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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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일상적인 용법에서 ‘나’에는 원천적인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것이 에고이다. (...) 시간과 공간의 실체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 환상의 자아의식(외부세계나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기에 대한 느낌)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그 환상의 자아가 그 후의 모든 해석의 토대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에 대한 오해의 토대가 되고, 모든 사고 과정, 상호작용, 관계의 근본이 된다. 당신의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이다.

 

-에고는 소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자신이 더 많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에고는 비교를 통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짓는다. 모두가 대저택에 살고 모두가 부자라면 대저택도 재산도 자신의 자아의식을 강화하는 데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자신의 부를 포기하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해, 자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며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누구인가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된다. 에고의 자아 존중감은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에 매여 있다. 당신은 자신에게 자아의식을 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 즉 소유의 개념은 에고가 자신에게 견고함과 영속성을 부여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허구이다. 그러나 소유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깊은 내면에는 또 다른 더 강한 충동이 있다. ‘더 많이’를 향한 욕구가 그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에고도 ‘더 많이’를 향한 욕망 없이는 오랜 기간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를 훨씬 활력 있게 만드는 것은 소유보다도 오히려 욕망이다. 에고는 ‘갖고 싶어하기’보다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따라서 소유가 주는 얕은 만족감은 언제나 ‘더 많이’ 원하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더 많이’ 바라는, 다시 말해 동일화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심리적 욕구이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중독적인 욕구이다.

 

-에고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한다. 언제나 숨겨진 안건을 가지고 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불충분함과 결핍감이 있으며, 어떻게든 그것을 채워야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지만, 어쩌다 성공해도 그 만족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것’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에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고 고뇌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유명한 팝송 <난 만족할 수 없어(I can’t get satisfaction)>(롤링스톤즈가 부른 곡)는 다름 아닌 에고의 노래이다.

 

​-그러면 자신의 소유물에 자부심을 갖거나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해 분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부심, 돋보이려는 욕구, ‘남보다 더 많이’를 통해 자아가 확실히 강화되고 ‘남보다 더 적게’에 의해 위축되는 것은 옳은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에고일 뿐이다. 에고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단지 무의식일 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그 너머로 가기 시작한다. 에고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자신 안에서 에고의 행위를 감지하게 되면 미소 지으라. 때로는 소리 내어 웃어도 좋다. 인류는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먼저,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에고는 당신이 아니다. 에고를 개인적인 문제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더 에고일 뿐이다.

 

​-‘나를’, ‘나에게’, ‘나의 것’, ‘더 많이’, ‘원한다’, ‘필요하다’,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등의 생각 형태는 에고의 내용물이 아니라 구조에 속한 문제이다. 내용물은 상호교환이 가능하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 생각 형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은 그 생각 형태들이 하는 말을 믿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숙명적으로 그 무의식적인 생각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으며, 계속해서 찾으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운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생각 형태가 작용하고 있는 한, 어떤 소유물, 장소, 사람, 조건도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들 이외에 동일화의 또 다른 기본 형태는 ‘나의’ 육체와의 동일화이다. (...) 완벽에 가까운 훌륭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만 육체와 자신을 동등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문제가 있는’ 육체와도 쉽게 동일화되고 육체의 불완전함, 질병,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로 ‘고통받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장애로 고통스러워하는 자, 환자라는 관념적 정체성을 늘 확인시켜 주는 의사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무의식중에 그 병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에고가 동일화되는 또 다른 생각 형태 중 하나이다. 에고는 일단 동일화될 대상을 발견하면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드물지 않은 경우에, 더 강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에고는 병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 실제로 일으키기도 한다.

 

-에고가 지배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생각, 즉 모든 기억, 모든 해석, 의견, 관점, 반응, 감정 속에 ‘나(에고)’라는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무의식이다. 당연히 당신의 생각, 다시 말해 당신 마음속 내용물은 성장 배경, 문화, 가족 배경 등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 모든 마음 활동의 중심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생각들, 감정들, 반응 형태 등 당신이 가장 강하게 동일화되어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독립체가 에고 그 자체이다.

 

​-에고는 동일화와 분리를 먹고 산다. 당신이 생각과 감정으로 이루어진 마음이 만들어 낸 자아, 즉 에고를 통해 살아간다면, 그 정체성의 기반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감정은 본래 변화하기 쉽고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생존을 위해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나’라는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에고는 그 반대 생각인 ‘남’이 필요하다. 개념적 ‘나’는 개념적 ‘남’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남’은 내가 그들을 적으로 간주할 때 가장 확실한 ‘남’이 된다. 에고가 지배하는 이 무의식적인 행동 양식의 한쪽 끝에는 남의 잘못을 찾아내고 불평하는 에고의 강박적인 습관이 놓여 있다. (...)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잘못’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완전한 오해이며, 적을 만들어 자신이 옳고 우월함을 느끼도록 조건 지어진 자기 마음의 투영일 수가 있다. 잘못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해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으로써 그 잘못을 확대하는 경우도 흔하다. 당신이 반응하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당신은 자신 안에서 강화시키는 것이다.

 

-불만은 에고가 자기를 강화하기 위해 선호하는 전략 중 하나이다. 모든 불만은 마음이 만든, 당신이 완전히 믿고 있는 작은 이야기이다. 불만을 큰 소리로 말하든 단지 생각 속에서만 하든 차이가 없다. 자기와 동일시할 것을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 않으면서 불만만으로 즐겁게 생존하는 에고도 있다. 그런 에고의 포로가 되면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습관이 되고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든, 혹은 흔히 하듯이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든, 심지어 생각 속에서만 하든,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것은 이 패턴의 주된 부분이다. 욕하기는 이런 분류표 붙이기의 가장 노골적인 형태이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을 이기려는 에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이 무의식 바로 아래쪽 차원에서 당신은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있으며, 또한 그보다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물리적 폭력이 있다.

 

-분함은 불만과 함께 따라오는 감정이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분류표를 붙이는 일이며, 이것은 에고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보태 준다. 분함은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탐욕, 부정직, 진실성 부족, 현재 그들이 하고 있는 짓과 과거에 한 짓, 그들이 말한 것, 그들이 하지 않은 것, 했어야 하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등에 대해 계속해서 분개한다. 에고는 그것을 매우 좋아한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을 눈감아 주지 않고 그것을 아예 그들의 정체성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로 당신 안의 무의식, 즉 에고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불만스러워하는 바로 그 순간 머릿속 목소리를 잡아챌 수 있는지, 즉 알아차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좋다.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그 에고의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알아차릴 때마다 당신은 자신이 그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는 그 ‘알아차림’이 본래의 당신이다. 배경에는 알아차림이 있고, 전면에는 그 목소리, 즉 생각하는 자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에고로부터 해방되고, 관찰되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자신 안의 에고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더 이상 에고가 아니라, 단지 오랫동안 조건 지어진 마음의 방식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동이 에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집단적 기능장애의 표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때, 마치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대응하려는 충동이 사라진다. (...)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에고를 꿰뚫어 모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온전한 정신을 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취하든 에고의 깊은 곳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 환영의 자아를 강화하려는 강한 무의식적 충동이 있다. 그 자기 이미지, 환영의 자아는 생각이 지배권을 쥐고서 순수 존재, 원천, 신과 연결되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기쁨을 흐리게 만들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생각은 커다란 축복인 동시에 큰 저주이다.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든 에고의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남들과 별개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즉, 대립하는 상대방, 적이 필요하다.

 

-에고의 밑바탕에서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혹은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이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환상은 결코 당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만약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의해 일어나지만, 깊은 바닥에서는 어떤 형상도 영원하지 않고 모두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자신감 있어 보여도 에고 주변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보다 더 많이 갖거나 더 많이 알거나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자신이 ‘더 적다’는 느낌이 상대방에 비해 상상 속의 자아의식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때 에고는 상대방의 소유물, 지식, 능력의 가치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하찮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어떤 역할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기획된 것들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산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란 결국 일종의 심리적 에너지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을 외부에서 찾는다. 에고가 찾는 것은 형상을 초월한 깨어 있는 의식, 즉 ‘현존’이 아니라 인정, 칭찬, 찬사 같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고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어떤 형상 속의 관심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접촉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따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당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당신 안의 에고이다.

 

​-스스로에게 자아의식을 주기 위해 개념적으로 자신에 대해 규정짓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가? ‘생각’에서 정체성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알 필요가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으면 혼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그것은 사라져 버린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생각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을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상황은 언제나 중립적이며,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다. 반대편에는 상황이나 사실이 있고, 이쪽에는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들이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사실과 함께 머물도록 해야 한다. (...) 대부분 당신이 생각하는 것들이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과 감정 사이의 연결을 보아야 한다. 생각과 감정이 되는 대신,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알아차림이 되어야 한다.

 

-에고는 현실을 원망하는 것을 좋아한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타타타(여여함), ‘삶의 본래 그러함’이라고 불렀다. ‘삶의 본래 그러함’이란 이 순간의 본래 그러함일 뿐이다. 그 본래 그러함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 에고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다. 그렇게 해서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만들어지고, 에고는 그것 때문에 번창한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불행을 에고는 사랑한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은 자신도 타인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자신이 지상에 지옥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는 채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무의식적인 삶의 본질이다. 완전히 에고의 지배 속에 살아가는 삶이다.

 

-에고가 지배하는 모든 동기는 때로는 에고가 작용하는 본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영리하게 변장을 하고 있지만, 자기 강화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고통은 당신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원인은 형상과의 동일화이지만, 그 고통이 형상과의 동일화를 무너뜨린다. 고통의 많은 부분은 에고에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고통이 에고를 부순다. 단, 고통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을 때만 그 일이 가능하다. (...) 고통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이 그것이다. 십자가 위의 사람이 그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그는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다. 당신이 고통에 저항하는 한,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은 더디게 진행된다. 그 저항이 불태워 버려야 할 에고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그 과정이 가속화된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이와 부모 등 다른 누군가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고통의 불꽃은 의식의 빛이 된다. (...) 에고는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그 생각이 당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것은 진리의 왜곡이며,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이다. 고통을 초월하려면 고통에게 먼저 “예.”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당신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중단하라. 그래도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생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에고는 왜 역할을 연기하는가?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은 한 가지 가정, 한 가지 근본적인 오류, 한 가지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이다. 그 생각은 ‘나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부터 다른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뒤따른다. ‘나는 충분한 자신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역할을 연기할 필요가 있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이 얻을 필요가 있어.’ 그러나 당신은 당신인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적 심리적 형상 밑바탕에서 당신은 ‘생명’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상 속에서는 당신은 언제나 어떤 사람보다 열등하고 어떤 사람보다 우월할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질 속에서는 당신은 누구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다. 진정한 자존과 진정한 겸손은 이 깨달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에고의 눈으로 보면 자존과 겸손은 대립적이다. 진리 속에서는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나는 언젠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에고이다. 에고로부터의 자유는 사실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깨어 있는 ‘바라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 순간 생각으로부터 알아차림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면 에고의 영리함보다 훨씬 위대한 지성이 당신 삶 속에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 알아차림을 통해 감정과 생각마저도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본래부터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또한 그곳에는 자신도 없다. 다만 인간의 감정, 인간의 생각만 있을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 한 묶음의 생각과 감정들에 지나지 않는 당신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는 이제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되고, 더 이상 의식의 전면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당신 정체성의 기초가 아니다. 당신은 ‘현존’의 빛이 되고, 생각과 감정보다 앞선 더 깊은 알아차림이 된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은 당신을 흔들어 놓거나 마음을 방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에 흔들리고 마음이 방해받는가를 기준으로 당신이 얼마나 깊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 당신에게 무엇이 중요한가는 당신이 말하거나 믿는 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행동과 반응이 당신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것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좋다. ‘나를 흔들어 놓고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만약 작은 것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즉, 작다. 그것이 당신의 무의식적인 믿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이 작은 것들이다. 모든 것들이 덧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내용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의 내린다. 지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내용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물이 관심을 완전히 차지해 버리며, 그들이 동일화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삶’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인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용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 상태와 감정 상태는 물론 나이, 건강, 관계, 경제력, 일, 생활환경 등을. 사건들, 즉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당신 삶의 외부 환경과 마음의 환경, 당신의 과거와 미래 모두가 이 내용물의 영역에 속한다. / 그렇다면 내용물 외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내용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바로 의식이라는 내적 공간이 있다.

 

-영적인 추구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습을 바꾼 에고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기’를 제거하는 것이 미래의 목적이 되면, ‘자기’를 제거하려는 그 노력조차 ‘자기’를 더 커지게 하려는 위장된 추구일 가능성이 있다.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을 여는 열쇠이다. 그 힘에 의해 의식, 즉 영혼이 형상에 갇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무엇이 존재하든 무엇이 일어나든, 형상에 대해 마음속에서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상의 절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항하면 당신 자신의 형상 정체성인 에고를 포함해 세상과 세상의 일들이 실제보다도 더 현실성 있어지고, 더 견고하고 더 영속적으로 보인다. 세상과 에고에게 무게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상들의 놀이를 생존 경쟁으로 오해하고, 그 오해가 당신의 인식일 때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된다.

 

​-강력한 영적 실천 중 하나는 에고의 작아짐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작아진 채 두는 것이다. 때때로 실행해 볼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받거나 비난받거나 험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박과 자기방어를 시도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져도, 그것에 대해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으면 실제로 어떤 것도 작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아짐’으로써 더 커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을 방어하거나 자신의 형상을 강화하려고 하지 않으면 형상과의 동일화로부터, 즉 마음속 자기 이미지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다.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이 영적 진리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관, 그리고 이 시대가 사람들에게 조건 지우는 행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산이 되기보다는 “천하의 깊은 골짜기가 되라.”고 노자의 『도덕경』은 가르친다. 그러면 당신의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너에게 흘러들어 올 것”이라고.

 

-저항하지 않고(무저항), 판단하지 않고(무판단), 집착하지 않는 것(무집착)—이 세 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저항을 멈춤으로써 그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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