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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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가 만들어 내는 감정들은 마음이 외부적인 요인과 자신을 동일화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물론 그 외부적인 요인들은 불안정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변하기 쉽다.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은 사실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있음’의 상태이다. 감정은 반대되는 것들의 세계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흐려질 수는 있어도 반대의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사랑, 기쁨, 평화로서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온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다.

-앎은 받아들임이 뒤따라야 한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앎을 다시 흐려 놓을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의 일부이다. 있는 그것에 반론을 던질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깊이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떠다니는 다양한 사상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미아가 되는 대신 ‘순수한 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유일하게 진정한 행복인 ‘순수한 있음’의 기쁨은 형상, 소유, 성취, 사람 또는 사건을 통해 오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밖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의 형상 없는 차원으로부터, 의식 그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며, 따라서 본래의 당신 자신과 하나이다.

-공간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이, 또한 고요 없이는 소리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존재의 중요한 본질인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차원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있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순수한 있음’은 사물의 존재에 앞선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이고 내용물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생명(삶)의 전면에 있고, ‘순수한 있음’은 이른바 생명(삶)의 배경에 있다.

-우리의 행성을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인류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대상 의식을 공간 의식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간 의식의 등장이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이다. 공간 의식은 사물을 의식하는 것—언제나 감각 지각, 생각, 감정의 순서로 진행되는—과 동시에 그 밑바탕에 알아차림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이제 당신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당신은 창조의 춤에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나를 만족시켜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것들을 줄 수도 없으며, 그런 기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런 모든 고통들은 형상의 과대평가와 내적 공간의 차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당신 삶에 내적 공간의 차원이 생길 때, 감각의 즐거움 속에 실종되는 일도 집착함도 없이, 즉 이 세상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내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은 그것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물건과 경험을 찾듯이 찾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영적 자각과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딜레마이다. (...) 그것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공간이다. 고요이며, ‘순수한 있음’의 달콤함인 동시에 이런 언어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언어는 다만 그것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 안에서 직접 느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소리, 풍경, 감촉 같은 어떤 단순한 것의 가치를 알아볼 때, 아름다움을 볼 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느낄 때, 그 경험의 원천이며 배경인 넓은 내적 공간을 감지해 보라.

-그렇다면 ‘경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당신이다. 그럼 당신은 누구인가? 의식이다. 의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대상을 왜곡한 것이고 그것을 또 다른 대상으로 만든 것이 된다. 전통적으로는 ‘영혼’이라 불리는 이 ‘의식’은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안다’는 것은 모두 주체와 객체, 아는 자와 앎의 대상이 있는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의 일이다. 주체인 나, 그 ‘아는 자’ 없이는 어떤 것도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지만 그 ‘아는 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형상만이 앎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이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형상의 세계도 있을 수 없다. 형상 없는 차원은 형상들의 세계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빛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이 나의 ‘순수한 있음’의 삶이다.

-생각의 흐름에 틈을 만듦으로써 내적 공간을 발견하라. 그 틈이 없으면 당신의 생각은 어떤 창조적인 불꽃도 없는 반복적이고 활기 없는 것이 된다. 이 행성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이다. 그 틈의 시간적 길이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몇 초만이라도 충분하다. 그 틈은 당신 쪽에서의 어떤 노력 없이도 저절로 점점 길어질 것이다. 시간적 길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 틈을 자주 가져와서 당신의 매일의 활동들과 생각 흐름의 여기저기에 그 틈이 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는 것은 생각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내적 공간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의식을 탄생시키는 한 방법이다. (...) 호흡은 당신이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어남이고, 당신은 그것을 관찰할 뿐이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난다. 몸 안의 지성이 그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내적 공간은 또한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필요성을 내려놓을 때마다 일어난다. 그 필요성은 에고의 필요성이다. 그것은 진정한 필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러한 행동 패턴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내적 공간이 나타난다.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에고에게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충분히 깨어 있다면 이런 무의식적인 패턴들 중 몇 가지를 자신 안에서 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

*자신의 문제나 병에 대해 말하거나 소란을 피움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았고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굳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더 신경 쓰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자기 에고의 반영이나 에고 강화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소유물, 지식, 외모, 지위, 신체적 힘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찬 반응을 통해 에고를 일시적으로 부풀리는 것.

*일들을 개인적으로 해석해 감정이 상하는 것.

*마음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으로 만드는 것.

*주목받기를 원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

일단 이러한 행동 패턴을 자신 안에서 탐지했다면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패턴을 버리면 어떤 느낌이 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찰하는 것이다. 단지 그 패턴을 중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서 고요와 마주칠 때마다 그 고요를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와 에고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세계에 널리 스며들어 있는 고요일 수도 있고, 이른 아침 방 안에 깃든 고요일 수도 있고, 소리와 소리 사이에 놓인 조용한 틈일 수도 있다. (...) 고요는 형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통해서는 고요를 알아차릴 수 없다. 생각은 형태이다. 고요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고요하게 멈추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춘다는 것은 생각의 방해 없이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보다 더 본질적으로, 더 깊이, 자기 자신일 때는 없다. (...)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개인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형상을 일시적으로 취하기 전의 그 당신이다. 또한 그 형상이 소멸했을 때에도 있게 될 그 당신이다. 고요하게 멈출 때 당신은 일시적인 존재 너머에 있는 당신이다. 조건에 물들지 않고, 형상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인 의식이다.

-깨어남에 대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도 그것은 깨어남이나 깨달음을 가치 있는 소유물로 추가함으로써 자신을 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려는 에고의 시도가 될 것이다. 깨어남 대신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마음에 덧붙이거나, 깨어 있는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은 이럴 것이라는 정신적 이미지를 추가하고서, 그 이미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가 연기하는 또 하나의 무의식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본질은 의식입니다. 의식, 즉 당신이 생각과 완전히 동일화되어 그 본질과 본성을 망각할 때 의식은 생각 속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에고의 주된 동기인 욕망이나 두려움 같은 정신적, 감정적 구조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 구조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또한 행위와 사건에 대한 반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곳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생각, 모든 욕망이나 두려움, 모든 행위와 대응이 허구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허구의 자아는 ‘순수한 있음’의 단순한 기쁨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 대용품으로 쾌락과 때로는 고통까지 추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래 존재를 잃은 상태에서는 어떤 성공도 지나가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성취하든 당신은 곧 다시 불행해질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문제나 딜레마가 생겨 당신의 관심을 모두 사로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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