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의 중에 흥미롭게 들었던 대목은 ‘전향’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곱씹어 보면: 

 

노예가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주인의 경지로 ‘이행’할 수는 없다. 다만, 노예가 ‘전향’을 통해 일거에 새로운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전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사건의 체험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2)차이의 파토스 속에서 자신의 노예적 상황(?)을 준열하게 응시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다. 처절한 자기 응시가 극한에 달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어떤 전환, 이것은 변증법과는 다른 종류의 도약이며, 이것이 ‘전향’이 될 수 있다.

 

(1)과 관련해서 더 생각해 본 것인데요. 주체를 독립적이고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작용(칸트 식으로 말하면 통각작용) 내지는 작용의 효과로 정의한다면, 새로운 배치 속에서 접속하는 항이 달라진 주체, 그러니까 새로운 배치 속에서 다른 ‘기계’가 된 주체 또한 전향이 일어난 주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사건’이 통시적인 측면에서 각각의 어떤 상태(항)들이 계열화되는 것을 뜻한다면, 공시적인 측면에서는 ‘배치’의 문제를 주목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에 직장에선 전형적인 원한의 인간이자 초특급 노예인데 공부하러 오면 그래도 좀 주인다워지거든요. 처해 있는 환경(물적 토대)에 따라서, 그러니까 어떤 배치의 장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힘의 발생 양식도 사뭇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능동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배치의 장 속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배치(환경)를 스스로 창조해낸다든지 함으로써 주인으로의 전향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배치 속에서 전혀 다른 기계가 됨으로써 말이죠. 물론 포괄적인 범주에서 보면 이 또한 '사건의 체험'일 수 있겠습니다만...

 

선생님의 답변: 사건은 통시적인, 즉 크로노스(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평평한 시간, 그러니까 아이온(영겁회귀)의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게 아닐까요? '전향', 내지 '존재변이'를 위해 우리는 통시적인 사건을 겪는 게 아니라 영원회귀적인 사건을 기다리고, 혹은 창조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배치'가 어떤 초월론적 '장'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공시적으로 보이지만 그 선험적 장에는 시간성이 내포되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장의 변이(차이생성)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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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선생님이 던지신 화두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엉켜가는 것 같습니다. 뭔가 복잡한 대로나마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먼저 선생님이 던져주신 화두가 갖는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입니다.

 

강의 중에도 말씀 드린 바 있듯이 A라고 하는 어떤 대상을 정의(인식)하는 방법으로는, ①not A와 A 간의 차이의 정도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A 외적인 것에 의존하는 방법) 외에도 ②not A라고 하는 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A 내부에서 발생하는 차이(A를 존재하게 하는 A의 속성들)에 의해 A를 정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작년에 남산에서 했던 이수영 선생님의 <니체와 철학> 강의때 주워들은 거예요^^;;)

 

저는 ‘타자’라는 어휘 자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①의 방식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타자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어떤 딜레마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라는 용어에 갇혀있는 인식 방법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즉 ①번의 인식 방식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다른 인식 방법을 통해 극복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상의 정의에 대한 두 가지 인식론적 방법을 응용(?)해보면, 인간의 인식 활동은 ①인식하려는 것을 타자화시킬 수 있는, 즉 대상화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한 부분이 있고, ②반대로 거리를 아예 두지 않음으로써, 그러니까 대상에 참여함으로써, 대상과 겹쳐짐으로써, 융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어떤 '몰아'의 상태 속에서 ‘존재론적 닮기’를 통해 가능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업시간에 잠깐 언급한 바 있듯이 '여행'이라는 체험을 통해서는 전자의 인식 활동이, '정주'의 체험을 통해서는 후자의 인식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저는 ②번 역시 하나의 명백한 인식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식일 것 같습니다. 이 또다른 차원의 인식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식의 영역에 포섭되기 위해서는 차후적으로 언어의 외피를 걸쳐야 할 것이겠죠. 언어라는 객관적 인식의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겠죠. 어쩌면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20년 동안 침묵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하고요.

 

제가 예전에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프리조프 카프라, 범양사)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요. 그 책에 따르면, 현대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질의 아원자 단위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양면성을 띠는 매우 추상적인 실체입니다. 그것은 입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파동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로 더 이상 분해가 불가능합니다. 대상을 뚫고 들어가 보면 볼수록 자연은 어떤 독립된 기본적인 구성체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그물의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아원자 세계를 탐구함에 있어 그들 '그물의 관계'들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자까지도 포함합니다. 인간이라는 관찰자는 관찰되는 과정들의 연쇄에서 마지막 연결을 이루며, 어떤 원자적 대상물의 성질도 단지 관찰자와 대상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원자물리학에서는 관찰에 참여하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물리학의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의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식이 극도로 치열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순수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대물리학의 분야에서와 같이) 타자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생기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지점을 넘어서면 더 이상 ‘타자’와 ‘인식’이 동시에 한 문장 안에서 사유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수업 시간에 잠시 언급했던 청량리 이야기는 이런 맥락과 닿아있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입니다. 청량리 중에서도 할렘가(?) 쪽에 첫 직장을 얻어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부랑자, 노숙자, 성매매여성, 정신이상자, 술 취한 사람, 싸우는 사람, 길에서 잠자는 사람, 돈 달라는 사람, 안 씻는 사람, 신발 안 신고 다니는 사람 기타 등등을 마주하게 되었는데요. 저로서는 그런 세계(?)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던 거 같아요.

 

처음에는 동정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이란 얼마나 위선적인 감정인지요. 동정이라는 감정의 배후에는 ‘동정을 느끼는 대상’과 ‘동정하는 나’의 처지(성별, 나이, 생활환경, 경제력, 지능, 사회적 지위 등)가 서로 다르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의 총체적 처지가 대상의 그것보다 좀 더 우월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그제야 비로소 ‘역치값 이상이 되는’ 감정이 동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지가 다른 타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와 내가 서로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는 거밖에 안 됩니다. 동정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와 나의 명확한 선 긋기인 셈이죠. 명확한 선을 긋고, 그 선 너머를 쯧쯧 거리며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이 동정인 것입니다. 대단히 졸렬하고 저급한 수준의 감정적 이해입니다. 대상으로부터의 거리가 똑같다는 점에서 동정은 혐오의 이면이 아닐까, 그러니 동정을 베푼 대상은 동시에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복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동정과 혐오가 야누스의 두 얼굴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기까지 딱 일 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청량리에서 근무하던 시절, 만약 제가 위선을 저지르지 않고 양심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저는 그때 그들 안에 들어가서 '부대끼는 게' 옳았습니다. '부대낀다'는 것은 저에게는 그러니까 존재론적 닮기, 동일화, 그들과의 처지가 똑같아지는 것(사고의 양태까지 모조리)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저는 카메라를 들고 사창가 골목을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며(‘사진찍기’는 결코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제가 청량리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자기 본위로 타자를 이해하려는 대단히 자족적인 활동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심각한 폭력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꽤 나중의 일입니다), 청량리를 청량리라고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청량리 사람을 청량리 사람으로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저는 청량리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세수하고 이 닦고 잠자는 것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그러나 그때 저 스스로에게 ‘너는 과연 이들과 부대낄 자신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늘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부대끼고 싶지 않고, 어울리고 싶지 않고, 제가 그은 선을 지우는 것이 무섭고 두렵고 싫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청량리에 적을 두는 동안 제가 도달할 수 있었던 한없이 초라한 사유의 최종점이었고, 그 결론이 보다 일진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기회를 갖기도 전에 다른 사정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뭔가 해소되지 못한 꺼림칙한 마음으로 청량리와는 영원히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타자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타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라는 오늘 선생님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타자는 저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청량리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량리라는 타자는 저로서는 아직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어쩜 아마도 저에게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해서 따끔거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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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 랜덤 시선 39
박진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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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디 장미가 아르바이트로 피던가 일용직으로 계약직으로 피던가 십 년 거치 십 년 상환으로 피던가 월세 삼십만 원으로 꽃망울 터뜨리던가 작문연구 교양국어로 일렁이던가 박사논문 시간강사로 출렁이던가 // 꽃이면 그냥 꽃인 게지 아라리인 게지 제 질 자릴 보고 언제 장미가 피던가 흐르는 피여, 비화(飛火)하는 혼이여, 오늘밤은 언어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입가에 피 묻어서 장미처럼만 넋이 붉어져야겠다 너는 장미의 남방한계선으로 나는 장미의 북방한계선으로 꽃 피우러 가자 붉고 서러운 아라리로 불 지르러 가자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박송이 너는 <장미, 불꽃 아라리-박송이에게> 中에서

아라리가 난 거랑께 의사 냥반, 까운에 환장허겄다고 달라붙는 햇살이 아라리가 나서 꽃잎을 흔들자뉴 오메 발병 원인은 불안 강박 우울 공황 발작, 이런 게 아니라 아라리가 나서 그렇탕께 왜 심전도는 찍자 그러는규 술판서 언 눔이 아리랑을 불러 재끼는디 아라리가 헉 하고 피를 토해내능규 복분자가 요강을 뒤집어엎는 것맹기루 아라리가 내 몸도 이렇게 뒤집어서리 환장허겄다고 나도 아라아리가 나아안네 부르고 있는디 내 몸이 꽃이파리마냥 바르르 떨고 있는디 그 냥반들이 응급실에다 나를 처넣은규 숨이야 아라리가 쉬겄지 심장이야 지 혼자 팔딱팔딱 하는 거구 긍께 의사 냥반 이 담에 병원 와서 불안하고 우울하담서 뒤집어 자빠진 사람 있으믄 아리랑 한 번 불러주슈 아라리 땜시 잠시 잠깐 그랑깅께, 저 꼰잎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는 아라리 몸 좀 보소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믄 아라리 한번 재껴부리믄 돼쥬, 나 갈라유! <아라리가 났네> 전문

우리가 낱말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시인이야말로 궁극의 권력자가 아닐까. 오로지 시인만이 낱말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낱말을 채집할 뿐 아니라 독점한다. 독점한 낱말에 자신을 새겨넣으므로써 시인은 그 낱말이 사어가 되는 날까지 불멸한다. 시(詩)는 특정 시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낱말을 더 이상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구태여 언급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낱말의 소유주를 의식해야 한다. 마치 보이지 않는 로열티를 지불하듯이. '딱딱한' 것이 기형도 시인의 것이고, '동백'이 송찬호 시인의 것이라면, '아라리'는 박진성 시인의 소유다. 그 누구도 '아라리'에 관해서라면 박진성 시인만큼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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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외부 클리나멘 총서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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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부동적인 대지에 균열과 불안정의 틈새를 회복"하려는 푸코의 전복적 사유는 후기에 이르러 자기를 배려하는 윤리적 주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책 4장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실천이라는 다소 소박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푸코 사유의 개념적 난점에 주목하고, 그러한 난점을 극복할 만한 실마리를 모색한다.

이 책에 따르면, 푸코 사유의 한계점이라고 할 만한 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권력 관계에 주목하다보니 권력을 선차적인 것으로 상정해 버린 것. 사실 권력이라는 개념이 정의되려는 순간 이미 논리적으로 필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권력에 의하여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 권력을 통해서 특정한 활동의 형식을 부과하지 않으면 안 될 무언가”의 존재. 그것은 “그대로 둔다면 제멋대로 활동해서 정해진 질서를 깨뜨릴 것이 분명한 위험스럽고 불온하고 무질서한 힘”이다. 리비도나 욕망 같은 것. 푸코는 전제가 되는 이 힘에 대해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

권력을 정의하고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전제가 되는 그 힘은, 그대로 놔둔다면 어떠한 질서나 형식, 정해진 관계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탈주적인 힘"이다. 권력이란 바로 이 힘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고, 이 힘을 길들이고 포섭하는 것이며, 이 힘에 어떤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그것을 생산적인 어떤 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저항’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선차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힘’이다. (탈주적인 힘의 선차성!)

이 책에서 언급하는 푸코 사유의 두 번째 한계점은 그의 권력 이론에 ‘적대’의 개념이 결여되어있다는 것. 푸코에게 '적대'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말하는 적대란 결코 집단 간의 적대가 아니라, 지배집단과 개인, 혹은 권력의 전략과 개인 간의 적대일 뿐이다. 그는 적대를 모든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써 사유하고, 그러한 사유는 결국, 권력관계나 권력의 배치를 그대로 둔 채 다만, 대상을 개별화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정체성을 묶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또 권력에 의해 이미 주어진 개인적 지위에 대해 저항하는 소극적인 수준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저자는 푸코가 말한 ‘개별자 간의 대립’으로서의 적대와는 또 다른 종류인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로서의 적대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전자로부터 ‘저항’이 생겨나듯이 후자의 경우에는 ‘투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즉, 권력과 탈주적 힘 사이에서 ‘저항’이 정의된다면, ‘투쟁’은 다양한 ‘집단 간 적대’에 의해, 나아가 적대하는 생체권력들 사이에서 정의되는 것. 저자는 저항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생체권력을 지닌 집단들 간의 ‘투쟁’과 결부될 때, 비로소 적대적 관계를 전복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이란 단순히 권력관계의 전복이나 권력의 대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투쟁과 결부된 저항의 진정한 가능성이란, 권력관계의 형태변환, 즉 ‘배치의 전복’을 내다보는 것이다.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기존의 권력기술에 의한 권력배치를 재편하는 것이다.

저자는 집단 간 적대(=몰mole적 적대)에 주목하여 투쟁과 결부된 저항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새로운 권력기술을 창조하여 배치의 재편을 기도하는 생체정치를 제안하지만, 과연 역사상 투쟁이라는 방식에 의해 배치가 재편되었던 기존의 사례가 있는가.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배치의 변화는 어떤 집단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니라, 개인들 내면의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인식의 변화, 사유의 변화, 그것의 적층에 의해 이루어져 오지 않았나. 저자는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사유의 변화’를 생체정치에서 기대할 만한 효과라고 보는 걸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푸코에 따르면 그 어떤 배치 변화도 당대의 인간의 인식 수준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배치의 변화를 당대의 인간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기획한다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어쨌든, 푸코한테서 영감을 얻은 저자는 계급투쟁을 생체정치의 차원에서 다시 사고하자고, 미시적인 수준에서 혁명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자고 말한다. 계급적 관점에서, 몰적 적대의 관점에서 생체권력의 변환을 사고해보자는 것. 대중과 결합하거나 대중을 장악하는 문제를 생체정치의 문제로서 다시 정립해보자는 것. 생체정치적 효과의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포착해 보자는 것. 아마도 저자는 자본주의체제 내부의 무수한 맹점으로부터 발아하는 조용한 혁명, 내부 안에 숭숭 뚫린 외부로부터 서서히 번져나가는 혁명, 초유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이 챕터에서는 맑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맑스와 푸코를 혼합하기에는 서로 간에 층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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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넘도록 땀에 흠뻑 젖어 쓰러지기 직전까지 춤을 추고 있으면, 이제껏 읽었던 고색창연한 텍스트들이 죄다 이 순간을 위한 구차한 수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이나 시에 감전될 때의 경우와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더없이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순간의 어떤 강렬한 환희의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춤판에서 느꼈던 그 무량한 환희야말로 이 세계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비밀스런 원천이라고 근거도 없이 확신해 봅니다.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곱게 몸을 누이는 갈대들처럼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 내 몸을 리듬에 완벽히 일치시킬 때, 온몸의 세포가 올올이 발기하던 그 벅찬 생동의 순간- 이는 단지 플로어 위에서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어쩌면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자기를 최대한 표현할 때 만끽하게 되는 감격적인 절정의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09년도에 적었던 자기소개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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