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 랜덤 시선 39
박진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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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디 장미가 아르바이트로 피던가 일용직으로 계약직으로 피던가 십 년 거치 십 년 상환으로 피던가 월세 삼십만 원으로 꽃망울 터뜨리던가 작문연구 교양국어로 일렁이던가 박사논문 시간강사로 출렁이던가 // 꽃이면 그냥 꽃인 게지 아라리인 게지 제 질 자릴 보고 언제 장미가 피던가 흐르는 피여, 비화(飛火)하는 혼이여, 오늘밤은 언어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입가에 피 묻어서 장미처럼만 넋이 붉어져야겠다 너는 장미의 남방한계선으로 나는 장미의 북방한계선으로 꽃 피우러 가자 붉고 서러운 아라리로 불 지르러 가자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박송이 너는 <장미, 불꽃 아라리-박송이에게> 中에서

아라리가 난 거랑께 의사 냥반, 까운에 환장허겄다고 달라붙는 햇살이 아라리가 나서 꽃잎을 흔들자뉴 오메 발병 원인은 불안 강박 우울 공황 발작, 이런 게 아니라 아라리가 나서 그렇탕께 왜 심전도는 찍자 그러는규 술판서 언 눔이 아리랑을 불러 재끼는디 아라리가 헉 하고 피를 토해내능규 복분자가 요강을 뒤집어엎는 것맹기루 아라리가 내 몸도 이렇게 뒤집어서리 환장허겄다고 나도 아라아리가 나아안네 부르고 있는디 내 몸이 꽃이파리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디 그 냥반들이 응급실에다 나를 처넣은규 숨이야 아라리가 쉬겄지 심장이야 지 혼자 팔딱팔딱 하는 거구 긍께 의사 냥반 이 담에 병원 와서 불안하고 우울하담서 뒤집어 자빠진 사람 있으믄 아리랑 한 번 불러주슈 아라리 땜시 잠시 잠깐 그랑깅께, 저 꼰잎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아라리 몸 좀 보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믄 아라리 한번 재껴부리믄 돼쥬, 나 갈라유! <아라리가 났네> 전문

우리가 낱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시인이야말로 궁극의 권력자가 아닐까. 오로지 시인만이 낱말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낱말을 채집할 뿐 아니라 독점한다. 독점한 낱말에 자신을 새겨넣으므로써 시인은 그 낱말이 사어가 되는 날까지 불멸한다. 시(詩)는 특정 시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낱말을 더 이상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구태여 언급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낱말의 소유주를 의식해야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로열티를 지불하듯이. '딱딱한' 것이 기형도 시인의 것이고, '동백'이 송찬호 시인의 것이라면, '아라리'는 박진성 시인의 소유다. 그 누구도 '아라리'에 관해서라면 박진성 시인만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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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외부 클리나멘 총서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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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부동적인 대지에 균열과 불안정의 틈새를 회복"하려는 푸코의 전복적 사유는 후기에 이르러 자기를 배려하는 윤리적 주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책 4장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실천이라는 다소 소박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푸코 사유의 개념적 난점에 주목하고, 그러한 난점을 극복할 만한 실마리를 모색한다.

이 책에 따르면, 푸코 사유의 한계점이라고 할 만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권력 관계에 주목하다보니 권력을 선차적인 것으로 상정해 버린 것. 사실 권력이라는 개념이 정의되려는 순간 이미 논리적으로 필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권력에 의하여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 권력을 통해서 특정한 활동의 형식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의 존재. 그것은 “그대로 둔다면 제멋대로 활동해서 정해진 질서를 깨뜨릴 것이 분명한 위험스럽고 불온하고 무질서한 힘”이다. 리비도나 욕망 같은 것. 푸코는 전제가 되는 이 힘에 대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

권력을 정의하고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그 힘은, 그대로 놔둔다면 어떠한 질서나 형식, 정해진 관계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탈주적인 힘"이다. 권력이란 바로 이 힘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고, 이 힘을 길들이고 포섭하는 것이며, 이 힘에 어떤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그것을 생산적인 어떤 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선차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탈주적인 힘의 선차성!)

이 책에서 언급하는 푸코 사유의 두 번째 한계점은 그의 권력 이론에 ‘적대’의 개념이 결여되어있다는 것. 푸코에게 '적대'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말하는 적대란 결코 집단 간의 적대가 아니라, 지배집단과 개인, 혹은 권력의 전략과 개인 간의 적대일 뿐이다. 그는 적대를 모든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써 사유하고, 그러한 사유는 결국, 권력관계나 권력의 배치를 그대로 둔 채 다만, 대상을 개별화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정체성을 묶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또 권력에 의해 이미 주어진 개인적 지위에 대해 저항하는 소극적인 수준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저자는 푸코가 말한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서의 적대와는 또 다른 종류인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로서의 적대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전자로부터 ‘저항’이 생겨나듯이 후자의 경우에는 ‘투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즉, 권력과 탈주적 힘 사이에서 ‘저항’이 정의된다면, ‘투쟁’은 다양한 ‘집단 간 적대’에 의해, 나아가 적대하는 생체권력들 사이에서 정의되는 것. 저자는 저항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생체권력을 지닌 집단들 간의 ‘투쟁’과 결부될 때, 비로소 적대적 관계를 전복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이란 단순히 권력관계의 전복이나 권력의 대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투쟁과 결부된 저항의 진정한 가능성이란, 권력관계의 형태변환, 즉 ‘배치의 전복’을 내다보는 것이다.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기존의 권력기술에 의한 권력배치를 재편하는 것이다.

저자는 집단 간 적대(=몰mole적 적대)에 주목하여 투쟁과 결부된 저항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배치의 재편을 기도하는 생체정치를 제안하지만, 과연 역사상 투쟁이라는 방식에 의해 배치가 재편되었던 기존의 사례가 있는가.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배치의 변화는 어떤 집단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니라, 개인들 내면의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인식의 변화, 사유의 변화, 그것의 적층에 의해 이루어져 오지 않았나. 저자는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사유의 변화’를 생체정치에서 기대할 만한 효과라고 보는 걸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푸코에 따르면 그 어떤 배치 변화도 당대의 인간의 인식 수준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배치의 변화를 당대의 인간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기획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어쨌든, 푸코한테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계급투쟁을 생체정치의 차원에서 다시 사고하자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자고 말한다. 계급적 관점에서, 몰적 적대의 관점에서 생체권력의 변환을 사고해보자는 것. 대중과 결합하거나 대중을 장악하는 문제를 생체정치의 문제로서 다시 정립해보자는 것. 생체정치적 효과의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포착해 보자는 것. 아마도 저자는 자본주의체제 내부의 무수한 맹점으로부터 발아하는 조용한 혁명, 내부 안에 숭숭 뚫린 외부로부터 서서히 번져나가는 혁명, 초유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이 챕터에서는 맑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맑스와 푸코를 혼합하기에는 서로 간에 층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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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넘도록 땀에 흠뻑 젖어 쓰러지기 직전까지 춤을 추고 있으면, 이제껏 읽었던 고색창연한 텍스트들이 죄다 이 순간을 위한 구차한 수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이나 시에 감전될 때의 경우와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더없이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순간의 어떤 강렬한 환희의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춤판에서 느꼈던 그 무량한 환희야말로 이 세계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비밀스런 원천이라고 근거도 없이 확신해 봅니다.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곱게 몸을 누이는 갈대들처럼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 내 몸을 리듬에 완벽히 일치시킬 때, 온몸의 세포가 올올이 발기하던 그 벅찬 생동의 순간- 이는 단지 플로어 위에서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어쩌면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자기를 최대한 표현할 때 만끽하게 되는 감격적인 절정의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09년도에 적었던 자기소개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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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하철 타고 출근하면서 내가 젊다는 게 새삼 기쁘고 우쭐했다. 나는 젊다. 젊은 씨앗이다. 비밀스런 질료다. 내가 성장할 것이라는 기분 좋은 확신. 서서히 조금씩 울창해리라는 강렬한 예감. 그 자명함. 숨이 턱까지 차도록 뜀박질을 하면서 정말로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도록 '살고' 싶다고 되뇌었던 그 옛날 언젠가처럼, 가슴 깊숙이 밀려오는 충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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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유한성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는 인간을, 자신의 유한성을 너무도 예민하게 자각하여 스스로 자기 안에 매몰되어버린 인간을 나는 어떻게 경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경애 그리고 연민-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갖는 연민이다. 나는 그에게 김소월의 산유화까지 읊조리면서 자발적 고독의 무궁한 잠재력에 대하여,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지지를 표했으나, 그 순간 술자리의 누군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비루함일 뿐이라고.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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