 상황의 중요성이 완전히 왜곡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과거의 감정적인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보고 경험하는 것은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지 않고 당신 자신 안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반응을 통해 더욱 확대시킨다. 이 반응과 확대야말로 고통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통체는 그것을 먹고 산다. 무거운 고통체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왜곡된 해석, 즉 몹시 감정적인 ‘이야기’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종종 불가능하다. 이야기에 담긴 감정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뚫기 어려워진다. 이때 그 이야기는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고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생각과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 속에 완전히 갇혀 버리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영화와 꿈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활동적인 고통체를 가진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반응하지 않기 위해 매우 강하게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체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갑작스러운 깨어남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으며, 그녀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인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생각도, 고통체의 먹이가 되는 감정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힘은 개입하지 않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선에서는 이 관찰의 체험을 ‘초견성’이라고 부른다. ‘초견성’이라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존재함이며, 머릿속 목소리와 사고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그 생각이 몸속에 일으키는 감정으로부터 잠깐 동안 걸어 나오는 경험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내면에 넓은 공간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생각의 소음과 감정의 혼란이 있던 곳에.

-자신의 고통체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어떤 상황과 타인의 말과 행동이 고통체를 가장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는지도 금방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계기가 일어날 때 그것의 정체를 즉각 알아차릴 것이고, 한층 더 깨어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1, 2초 만에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즉 고통체의 등장을 알아차릴 것이다. 의식적인 ‘현존’이 가능하면 그 고통체와 동일화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체에게 접수당해 머릿속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고 끝이 난다.

-고통체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리고 고통체를 고통체로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고통체가 당신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동일화되는 대상은 무엇이든 에고로 바뀐다.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화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며, 고통체 또한 먹이를 얻고 자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고를 필요로 한다.

-다시 또다시 반복해 과거를 살게 만들고 당신을 무의식 상태 속에 계속 가둬 두는 것은 고통체가 아니라 고통체와의 동일화이다. 따라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고통체와의 동일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는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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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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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나’에는 원천적인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것이 에고이다. (...) 시간과 공간의 실체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환상의 자아의식(외부세계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기에 대한 느낌)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그 환상의 자아가 그 후의 모든 해석의 토대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오해의 토대가 되고, 모든 사고 과정, 상호작용, 관계의 근본이 된다. 당신의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이다.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자신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에고는 비교를 통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짓는다. 모두가 대저택에 살고 모두가 부자라면 대저택도 재산도 자신의 자아의식을 강화하는 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자신의 부를 포기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해,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누구인가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된다. 에고의 자아 존중감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에 매여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자아의식을 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 즉 소유의 개념은 에고가 자신에게 견고함과 영속성을 부여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허구이다. 그러나 소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깊은 내면에는 또 다른 더 강한 충동이 있다. ‘더 많이’를 향한 욕구가 그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에고도 ‘더 많이’를 향한 욕망 없이는 오랜 기간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를 훨씬 활력 있게 만드는 것은 소유보다도 오히려 욕망이다. 에고는 ‘갖고 싶어하기’보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소유가 주는 얕은 만족감은 언제나 ‘더 많이’ 원하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더 많이’ 바라는, 다시 말해 동일화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심리적 욕구이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중독적인 욕구이다.

 

-에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겨진 안건을 가지고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불충분함과 결핍감이 있으며, 어떻게든 그것을 채워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지만, 어쩌다 성공해도 그 만족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에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고 고뇌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유명한 팝송 <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satisfaction)>(롤링스톤즈가 부른 곡)는 다름 아닌 에고의 노래이다.

 

​-그러면 자신의 소유물에 자부심을 갖거나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해 분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부심, 돋보이려는 욕구, ‘남보다 더 많이’를 통해 자아가 확실히 강화되고 ‘남보다 더 적게’에 의해 위축되는 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에고일 뿐이다. 에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단지 무의식일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그 너머로 가기 시작한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 안에서 에고의 행위를 감지하게 되면 미소 지으라. 때로는 소리 내어 웃어도 좋다. 인류는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에고는 당신이 아니다. 에고를 개인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더 에고일 뿐이다.

 

​-‘나를’, ‘나에게’, ‘나의 것’, ‘더 많이’, ‘원한다’, ‘필요하다’,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등의 생각 형태는 에고의 내용물이 아니라 구조에 속한 문제이다. 내용물은 상호교환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 생각 형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은 그 생각 형태들이 하는 말을 믿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숙명적으로 그 무의식적인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계속해서 찾으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생각 형태가 작용하고 있는 한, 어떤 소유물, 장소, 사람, 조건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들 이외에 동일화의 또 다른 기본 형태는 ‘나의’ 육체와의 동일화이다. (...) 완벽에 가까운 훌륭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만 육체와 자신을 동등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문제가 있는’ 육체와도 쉽게 동일화되고 육체의 불완전함, 질병,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자, 환자라는 관념적 정체성을 늘 확인시켜 주는 의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무의식중에 그 병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에고가 동일화되는 또 다른 생각 형태 중 하나이다. 에고는 일단 동일화될 대상을 발견하면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드물지 않은 경우에, 더 강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에고는 병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일으키기도 한다.

 

-에고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 즉 모든 기억, 모든 해석, 의견, 관점, 반응, 감정 속에 ‘나(에고)’라는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의식이다. 당연히 당신의 생각, 다시 말해 당신 마음속 내용물은 성장 배경, 문화, 가족 배경 등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 모든 마음 활동의 중심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생각들, 감정들, 반응 형태 등 당신이 가장 강하게 동일화되어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독립체가 에고 그 자체이다.

 

​-에고는 동일화와 분리를 먹고 산다. 당신이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만들어 낸 자아, 즉 에고를 통해 살아간다면, 그 정체성의 기반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본래 변화하기 쉽고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그 반대 생각인 ‘남’이 필요하다. 개념적 ‘나’는 개념적 ‘남’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남’은 내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 가장 확실한 ‘남’이 된다. 에고가 지배하는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에고의 강박적인 습관이 놓여 있다. (...)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잘못’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오해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이 옳고 우월함을 느끼도록 조건 지어진 자기 마음의 투영일 수가 있다. 잘못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잘못을 확대하는 경우도 흔하다.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는 것이다.

 

-불만은 에고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모든 불만은 마음이 만든, 당신이 완전히 믿고 있는 작은 이야기이다. 불만을 큰 소리로 말하든 단지 생각 속에서만 하든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면서 불만만으로 즐겁게 생존하는 에고도 있다. 그런 에고의 포로가 되면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습관이 되고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든, 혹은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것은 이 패턴의 주된 부분이다. 욕하기는 이런 분류표 붙이기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을 이기려는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 폭력이 있다.

 

-분함은 불만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일이며, 이것은 에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태 준다. 분함은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부정직, 진실성 부족, 현재 그들이 하고 있는 짓과 과거에 한 짓,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해서 분개한다. 에고는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지 않고 그것을 아예 그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당신 안의 무의식, 즉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배경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전면에는 그 목소리, 즉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에고로부터 해방되고,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라, 단지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집단적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마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대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에고를 꿰뚫어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온전한 정신을 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에고의 깊은 곳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 환영의 자아를 강화하려는 강한 무의식적 충동이 있다. 그 자기 이미지, 환영의 자아는 생각이 지배권을 쥐고서 순수 존재, 원천, 신과 연결되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기쁨을 흐리게 만들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생각은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큰 저주이다.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든 에고의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남들과 별개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즉, 대립하는 상대방, 적이 필요하다.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환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만약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의해 일어나지만, 깊은 바닥에서는 어떤 형상도 영원하지 않고 모두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자신감 있어 보여도 에고 주변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보다 더 많이 갖거나 더 많이 알거나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자신이 ‘더 적다’는 느낌이 상대방에 비해 상상 속의 자아의식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때 에고는 상대방의 소유물, 지식, 능력의 가치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하찮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떤 역할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기획된 것들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산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란 결국 일종의 심리적 에너지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을 외부에서 찾는다. 에고가 찾는 것은 형상을 초월한 깨어 있는 의식, 즉 ‘현존’이 아니라 인정, 칭찬, 찬사 같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어떤 형상 속의 관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접촉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따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당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당신 안의 에고이다.

 

​-스스로에게 자아의식을 주기 위해 개념적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짓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면 혼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되는 대신,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야 한다.

 

-에고는 현실을 원망하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타타타(여여함), ‘삶의 본래 그러함’이라고 불렀다. ‘삶의 본래 그러함’이란 이 순간의 본래 그러함일 뿐이다. 그 본래 그러함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에고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만들어지고, 에고는 그것 때문에 번창한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불행을 에고는 사랑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자신도 타인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자신이 지상에 지옥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는 채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무의식적인 삶의 본질이다. 완전히 에고의 지배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에고가 지배하는 모든 동기는 때로는 에고가 작용하는 본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영리하게 변장을 하고 있지만, 자기 강화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통은 당신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원인은 형상과의 동일화이지만, 그 고통이 형상과의 동일화를 무너뜨린다. 고통의 많은 부분은 에고에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고통이 에고를 부순다. 단, 고통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을 때만 그 일이 가능하다. (...) 고통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이 그것이다. 십자가 위의 사람이 그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그는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다. 당신이 고통에 저항하는 한,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은 더디게 진행된다. 그 저항이 불태워 버려야 할 에고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그 과정이 가속화된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이와 부모 등 다른 누군가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고통의 불꽃은 의식의 빛이 된다. (...) 에고는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 생각이 당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진리의 왜곡이며,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이다. 고통을 초월하려면 고통에게 먼저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당신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라. 그래도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에고는 왜 역할을 연기하는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은 한 가지 가정,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 한 가지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 생각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충분한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있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이 얻을 필요가 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인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 심리적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생명’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속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존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나는 언젠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에고이다. 에고로부터의 자유는 사실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깨어 있는 ‘바라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 순간 생각으로부터 알아차림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 에고의 영리함보다 훨씬 위대한 지성이 당신 삶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 알아차림을 통해 감정과 생각마저도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본래부터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그곳에는 자신도 없다. 다만 인간의 감정, 인간의 생각만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 한 묶음의 생각과 감정들에 지나지 않는 당신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되고, 더 이상 의식의 전면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당신 정체성의 기초가 아니다. 당신은 ‘현존’의 빛이 되고, 생각과 감정보다 앞선 더 깊은 알아차림이 된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은 당신을 흔들어 놓거나 마음을 방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에 흔들리고 마음이 방해받는가를 기준으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 당신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는 당신이 말하거나 믿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행동과 반응이 당신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것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좋다. ‘나를 흔들어 놓고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만약 작은 것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즉, 작다. 그것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작은 것들이다. 모든 것들이 덧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일,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 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 그렇다면 내용물 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내용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바로 의식이라는 내적 공간이 있다.

 

-영적인 추구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습을 바꾼 에고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를 제거하는 것이 미래의 목적이 되면, ‘자기’를 제거하려는 그 노력조차 ‘자기’를 더 커지게 하려는 위장된 추구일 가능성이 있다.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을 여는 열쇠이다. 그 힘에 의해 의식, 즉 영혼이 형상에 갇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무엇이 존재하든 무엇이 일어나든, 형상에 대해 마음속에서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상의 절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항하면 당신 자신의 형상 정체성인 에고를 포함해 세상과 세상의 일들이 실제보다도 더 현실성 있어지고, 더 견고하고 더 영속적으로 보인다. 세상과 에고에게 무게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상들의 놀이를 생존 경쟁으로 오해하고, 그 오해가 당신의 인식일 때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된다.

 

​-강력한 영적 실천 중 하나는 에고의 작아짐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작아진 채 두는 것이다. 때때로 실행해 볼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받거나 비난받거나 험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박과 자기방어를 시도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에 대해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실제로 어떤 것도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아짐’으로써 더 커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자신의 형상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으면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즉 마음속 자기 이미지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다.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그리고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 지우는 행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천하의 깊은 골짜기가 되라.”고 노자의 『도덕경』은 가르친다.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너에게 흘러들어 올 것”이라고.

 

-저항하지 않고(무저항), 판단하지 않고(무판단), 집착하지 않는 것(무집착)—이 세 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저항을 멈춤으로써 그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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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 fsn 스트리트 에프에스엔 : 길 위에서 당신을 만나다
남현범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옷단장에 나태한 독자를 참회하게 만드는 패션 구루에서부터 전의로 충만한 패션 테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길 위에서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옷 입는 데 있어 그나마 어떤 방침이라고 한다면 그저 결사적으로 튀지 않음으로써 완벽한 익명의 개인이 되고자 하는 게 전부인, 옷=보호색인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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