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는가?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삶의 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이다. 삶의 놀이는 다른 곳에서 펼쳐질 수 없다. 현재의 순간과 화해하면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라. 자신에게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삶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하는지를. 삶의 예술에 대한 비밀, 모든 성공과 행복의 비밀을 전하는 세 단어가 있다. ‘삶과 하나가 되기’이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현재의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삶은 춤추는 자이고, 당신은 그 춤이다.

-일단 일정 수준의 의식에 도달하면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도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이 되기를 원하는가? 현재의 순간은 삶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일단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하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순간을 친구로 삼으려는 결정은 에고의 종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현재의 순간과 사이좋게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에고의 본성 자체가 현재의 순간을 무시하고, 저항하고, 가치를 깎아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에고가 강할수록 삶은 한층 더 시간에 지배된다. /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거의 모든 생각이 과거 또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 되어 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과거에 의해 결정되며, 자기실현을 미래에 의존한다. 두려움, 불안, 기대, 후회, 죄책감, 분노 등은 의식이 시간에 얽매여 기능장애 상태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가장 나쁜 경우는, 이것 또한 매우 흔한데, 현재의 순간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싫거나, 상황이 불만스럽거나,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일어난 일에 욕을 퍼부을 때, 혹은 마음속 대화가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이루어져 있을 때, 비난과 남 탓으로 흘러넘칠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지금’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미 그것인 것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삶을 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삶도 “싸움을 원하면 싸우게 해 주지.”라고 응답한다.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현재의 순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장애물로 보고 있는가? 나는 혹시 그것을 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현재의 순간만이 당신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또한 삶은 ‘지금’과 분리시킬 수 없으므로, 그 질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인가?”

-시간은 삶의 수평적 차원, 현실의 표면층이다. 그러나 삶에는 깊이라는 수직적 차원도 있다. 수직적 차원에는 오직 ‘현재의 순간’이라는 입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시간을 제거해야 한다.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는 것은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영적 수행이다.

 

-현재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면 삶의 수직축 차원, 깊이의 차원이 열린다. 그리고 그 수직축 차원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무한의 가치를 가진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파묻혀 있었을 무엇인가가 이 세상 속으로 나온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인 시간의 제거이다. 심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에고의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에고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의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직후의 실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에고는 현재의 순간과 우호적이 될 수가 없다. 게다가 어떤 것도 에고를 긴 시간 만족시킬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혹은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지금’이 취하는 모습들이다. 당신이 내면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한, 그 모습들은, 바꿔 말해 세상은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이 된다. 그 장벽은 모습(형상)을 초월한 당신 자신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하고, 형상 없는 ‘한 생명’으로부터 당신을 분리시킨다. 형상 없는 ‘한 생명’이 당신의 본래 존재이다. ‘지금’이 취하는 형상에 내면으로부터 긍정을 말하면, 그 형상이 형상 없는 세계로의 문이 된다. 세상과 신 사이의 분리가 사라진다. / ‘한 생명’이 이 순간에 취하고 있는 모습(형상)에 반발하고 ‘지금’을 수단, 장애물, 적으로 여기면 형상으로서의 정체성, 즉 에고를 강화하게 된다.

-형상에 대한 무저항을 통해 당신 안의 형상을 초월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를 아우르는 ‘현존(이 순간에 존재함)’으로서 나타난다. 단기간에 소멸하는 형상 정체성보다 훨씬 더 위대한 침묵의 힘이다. 그리고 형상 세계의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당신 자신이다.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존재와 행위가 연결됩니다.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은 에고를 무효화시키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당신은 특별히 잘하게 될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에 온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신의 행위는 의식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전화번호부를 넘기거나 방 안을 걷는 일처럼 가장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입니다. 방 안을 걷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걷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됩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하는 일들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당신의 행위에는 영적인 힘이 충만해집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하는 일 자체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어떻게 하는가’만 변할 것입니다. 당신의 주된 목적은 이제 당신의 일 속으로 의식이 흘러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무엇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