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가 탄탄한 글은 시 만큼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라고 쓰고 후회한다. 때를 가리지 않는 이 구제할 수 없는 감상벽을 어찌할 건가. 아마도 내가 비판적 읽기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적인 독해를 해야 할 텍스트조차도 순 유미주의적인 관점에서 감상적으로 소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도 얼마나 '아름다운 글'이라 여기며 읽었는지. 제발 이제는 사회과학서적들을 그런 방식으로 읽는 태도를 버리고 싶다.  

쓸데없는 감상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시와 그림 따위를 멀리 하고 논리적인 글들을 많이 읽어 나가야지 않을까. (그러나 과연 시를 끊는 게 가능할 지) 사유가 빈곤한 감상주의는 삶을 쉽게 신파로 몰아가고 그 끝에는 언제나 칠흑 같은 정념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도 말했듯이 인간은 냉철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정념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감상이 배제된 인식, 요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오로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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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외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수유-너머야말로 사실상 인문학 콘텐츠를 판매하는 집단으로 이미 자본주의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않았는가. 우연히 어느 인터넷 게시판 논쟁에서 이런 요지의 덧글을 읽고 마음이 계속 무거웠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것 역시 그 해소되지 않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말은 명쾌하다기보다는 차라리 가혹하게 느껴지는 지적이었다. 이것이 단지 내가 수유-너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시각에서 수유-너머를 바라봤을 때 나올 수 있는 지적이고, 거기에 무슨 반론을 달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저 의도와는 무관한 효과로서 수유-너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씁쓸했던 것은 다만, 그 비판이 대상에 대한 어떠한 이해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아니, 애당초 그것은 대상에 대해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식의 비판은 마치 자신을 중심으로 단단한 성벽을 둘러쌓고 그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은 채 고함만 쳐대는 비판처럼 느껴진다. 

푸코가 계보학적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을 때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푸코의 연구방식이 자신들의 고유한 방법론적 틀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가 역사학자들로부터 폄하되었던 사실이 내게는 수유-너머에 대한 비판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확고하게 구축된 장소로부터 결코 벗어날 생각이 없이 오로지 그 안에 진을 치고 앉아 이질적 대상을 규정하고 비판을 가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쉬운 만큼 또한 가볍고 폭력적이다. 대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지만, 그 거리가 몰이해에서 비롯한 것일 경우 비판은 더 이상 비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은 차라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대상을 잔인하게 재단해버리는 일에 가깝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나 역시 수유-너머 주위를 배회하면서도 그런 거리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유-너머에서는 인문학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에서와는 다른 관계 맺기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확실히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제안에 대해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리라. 내가 그들의 제안과 환대에 기꺼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담감을 느끼며 발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사회 체제의 속성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그런 낯선 관계 맺기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이 그동안의 사회 체제에서 자연스레 습득한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의 일부를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모험을 위해 또 다른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그래서 나로서는 여간해서 쉽게 그곳의 사회에 끼어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적어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잔인하게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프로크루스테스가 탄복할 만한 별다른 획기적인 방안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오늘도 그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수유-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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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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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못 생생하게 지난날 목격했던 민중적인 삶의 고통과 비참을 증언하곤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도 민중이란 내게는 어떤 서먹한 추상이었다. 그것도 김형과는 달리, 시대의 강자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고통받고 이용당하게 되어 있는 극히 비관적인 추상이었다. 만약 내게 애정이나 신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내가 그들 민중 위에 군림하며 누리는 계층에 끼어들게 되리라는 예측에서 오는 부채감이나 죄의식의 변형이었지, 민중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용기있게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 행동했던 이들에게는 죄스럽게도, 나는 차츰 심한 자기모멸과 원인 모를 부끄러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껏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소년시절의 충동적인 모험의 연장이며, 추구하는 것 또한 영광과 승리의 동참자로서 나누게 될 자랑스러운 기억 따위나 아닐까.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힌 지성의 정신적인 자위행위거나 우리도 언젠가 빼앗기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노력한 적이 있노라는, 장차 혜택 받는 계층에 끼었을 때의 변명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것이 그 무렵 이미 병적인 피로에 빠져있던 나의 결론에 가까운 자기검토였다. -p.86  

“변명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라던 소설 속 화자의 “자기검토”는 예리하게 들어맞았다. 적어도 <젊은 날의 초상>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의 존재 자체가 오늘날 이문열이 그 어떤 정치적 망발을 일삼아도 결코 이 소설가에 대한 애정을 철회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초상>을 비롯해서 그의 많은 소설들이 나에게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고, 이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덕분에 나는 이문열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최근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운동권 학부생이 올린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학생이 공부나 할 일이지 왜 정치에 끼어드느냐는 어르신들의 비난에 그는 단단히 골이 난 모양인지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나는 이문열이라는 작자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 따위 운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기회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감히 ‘학부생’ 주제에 이문열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칠 날을 위해서 우리는 사상의 날을 벼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를 실천해야 한다."

<젊은 날의 초상>은 자전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젊은 날의 상당 부분을 저 위의 학생이 역설한 “사상의 날을 벼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에 헌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때문에 "이문열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치고픈" 어느 학부생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도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었다. 흔히 '시절'은 한때라고 하지만, 어쩌면 개체로서의 인간만이 한때이며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작중 인물의 대화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묻어나는 데서 오는 근대소설적인 분위기라든가 중간중간 무협소설을 읽는 것처럼 허황되고 작위적인 대목 때문에 이 소설은 서술 기법 면에서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감동은 이 모든 약점을 충분히 무마하고도 남는다. 소설 출판 당시 매캐한 교양의 숲에서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모든 비난이 꼬투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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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8-2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게 참 어려운 화두란 말이죠^^
 
욕망 이론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민승기.이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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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단계란 거울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시기로,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난다. 라캉은 유아 발달 시기에 나타나는 거울단계를 나중에 ‘상상계’라는 용어로 전치시키는데, 이것은 거울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주체 형성의 양상을 단순히 발육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특성으로서가 아니라, 주체가 (단계적인 성장과 상관없이) 처하게 되는 하나의 ‘국면’으로 확대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거울단계의 아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양육을 받아야만 하며 아직 말도 하지 못한다. 운동조절 능력이 부족한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분열되고 파편화된 상태로 감각하는데, 이때 거울상은 아이의 신체에 대해 숙달된 느낌을 '예기'한다.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거울의 이미지에 매료된다. 거울 앞에서 아이는 객관적으로는 더없이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도 지극히 완벽한 자아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거울단계에서 느끼는 근원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은 어디까지나 환영(이미지)에서 얻어지는 효과이기 때문에 자아와 관련된 근본적인 부조화가 존재하게 된다. ‘존재론적 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거울상과의 동일시 과정 속에서 부조화를 일으키는, 이전의 분열된 육체의 경험- 이것이 아이에게 히스테리적 억압을 가져오고, 아이는 억압에 대응하여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요새화하는 자기방어를 수행하게 된다.  

라캉은 여기서 주체의 전반적인 정신발전을 규정짓는 ‘소외구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자아가 강박적 자기방어 속에서 구축한 환상적 자아와 혼동을 일으킴으로써 이미지로서의 자아가가 실제의 자기 위치를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는 이렇게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매료와 더불어 본래의 자기를 소외시키는 과정 속에서 부상한다.  

오인과 소외에 의한 (상상적) 주체의 구축이라는 상상계적 자아의 양상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보여준 고전주의 시대 대감호 현상과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광인, 부랑자, 걸인 등을 비롯한 비이성의(정확히는 비이성으로 상정-분류된) 무리들이 대거 격리 수용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인류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거대한 상상계적 국면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한없이 난해한 이 책을 붙들고 있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폴 벤느의 <푸코, 사유와 인간>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 “결국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발밑에 우리가 의지할 진실한 것, 견고한 것이 과연 있는가. 산에서 사람들은 눈더미가 쏟아지는 비탈에서 갈고리 쇠가 얼음에 걸리는 것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번 갈고리 쇠로 얼음을 찍으며 실존적이고도 운명애적인 체험을 하는 지 모른다. 그러니 얼음과 함께 굴러 떨어질 운명을 알면서도 우리는 결코 이 우스운 짓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허망한 종류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안도감과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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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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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지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사회는 비극적이다. ‘빅브라더’를 수장으로 한 일당독재체제 사회에서 당원과 노동자 계급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생활은 당의 감시 하에 철저하게 통제되며, 당의 이해 관계에 따라 수시로 미디어의 조작이 이루어진다.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은 체제에 불만과 회의를 느끼고는 있지만, 겉으로는 당의 규율에 복종하며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하급직 당원이다. 그는 우연히 줄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당에서 금지하는 자유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체제의 금기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윈스턴은 체제 전복을 모의하는 단체에 가담하여 불온서적까지 구해 읽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행각이 사상경찰에게 적발되어 철창신세에 놓인다. 그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정신에 손상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석방되지만 끝내 경찰에게 사살되고 만다.    

2 루쉰이 윈스턴 같은 인물을 보았다면 그를 일컬어 ‘깨어난 노예’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깨어난 노예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다. 윈스턴은 죽기 직전에야 자신 자신을 파악하고 탄식한다. “오,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고집부리며 스스로 택한 유형이여!”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은 채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었던 윈스턴의 말로는 너무나 처참하다. 

바디우는 <윤리학>에서 선악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윤리적 인간이란 한마디로 “사건에 충실한 주체”다. 세계의 맹점(구멍)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 맹점이 삶을 교란시키는 종류의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주체란 바로 이 사건에 천착하는 주체다. “사건에의 충실성”을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 단념해 버리는 것, 바디우는 이것을 “용기 없음”에서 비롯하는 “악”이라고 말한다. 윈스턴은 정치적 "사건"에 충실했던, 바디우가 말한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주체였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끔찍한 고통과 불행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소설은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담보로 하는 일임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3 사건에 충실한 태도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사건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냉소적 주체”라고 했다. 냉소적 주체는 어떤 것이 옳지 못하고 부당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상황논리나 자기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일 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주체에게서 “계몽된 허위의식”을 보았다. 그들은 알 것을 다 아는 채로, 그러니까 더는 순진하지 않은 채로 허위의식을 고수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순응”이다. 냉소적 주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아무리 계몽적 활동이 많은 것을 발가벗겨도 폭로 효과는 하나도 없으며 “적나라한 사실” 또한 드러나지 않는다. 자유, 진실, 민주 따위의 계몽적 가치는 비웃음을 당한다. 

   
  "그녀는 당을 증오하고 그래서 혹독하게 욕을 했지만 전체적인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이 그녀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이상 당의 강령에도 무관심했다. (...) 당에 맞서는 어떠한 반란도 결국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짓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당의 규칙을 범해 가며 그대로 오래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혁명의 세계 속에서 성장하여 토끼가 개를 미워하듯 그저 피하기만 하면서 그 권위에 반항할 기색은 조금도 없이, 딴 생각 없이 당을 하늘처럼 믿기만 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젊은 세대에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봤다. -p.147"  
   

소설 초반부에서 줄리아는 냉소적 주체에 가까운 인물로 보여진다. 그녀는 체제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크게 저항하지 않으며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한다. 그녀는 체제와 적당히 타협한 채로 은밀하고 소극적인 일탈을 통해 개인적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간다. 슬로터다이크는 줄리아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현대의 불쌍한 의식”이라고 칭하면서 이 불행한 의식이 파시즘의 터전이 됐다고 말한다.

4 바디우 식으로 얘기하면, 이 소설에서 윈스턴은 분명 ‘진리의 담지자’였다. 그는 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간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비록 말로는 비참했을망정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갈망했던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는 과연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쟁취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흔히 당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가치, 이를테면 인권이나 정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평등 따위의 가치는 어쩌면 특정 시대, 특정 장소에서 추앙되는 특수한 가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시대에 따라 정치적 올바름이나 개인의 윤리적 태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한없이 유동적이고 자의적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항구적인 가치의 기준 같은 것은 부재하다. 정의의 기준도 끊임없이 변해 왔다.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킨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도 있었고,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잔혹한 살육 행위가 용맹함으로 칭송되던 시대도 있었다. 공산사회에서는 숙청이 정의였고, 이 시대는 금력이 곧 정의다. 인권은 또 어떤가. 르네상스 시대에 토머스 모어가 꿈 꾼 유토피아는 노예들이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해주는 세상이었다. 토머스 모어의 시대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인권에 가치가 부여된 것은 근대 이후에 출현한 새로운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배치 속에서 생성된 가치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제 목숨을 내놓는 일, 이것은 과연 숭고한 일일까? 이것은 어쩌면 그저 도착적인 하나의 증세에 불과한 게 아닐까? 
                 
5 발터 벤야민은 <파국으로서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국이라는 개념 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사 과정은 사유하는 자들에게는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회전시킬 때마다 그 전에 정돈되어 있던 것이 새로운 질서를 향해 붕괴되는 만화경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배자라는 개념은 결국 거울들이고, 그 거울들로 인해 어떤 ‘질서’의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만화경을 한 번씩 돌릴 때마다 새로운 상이 생겨나는 것처럼, 체제의 질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재편된다. 질서의 변화는 비단 체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대마다 당위로서 인정되는 혹은 추앙되는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유동적인 배치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와 가치는 우연적이고 자의적인데다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시대의 사건은 다른 시대에는 결코 사건이랄 수도 없는 종류가 된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사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굴러 떨어질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처럼 도저한 절망과 회의 속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우리는 매번 사건에 충실해야 하는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 삶이 개인의 행복을 얼마나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윈스턴을 만나기 이전의 줄리아는 철저히 냉소적인 주체였지만, 개인의 삶의 행복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녀는 윈스턴을 만나기 이전의 상황이 훨씬 행복했다. 심오하고 원대하고 불변하는 가치 따위는 없는 이 세계에서 사건에 충실한 주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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