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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글집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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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지식전문가들이 직업상 습득한 학문은 보편을 지향하는 전문 이론인데도, 기실 그들은 특수지배계층의 필요에 의해 양성되어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복무한다. 이것이 바로 이들 계층의 모순이다.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와 출신계급에서 비롯한 특수주의 사이의 모순. 자신의 학문적, 직업적 역할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계급을 부정하게 되어있으면서도 정작 태생적으로는 그 계급에 의해 조건지어진 존재라는 모순. 특수층이면서도 또한 지배자들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모순. 지식인이란, 이러한 모순을 깨달은 사람이다. 

지식인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순적 성격 때문에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 속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은 사회를 억압하고 다수를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해명하고 은폐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지식인은 항상 구체적 사실과 마주쳐야 하며 그때마다 늘 구체적 해답을 가져야만 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가장 효과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존재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자기 자신을 두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가장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인은 한 번도 접촉해본 적 없는 노동계층의 객관적 정신을 대변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모순은 불가피한 것이고 완벽하게 극복될 수도 없다. 다만 지식인은 부단한 자기비판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끊임없이 재인식해야 한다. 또한 지식인은 자신이 계급적 특수성에 안주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하고, 계급적 특수성에 기반한 사고체계를 형성할 위험에 대해서도 또한 경계해야 한다.

"보편의 전문가가 민중의 보편화 운동에 기여하는 것은, 바로 한 번도 그들과 동화된 적이 없고 격렬한 행동중에 마저도 그들로부터 따돌려지는 인간, 갈갈이 찢긴 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는 분열된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서인 것이다. 지식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위해 그 모순을 초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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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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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 늦가을을 제일로 / 숨겨놓은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살아도 살아갈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과일을 다 가져가고 / 비로소 그 다음 /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 혼자서 / 다 바라보는 / 저곳이 / 영리가 사는 곳 /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 늦가을 빈 원두막 /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전문

 

시인은, 과일 떨어지고 난 빈 밭은 아직 제대로 된 늦가을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일 다 떨어진 다음에, 그 다음에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자잘한 잎사귀들마저 하나 둘 지기 시작하고 종내는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잎사귀마저 스러지는 것, 그게 진짜 늦가을이라고 한다. 시인에게 있어 빈 원두막은 그런 광경을 혼자서 오롯이 다 바라볼 수 있는 장소이고, 그래서 늦가을이라는 계절을 가장 진정으로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원두막은 '영리'가 사는 곳이다. 

시를 읽다가 아무래도 시인이 '영리'라는 시어를 일부러 (한자어로 쓰지 않고) 한글로 남겨놓아서 뜻을 모호하게 처리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리'의 한자어를 찾아봤는데 웬걸, 날카로운 의혹이 무색하게도 그냥 '영리할 영'에 '영리할 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영리할 영'이라는 한자가 영리하다는 뜻과 함께 '지혜롭다,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 어여삐 여기다, 귀여워하다, 사랑하다'의 뜻도 있더라. 옛날엔 '가엾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영리'한 거였구나. 아, 그렇구나.

 

늦가을 지나기 전에 빈 원두막에 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바라보고 나서 아주 조금은 영리해져 돌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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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동해가 아니어도 좋았다.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미지의 소도시라면 굳이 동해가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청량리발 동해행 무궁화호 열차표를 끊고 나자 어쩐지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반드시 동해 여야만 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비 개인 다음 날이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보도블럭이 꺼진 자리마다 물웅덩이가 복병처럼 숨어있었다. 배낭을 지고 카메라를 목에 맨 나는 누가 보아도 주5일제의 특혜를 얻은 여행객의 차림이었겠지만 나는 어쩐지 나 자신이 유배지로 향하는 유생이나 근신할 곳을 찾아 유랑하는 난민처럼 여겨져서 설레기보담은 그저 담담하고 약간은 헛헛한 기분이었다.

미놀타와 몇 판 남지 않은 일회용 카메라 두개, 샴푸, 린스, 로션 등속을 챙기고 기차간에서 읽을 책으로 이문구의 <관촌수필>과 프리조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을 넣었다. (후자는 아무래도 동해 여행보다는 정독 도서관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으나 읽던 책이라서 미련을 못 버리고 챙겨 넣었다. 여행지에서 그다지 많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굳이 들고 간 까닭은 시험 전날 동아전과를 베고 자면 올백 맞는다는 어린 시절의 미신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욕심 많게도 CD를 여섯 장이나 넣었다. 버리려고 떠난 여행인데 등짐만 한가득 이어서 여간 볼썽사나운 꼴이 아니었다.  

저녁 여덟 시 쯤에 동해역에 내렸더니 추암 바닷가 가는 버스가 벌써 끊긴 모양이었다. 택시 타고 십분 정도 가니 바닷가였다. 나는 방 하나에 2만 5천 원에다가 대전엑스포 기념 자수가 박힌 초록색 수건을 서비스로 제공해주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민박집 바깥쪽은 구멍가게랑 연결되어 있었는데, 으슥한 가게 안에 골동품 가구처럼 박혀있던 주인 할머니가 날더러 혼자 왔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였더니 혀를 끌끌 차셨다. 측은해서 그러시는지 한심해서 그러시는지 종시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묵은 곳은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같은 방이었다. 이 작고 괴괴한 낯선 방이야말로 나의 본질에 다름없는 것 같다는 기묘한 기분 때문에 나는 몹시 뭉클했다. (너무 길어져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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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 mir bist du schon- 당신은 아름다워요. 스윙빠에서 틀어주는 음악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곡을 꼽으라면 영화 스윙키즈에 나왔던 이 노래를 꼽겠다. 곡이 중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박자가 느려지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춤동작은 일제히 슬로 모션으로 바뀐다. 이 때가 장관이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바람 부는 방향으로 몸을 누이는 갈대들 같고, 추위를 피해 대열을 이루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무리 같다. 음악이 되었든 자연의 섭리가 되었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일제히 조응하는 생명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숨막히는 풍경이다.

 

늘어난 박자에 맞추어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동안 누군가는 땀을 닦고 누군가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때로는 손을 맞잡은 상대를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음악이 장난을 걸어서 웃음이 나고, 무언가에 심취하여 땀 흘리는 서로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웃음이 난다. 아니면 느려진 음악에 스텝을 헛밟아서 민망한 웃음이 새어나오거나. 어떤 연유로든- 잠깐의 여유를 부리며 웃을 수 있는 그 때가 나는 참으로 좋다. Bei mir bist du schon에 맞추어 춤을 출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그다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심지어는 말 한번 주고 받은 적이 없는데도, 바에서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치는 동호회 사람들에게는 일방적인 친근감이 생기는 것 같다. 상대를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무한한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아마도 춤과 음악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견고하게 만드는 매개가 되어주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스윙에 심취하는 까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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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 미디어사상총서 1
손석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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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한국 근현대 언론의 전개 양상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공론화 요구의 내부적인 배제’와 ‘외부 정치 세력에 의한 공론장의 왜곡’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 갈등하는 형국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구조 속에서 ‘체제 안의 공론장’에 맞선 ‘민중 차원의 저항 공론장’이 억압과 분출의 변증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 확대되어 왔다고 분석한다. 이상이 5장까지의 내용이며, 내가 주의깊게 읽었던 부분은 하버마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6장이다.

6장에서 저자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구조 변동 이론’을 소개한다. 하버마스는 국가와 사회, 혹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개념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특질을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생활세계’가 점차 합리화됨에 따라 ‘체계’ 역시 자체 내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화하며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생활세계’가 합의 도출적 의사소통의 절차를 지향함에 비해, ‘체계’는 신속하고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성격을 가지며, 이런 차이 때문에 체계가 점차 생활체계를 침투, 잠식해 들어간다. "목적 합리적 ‘체계의 논리’가 의사소통 절차를 거쳐 합의를 도출해내는 생활세계의 내적 구조를 침탈, 대체함으로써 생활세계의 고유한 특성과 상호이해의 통합적 구조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빈부격차 심화, 신중상주의정책으로 인한 국가 간섭, 매체의 상업화 등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공론장이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공론장의 재봉건화).

이 책은 하버마스의 이론을 도입해 한국의 언론 지형을 분석하고 있지만, 하버마스에 대해 생소한 나로서는 하버마스 입문서나 다름 없었다. 논문을 윤색하여 출판한 글에 쉼없이 순우리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지며리, 밑절이, 시나브로, 허투루, 비금비금 등 문맥에서 떼어놓고 보면 여간 낯선 단어가 아니다. 저자가 소신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순우리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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