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모든 물체(things)는 어떤 점에서 합치한다”(에티카, 정리13의 보조정리2)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모든 사물에 공통적이며 부분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 동등한 것은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는다.”(에티카, 정리 37) 모든 물체는 ‘어떤 점에서’ 합치하는가. 개체의 본질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개체에 있어서나 전체에 있어서나 동등한 ‘그것’은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이를 ‘공통개념’으로 정의한다. 올덴부르크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가령 림프와 카일(당시 혈액의 구성성분으로 알려진 것들) 등등이 각각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비례를 이루어 결합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면, 그것들은 이런 측면에서 피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피 안에 피의 입자들인 림프와 카일을 서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입자들이 서로 만나 밀쳐내기도 하고 자기 운동의 일부를 전달하기도 하는 방식을 볼 수 있는 작은 벌레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작은 벌레는, 우리가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듯이, 피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피의 각 입자를 부분이 아닌 전체(각각 하나의 온전하고 고유한 전체)로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 벌레는 어떻게 모든 부분들이 피의 일반 본성에 의해 변양되고 서로 적합하게 되도록 강제되는지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는 각 신체가 특수한 방식으로 변양되어 실존하는 한에서, 전체 우주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체와 일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과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주의 본성은, 피처럼 제한된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무한하므로, 그 부분들은 이 무한한 능력의 본성에 의해 무한히 변용되고, 무한한 변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체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나는 각 부분이 전체와 아주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니다.” 

피 속에 사는 벌레는 피를 구성하는 하나의 입자로서 이미 피의 흐름을 타고 있지만, 벌레는 피 자체를 외부의 개별적인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벌레의 인식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벌레는 림프와 카일이라는 외부의 대상이 제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저마다의 운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벌레와 림프와 카일에게 공통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의 흐름이다. 벌레와 림프와 카일은 피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다. 그들은 피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서로 어울려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또한 그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다. 리듬이 사람들 각각의 특이적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리듬은 춤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분유하고 있는 어떤 속성이다. 속성을 분유하고 있지 못한 개체는, 그러니까 리듬을 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춤동작도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한 사람은 그 리듬에 맞추어 다양한 동작들을 만들어내고, 사람들과 더불어 춤출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리듬이 고정불변한 법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개체가 리듬에 참여하게 되면, 리듬은 그 개체로 인해 변화한다. 마치 새로 온 사람이 모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듯이.

(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인식 수준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개체들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총체적인 리듬과 하모니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개체적 수준에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이미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것에 맞추어, 그것에 몸을 맡기어, 그것을 한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미 신의 일부로서 신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림프와 카일이 피의 입자로서 피의 흐름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리듬의 장(場)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리듬을 타면서 동시에 그 리듬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원자 물리학의 아이러니와도 비슷하다. 원자 물리학에서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원자라는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대상이 관찰되는 과정의 연쇄에서 관찰자가 그러한 연쇄의 마지막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시물리학에서는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반드시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원자를 터럭 끝까지 파고들면 우리는 원자와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원자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을 아원자 수준까지 파고들면, 개체로서의 대상은 휘발해 버리고 타아개념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존재는 없고, 가능성(확률)과 관계만이 남는다.  

스피노자가 말한 공통개념과 미시물리학 이론(‘미시’라는 것도 사실상 인간 개체의 수준에서 봤을 때의 ‘미시’가 아닌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현실야말로 ‘미시적’인 종류일 것이다. 어쩌면 아원자 입자의 내부 세계와 내가 부딪히는 일상의 현실, 그리고 별의 운행과 은하의 생멸을 포함하는 우주적 사건들- 인간 개체의 수준으로 분류해 볼 수 있는 이러한 각각의 차원의 장(場)에 어쩌면 프랙탈 모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동일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을 내가 사는 현실세계에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실은 내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내 앞에 무자비하게 던져진, 불변의 운명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내가 그것에 개입함으로써 극적으로 변화한다. 내가 현실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개입하여 새롭게 창조해낸 현실, 이것을 불가에서는 아상(我想)이라고 부를 것이다. 스피노자라면 그것을 '우리 신체에서 생산된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고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다만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낸 변용, 즉 이미지일 뿐이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상을 허망한 것으로 본 반면에, 스피노자는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환상, 상상, 착각, 환각, 즉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의 모든 착각에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알 수는 없는, 그러나 신의 섭리라고 할 만한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상상하는(내지는 착각하는) 능력이란, 의지가 이성을 방해하여 생긴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덕(능력, virtu)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근본적으로 우리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하라지는 대상이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것 자체마저 착각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감각이 인식하고 마음이 해석해낸 것들 모두는 의식 안에서 시공으로 확장되어 나타난 것이며, 지각된 대상을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착각 때문에 대상화된 것입니다. 모든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이 전체적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하라지는 참된 앎을 위해 우리의 관점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사물을 분리된 마음인 개체적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보라고, 근원으로부터 보라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근원'이다.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는 그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입니다. 그때, 오직 그때에만 전체적인 인식, 바른 봄과 이해가 있게 됩니다." 근원으로부터 보는 것이란 어떻게 보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근원으로부터 볼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는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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