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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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체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 속에서 살아가는 반자립적인 에너지 형태로, 감정으로 만들어진 독립체이다. 이 고통체는 교활한 동물처럼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원시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성을 주로 자신이 살아남는 데 활용한다. 모든 생명 형태와 마찬가지로 고통체에게도 주기적으로 먹이가,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신을 새로 보충하는 데 필요한 그 먹이는 자신의 에너지와 호환이 되는 에너지, 다시 말해 비슷한 주파수로 진동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은 무엇이든 고통체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무거운 고통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상을 위해 싸우는 활동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 이상일 수도 있으며, 처음에는 그 활동도 성공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동에 흐르는 부정적인 에너지와, 적과 분쟁을 필요로 하는 무의식 때문에 반대파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활동은 대개 자기 조직 안에서 적을 만들면서 끝이 난다. 어디를 가든 그들은 기분 나쁠 이유를 찾으며, 그들의 고통체는 정확히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통체로부터의 자유는 먼저 자신이 고통체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후에, 더 중요한 것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는 능력, 충분히 깨어 있는 능력이다. 그럼으로써 고통체가 활성화될 때 부정적인 감정이 심하게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끼고 자신 안에 있는 고통체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무의식적으로만 느낄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고통체를 인식하는가? 충분히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고통체가 활성화되었을 때 그 감정이 생각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바꿔 놓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모든 불행이 고통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불행도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조건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불행을 창조하는 일도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저항이 사라지면 삶 그 자체가 당신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고통체의 불행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불균형하다. 말하자면 과잉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고통체에 사로잡힌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무거운 고통체를 지닌 사람은 동요하고 분노하고 상처받고 슬퍼하고 두려워할 이유를 쉽게 발견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가거나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이 심한 불행의 명백한 원인이 된다. 물론 그것들은 불행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단지 방아쇠에 불과하다. 축적된 오랜 감정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 감정이 머릿속으로 옮겨 가 증폭되어서, 에고에 지배되는 마음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고통체와 에고는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양쪽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고통체를 촉발시키는 사건과 상황은 몹시 감정적인 에고의 화면을 통해 해석되고 반응을 일으킨다. 즉, 사건과 상황의 중요성이 완전히 왜곡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과거의 감정적인 눈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보고 경험하는 것은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지 않고 당신 자신 안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의 사건과 상황 속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반응을 통해 더욱 확대시킨다. 이 반응과 확대야말로 고통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통체는 그것을 먹고 산다. 무거운 고통체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왜곡된 해석, 즉 몹시 감정적인 ‘이야기’의 바깥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종종 불가능하다. 이야기에 담긴 감정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뚫기 어려워진다. 이때 그 이야기는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고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생각과 그것에 동반되는 감정 속에 완전히 갇혀 버리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바깥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영화와 꿈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활동적인 고통체를 가진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반응하지 않기 위해 매우 강하게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체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갑작스러운 깨어남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으며, 그녀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인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먹이가 되는 생각도, 고통체의 먹이가 되는 감정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힘은 개입하지 않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선에서는 이 관찰의 체험을 ‘초견성’이라고 부른다. ‘초견성’이라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존재함이며, 머릿속 목소리와 사고 과정으로부터, 그리고 그 생각이 몸속에 일으키는 감정으로부터 잠깐 동안 걸어 나오는 경험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내면에 넓은 공간이 생긴다. 이전까지는 생각의 소음과 감정의 혼란이 있던 곳에.

-자신의 고통체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어떤 상황과 타인의 말과 행동이 고통체를 가장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는지도 금방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계기가 일어날 때 그것의 정체를 즉각 알아차릴 것이고, 한층 더 깨어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1, 2초 만에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즉 고통체의 등장을 알아차릴 것이다. 의식적인 ‘현존’이 가능하면 그 고통체와 동일화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체에게 접수당해 머릿속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고 끝이 난다.

-고통체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리고 고통체를 고통체로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고통체가 당신 에고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동일화되는 대상은 무엇이든 에고로 바뀐다. 고통체는 에고가 동일화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 중 하나이며, 고통체 또한 먹이를 얻고 자신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고를 필요로 한다.

-다시 또다시 반복해 과거를 살게 만들고 당신을 무의식 상태 속에 계속 가둬 두는 것은 고통체가 아니라 고통체와의 동일화이다. 따라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고통체와의 동일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는 얼마나 오래 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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