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수남 옮김 / 청하 / 198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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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해 회의하고, 기독교적 세계의 허위성에 대해 구토를 일으키기 시작할 때- 니힐리즘이라는 징후가 시작된다. 인간이 절대 가치를 회의하고 구토하게 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는 힘, 니체는 그것을 “성실성”이라고 말한다. 성실성은 도덕(도덕적 가치판단- 문명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계발된 덕목)이 양육한 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여물어서(?) 자기를 양육한 도덕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 <성실성>이 양육되어 온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믿는 일의 결과이기도 하다.”(31)

물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인간에게 나름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의 비소성(卑小性)이나 우연성과는 반대로, 인간에게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인간은 그리스도교적 피안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현실의 재난이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경멸하지 않도록, 사는 것을 적대시하지 않도록, 인식하는 일에 절망하지 않도록 지탱시켜 주었다.” 이는 하나의 “보존수단”이었다.(32)
 
모든 발생하는 사건의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것, 세계에는 여하한 진리도 부재하며, 사물의 여하한 절대적 성질도, 여하한 물 자체도 없다는 것을 통찰한 인간이 돌파구로 마련하는 것은 세계를 미망(迷妄)으로 판결하는 일이다. 그리고 생존의 성격을 참이 아니라 거짓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공(空)으로 여기는 일이다. 그러나 참-거짓의 분별 또한 단순화된 세계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설정해낸 가상적 가치일 뿐이다. “무가치성에의 신앙”을 보여주는 이러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이며, 하나의 중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36)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면, 그것은 생에 관해서는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무든 종류의 원망(願望)의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39) 즉, 그것은 생 자체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절대적 X, 대타자, 원대하고 심오한 모든 가치들, 이상, 초인간적인 권위에 의하여 세워지는 불변하는 가치, 우리가 위안으로 삼고, 순응하고, 복종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들에 대한 환멸이다. 그것은 세계의 무도덕성, 무목적성, 무의미성을 간파한 자가, 오로지 힘의 작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통찰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환멸이다.

이렇게 우리가 환멸을 느낀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의 해석(모든 도덕적 가치판단,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 그 자체라고 여겨지고 있었던 까닭에, 마치 생존 가운데에서는 여하한 의미도 전혀 없기라도 한 양, 마치 모든 것이 헛수고이기라도 한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59)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절망적인 ‘헛수고’는 아니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기는 있는가? 니체는 이에 대해 “이 사상(니힐리즘)을 그 가장 두려워해야 할 형식으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의미나 목표는 없으나, 그러나 무(無) 가운데로의 하나의 종국을 갖는 일도 없이 불가피적으로 회귀를 계속하고 있는 그대로의 생존, 즉 <영원회귀>. 이것이 니힐리즘의 극한적 형식이다. 즉, 무(無, 무의미한 것)가 영원히!” 

니체가 무(無, 무의미)의 영원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적 영원성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어떤 궁극의 지향점도 파기해버렸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성이란, 주름과 표피에서 일어나는 모든 표면적 현상의 영원성이다. 거기에는 삶을 초월하는 그 어떤 절대 가치나 목표도 없이, 그저 끊임없는 현상으로서의 연기(緣起)와 유전(流轉)만이 있을 뿐이다. 끝없는 우연과 변화, 생멸이 영원히 반복될 뿐이다. 그것은 유희다. 호쾌하게 웃으며 언제든 뛰어들 만한, 대단한 유희다. 유희에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 과정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을 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과정으로부터 목적 표상을 제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정을 긍정할 것인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과정 내에서 어떤 것이 이 과정의 순간마다 매번 달성되고 게다가 항상 대등한 것인 경우이리라.” 

니힐리즘은 기본적으로 데카당스의 징후이다. 그러나 “퇴폐, 퇴락, 폐물이, 그 자체로 단죄 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증대의 한 가지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데카당스 현상은, 삶의 무언가의 상승이나 전진과 동일하게 필연적이다. (...) 사회가 정력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실패나 기형아로 가득차고, 더욱더 쇠퇴에 가까워진다. (...) 데카당스 자체는 배격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의적이게도 퇴락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하다. 초월적 가치나 신앙을 파기해버리고도 생존한다는 것, 즉 일체의 무게중심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강함인 것이다. (그런 가치들- 철학이니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모든 지고의 가치에 의존하여 정신의 안정을 구하는 인간이야말로 "정신의 허약자, 정신병자, 신경쇠약자"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약함’을 인간의 전반적인 성질로 본다; “사람은 약함을 욕구한다. 왜? 대체로, 사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인간을 약함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사람은 약함을 극복함에 있어서, 강장한 방식에 의하여 하려고는 않고, 일종의 시인이나 도덕화에 의하여, 바꾸어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강장한 방식이란? 그것은 억제나 극기, 금욕이 아니다. 무반응과 무관심과 무시다! “우행(愚行)을 예방하기 위한 처방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데카당스의 징후이면서 또한 강함의 징후이기도 한 니힐리즘은, 수동적 니힐리즘에서 더욱더 더 나아가, 즉 더욱더 철저히 몰락하여, 궁극적으로는 몰락의 극단으로 치달아 파국을 맞이해야 한다. “철저한 몰락은, 파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의 철저한 자기 몰락으로서, 본능적 도태로서 나타난다. (...) 훨씬 깊숙한 본능의, 자기 파괴나 무(無)에의 의지의 본능의 의지로서의 파괴에의 의지.”(61) “우리가 극단적 몰락으로 치달을수록 곤궁이 커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62) 몰락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화”다. 철저한 몰락 속에서 맞이하는 철저한 부정. 그리고 오는 광명. 능동적 니힐리즘. 최후의 니힐리즘은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그것은 “절반은 파괴적, 절반은 반어적인, 정신의 가장 강력한, 더할 나위 없이 풍요한 삶의 이상으로서의 니힐리즘”이다.

최후의 능동적 니힐리스트, 그는 의도도 의미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연과 변화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영원한 생존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줄 아는 자”다. “여하한 신앙개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우연이나 무의미의 대부분을 그저 용서하기만 하지 않고 사랑하는 자, 인간에 관해서는 그 가치를 상당히 할인하여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일에 의해 비소해지고 약화되는 일이 없는 자이다. 즉, 대개의 불운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에 도달하고, 이 때문에 불운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건강에 가장 부한 자- 스스로의 권력에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달성된 힘을 의식적으로 과시하면서 대표하는 인간.”(63) 

니체는 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절망했던 자였으면서 또한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무한한 생의 환희를 느끼고 박장대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과 도덕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이 극단의 페시미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나의 <비극의 탄생>의 여기저기에서 번져 나오고 있듯이), 나는 정반대의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인간만이 웃는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닐까.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고뇌하는 것이다. 가장 불행한 가장 우울한 동물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장 쾌활한 동물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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