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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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기독교적 세계의 허위성에 대해 구토를 일으키기 시작할 때- 니힐리즘이라는 징후가 시작된다. 인간이 절대 가치를 회의하고 구토하게 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는 힘, 니체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성실성은 도덕(도덕적 가치판단- 문명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계발된 덕목)이 양육한 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물어서(?) 자기를 양육한 도덕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 <성실성>이 양육되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믿는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31)

물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인간에게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의 비소성(卑小性)이나 우연성과는 반대로, 인간에게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피안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재난이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멸하지 않도록, 사는 것을 적대시하지 않도록, 인식하는 일에 절망하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이는 하나의 “보존수단”이었다.(32)
 
모든 발생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에는 여하한 진리도 부재하며, 사물의 여하한 절대적 성질도, 여하한 물 자체도 없다는 것을 통찰한 인간이 돌파구로 마련하는 것은 세계를 미망(迷妄)으로 판결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존의 성격을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공(空)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참-거짓의 분별 또한 단순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설정해낸 가상적 가치일 뿐이다. “무가치성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이러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이며, 하나의 중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36)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생에 관해서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무든 종류의 원망(願望)의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39) 즉, 그것은 생 자체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절대적 X, 대타자, 원대하고 심오한 모든 가치들, 이상, 초인간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워지는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위안으로 삼고, 순응하고, 복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환멸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도덕성, 무목적성, 무의미성을 간파한 자가, 오로지 힘의 작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환멸이다.

이렇게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의 해석(모든 도덕적 가치판단,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 그 자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마치 생존 가운데에서는 여하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이기라도 한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59)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적인 ‘헛수고’는 아니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기는 있는가? 니체는 이에 대해 “이 사상(니힐리즘)을 그 가장 두려워해야 할 형식으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그러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적으로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존, 즉 <영원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無, 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니체가 무(無, 무의미)의 영원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궁극의 지향점도 파기해버렸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성이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면적 현상의 영원성이다. 거기에는 삶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절대 가치나 목표도 없이, 그저 끊임없는 현상으로서의 연기(緣起)와 유전(流轉)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우연과 변화, 생멸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유희다. 호쾌하게 웃으며 언제든 뛰어들 만한, 대단한 유희다. 유희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과정으로부터 목적 표상을 제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긍정할 것인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과정 내에서 어떤 것이 이 과정의 순간마다 매번 달성되고 게다가 항상 대등한 것인 경우이리라.”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데카당스의 징후이다. 그러나 “퇴폐, 퇴락, 폐물이, 그 자체로 단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증대의 한 가지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데카당스 현상은, 삶의 무언가의 상승이나 전진과 동일하게 필연적이다. (...) 사회가 정력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실패나 기형아로 가득차고, 더욱더 쇠퇴에 가까워진다. (...) 데카당스 자체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의적이게도 퇴락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하다. 초월적 가치나 신앙을 파기해버리고도 생존한다는 것, 즉 일체의 무게중심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함인 것이다. (그런 가치들-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모든 지고의 가치에 의존하여 정신의 안정을 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정신의 허약자, 정신병자, 신경쇠약자"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약함’을 인간의 전반적인 성질로 본다; “사람은 약함을 욕구한다. 왜? 대체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을 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사람은 약함을 극복함에 있어서, 강장한 방식에 의하여 하려고는 않고, 일종의 시인이나 도덕화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강장한 방식이란? 그것은 억제나 극기, 금욕이 아니다. 무반응과 무관심과 무시다! “우행(愚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카당스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에서 더욱더 더 나아가, 즉 더욱더 철저히 몰락하여, 궁극적으로는 몰락의 극단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철저한 몰락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철저한 자기 몰락으로서, 본능적 도태로서 나타난다. (...) 훨씬 깊숙한 본능의, 자기 파괴나 무(無)에의 의지의 본능의 의지로서의 파괴에의 의지.”(61) “우리가 극단적 몰락으로 치달을수록 곤궁이 커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62)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다. 철저한 몰락 속에서 맞이하는 철저한 부정. 그리고 오는 광명. 능동적 니힐리즘. 최후의 니힐리즘은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그것은 “절반은 파괴적, 절반은 반어적인, 정신의 가장 강력한,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삶의 이상으로서의 니힐리즘”이다.

최후의 능동적 니힐리스트, 그는 의도도 의미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연과 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영원한 생존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자”다. “여하한 신앙개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우연이나 무의미의 대부분을 그저 용서하기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 인간에 관해서는 그 가치를 상당히 할인하여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일에 의해 비소해지고 약화되는 일이 없는 자이다. 즉, 대개의 불운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에 도달하고, 이 때문에 불운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건강에 가장 부한 자- 스스로의 권력에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달성된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면서 대표하는 인간.”(63) 

니체는 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무한한 생의 환희를 느끼고 박장대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도덕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이 극단의 페시미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비극의 탄생>의 여기저기에서 번져 나오고 있듯이), 나는 정반대의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고뇌하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장 우울한 동물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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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모든 물체(things)는 어떤 점에서 합치한다”(에티카, 정리13의 보조정리2)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며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 동등한 것은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에티카, 정리 37)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합치하는가.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나 동등한 ‘그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이를 ‘공통개념’으로 정의한다. 올덴부르크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가령 림프와 카일(당시 혈액의 구성성분으로 알려진 것들) 등등이 각각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비례를 이루어 결합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면, 그것들은 이런 측면에서 피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피 안에 피의 입자들인 림프와 카일을 서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입자들이 서로 만나 밀쳐내기도 하고 자기 운동의 일부를 전달하기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작은 벌레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작은 벌레는,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듯이, 피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피의 각 입자를 부분이 아닌 전체(각각 하나의 온전하고 고유한 전체)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 벌레는 어떻게 모든 부분들이 피의 일반 본성에 의해 변양되고 서로 적합하게 되도록 강제되는지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각 신체가 특수한 방식으로 변양되어 실존하는 한에서, 전체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체와 일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주의 본성은, 피처럼 제한된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무한하므로, 그 부분들은 이 무한한 능력의 본성에 의해 무한히 변용되고, 무한한 변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나는 각 부분이 전체와 아주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피 속에 사는 벌레는 피를 구성하는 하나의 입자로서 이미 피의 흐름을 타고 있지만, 벌레는 피 자체를 외부의 개별적인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벌레의 인식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벌레는 림프와 카일이라는 외부의 대상이 제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저마다의 운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벌레와 림프와 카일에게 공통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의 흐름이다. 벌레와 림프와 카일은 피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다. 그들은 피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어울려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또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리듬이 사람들 각각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리듬은 춤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이다. 속성을 분유하고 있지 못한 개체는, 그러니까 리듬을 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춤동작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한 사람은 그 리듬에 맞추어 다양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사람들과 더불어 춤출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리듬이 고정불변한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개체가 리듬에 참여하게 되면, 리듬은 그 개체로 인해 변화한다. 마치 새로 온 사람이 모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듯이.

(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인식 수준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개체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리듬과 하모니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개체적 수준에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것에 맞추어, 그것에 몸을 맡기어, 그것을 한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미 신의 일부로서 신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림프와 카일이 피의 입자로서 피의 흐름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리듬의 장(場)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리듬을 타면서 동시에 그 리듬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원자 물리학의 아이러니와도 비슷하다. 원자 물리학에서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원자라는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대상이 관찰되는 과정의 연쇄에서 관찰자가 그러한 연쇄의 마지막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시물리학에서는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반드시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원자를 터럭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는 원자와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원자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을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면, 개체로서의 대상은 휘발해 버리고 타아개념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존재는 없고, 가능성(확률)과 관계만이 남는다.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과 미시물리학 이론(‘미시’라는 것도 사실상 인간 개체의 수준에서 봤을 때의 ‘미시’가 아닌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현실야말로 ‘미시적’인 종류일 것이다. 어쩌면 아원자 입자의 내부 세계와 내가 부딪히는 일상의 현실, 그리고 별의 운행과 은하의 생멸을 포함하는 우주적 사건들- 인간 개체의 수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이러한 각각의 차원의 장(場)에 어쩌면 프랙탈 모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동일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을 내가 사는 현실세계에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내 앞에 무자비하게 던져진, 불변의 운명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내가 그것에 개입함으로써 극적으로 변화한다. 내가 현실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개입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현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아상(我想)이라고 부를 것이다. 스피노자라면 그것을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낸 변용, 즉 이미지일 뿐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상을 허망한 것으로 본 반면에, 스피노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환상, 상상, 착각, 환각, 즉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모든 착각에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는 없는, 그러나 신의 섭리라고 할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상상하는(내지는 착각하는) 능력이란, 의지가 이성을 방해하여 생긴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덕(능력, virtu)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하라지는 대상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마저 착각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감각이 인식하고 마음이 해석해낸 것들 모두는 의식 안에서 시공으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며, 지각된 대상을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착각 때문에 대상화된 것입니다. 모든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이 전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는 참된 앎을 위해 우리의 관점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사물을 분리된 마음인 개체적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보라고, 근원으로부터 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근원'이다.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는 그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때, 오직 그때에만 전체적인 인식, 바른 봄과 이해가 있게 됩니다."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이란 어떻게 보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볼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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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요리도 젬병인데 잘 됐다. 요리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해 평소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던 사람에게 생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는 단연 희소식이다.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싸그리 사라졌다. 생으로 먹으면 되고, 그게 어려우면 끓이거나 삶거나 쪄먹으면 된다. 사과를 예쁘게 깎을 필요도 없다. 껍질채 먹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원시인처럼 살겠다는 내 포부를 들은 동생이 원시인의 평균 수명을 넌지시 알려줬다. 10세 전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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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기 위해 자연식한다 - 목숨 걸고 편식하는 남자 송학운의 암을 고친 자연 생활·자연식 밥상
송학운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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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이 실재하는 삶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평소에 몹시 육류를 즐기다가 마흔 둘의 나이에 직장암 3기 판정을 받는다. 이후 그는 각종 대체요법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다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연식요법을 시작하게 된다. 자연식요법이란 별 다른 게 아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자라 생명력을 가득 품은 담백한 제철 요리, 여러 양념 없이 천일염만으로 자연 그대로의 맛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 채식 위주의 식사, 이것이 자연식 요법의 전부다.

저자는 음식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암 치료를 위해 오염물질 가득한 도시를 떠나 해발 450미터 고도의 산속으로 거처를 옮긴다. 숲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따스한 햇볕을 쬐고 산중의 텃밭에서 일군 싱싱한 제철 음식을 먹은 지 일 년 만에 그는 놀랍게도 완치된다. 의사로부터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얘기를 들었던 그였다. 음식과 환경을 바꾸고 17년 째 건강한 삶을 이어오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생명체를 품어 안는 자연의 놀라운 치유력과 우리 몸의 자정능력을 믿으라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항암치료를 위해 투여되는 약물은 결코 신체의 자발적인 면역능력을 증진시켜주지 않으며 암세포 뿐만 아니라 정상 세포마저 파괴한다. 당뇨환자에게 인공적으로 인슐린을 넣어주는 방법이라든지 항암치료를 위해 항암제를 투여하는 방법이라든지 하는 서양의 약물요법기술은 우리 몸의 자가치유능력에 대한 일체의 고려가 없다는 점, 우리 몸을 마치 숨 쉬는 카데바처럼 취급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 번 그런 식의 질병 치료 방식에 길들여지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평생을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주입되는 약물에 의존해 살아가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어떻게 약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의 면역능력을 길러 질병을 이겨내야 하는지 투병기나 다름없는 이 책을 통해 그 방법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완치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여정은 오늘도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많은 환자들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각종 오염물질에 찌들어 이미 잠재적 암세포 보유자나 다름없는 나 같은 이들에게도 놀라움과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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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내가 고치는 기적의 밥상 내 몸 내가 고치는 시리즈
조엘 펄먼 지음, 김재일 옮김 / 북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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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는 기적의 밥상이란 녹색 채소, 신선한 과일, 콩, 정제하지 않은 곡류, 견과류 등으로 차려진 소박한 밥상을 말한다. 저자는 하루에 섭취하는 음식의 90퍼센트를 정제되지 않은 식물성 식품으로 구성하라고 조언한다. 또, 정제되지 않은 식품 가운데서도 녹색 채소를 주식으로 삼으라고 당부한다. 자연의 재료를 굽거나 끓이게 되면 각종 효소가 파괴되므로 가능하면 생식이 좋고, 조리를 할 경우에는 최소한의 양념을 사용해서 요리 절차를 최대한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트렌스지방을 함유한 일체의 가공식품, 육류, 유제품, 달걀. 반면에 녹색 채소는 시도때도 없이 위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많이 먹으라고(심지어 저자는 '샐러드가 주식이다'라는 표어를 냉장고에 크게 써서 붙여놓으라고까지 말한다). 혹시 녹색 채소만 먹으면 단백질이 부족해서 허기지지 않을까. 저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육류나 유제품을 통해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녹색 채소만 통해서도 충분한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동물도 오로지 풀만 먹고 그토록 우람한 체형을 유지하지 않는가. 칼로리 당 단백질 함량으로 계산해보면 녹색 채소 만큼 그 함량이 높은 음식도 없다고. 단백질 뿐만이 아니다. 녹색 채소는 칼로리 당 영양소 자체가 다른 식품보다 월등히 높다.     

한편, 저자는 정부가 제공하는 올바른 식품 섭취 가이드가 엉터리라고 일갈한다. 거기에는 육류와 유제품이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나와있지만, 사실 이것은 양계업자와 낙농업자, 축산업자들의 입김이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한 결과물일 뿐이다. 육류와 유제품은 가능하면 먹지 않는 편이 건강에는 오히려 도움이 된다. 반면, 채소와 과일은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 몸에 이롭다. 혈당 수치를 낮추고, 심근경색의 위험성을 줄이고, 각종 피토케미칼을 공급하고, 해독작용을 하는 등 이 책에서 언급된 생채식의 이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저자는 여러 번 강조한다. 육류와 유제품, 가공식품, 흰쌀밥과 빵을 비롯한 정제된 탄수화물 일체를 끊어라. 오로지 밥상을 생채소와 생과일, 버섯, 콩, 정제하지 않은 곡물, 생견과류 등으로 가득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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