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다가 그만 호랑이 기운이 넘쳐흘러 청소기 목뼈를 똑 분질러버린 것이 벌써 엊그저께 일이다. 남아도는 힘 때문에 세간을 다 말아먹게 생겼다고 자책하며 동대문 운동장역에 있는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더니만, 토요일이라 일찍 문을 닫아버린 모양이었다. 하릴없이 돌아가는 수밖에.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기가 싫어서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딴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잘못 들어 그만 남산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남산 국립극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때마침 온통 떨어진 은행잎 천지였다.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이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서비스센터도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까지 잘못 들어서 오늘은 온통 낭패의 연속이로구나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뜻밖의 기쁨을 누리게 될 줄이야.  

이것은 퍼머넌트 옐로, 저것은 인디언 옐로, 이것은 레몬 옐로에 올리브 그린을 섞은 것... 나는 은행잎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면서 화폭에 과연 어떤 색으로 옮길 수 있을지 미간을 오므리고 가늠해보았다. 나에게는 이것이 한없이 비밀스럽고 즐거운 놀이였다. 붓을 놓은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이렇게 느닷없이 색채가 만발해 있는 풍경을 마주하면 어디선가 틀림없이 유화 물감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 같고, 그러면 나는 당장에라도 캔버스 앞으로 달려가고만 싶다. 

그러나 나는 왜곡되지 않은 공정한 서술을 위해서 보다 냉철한 묘사를 감행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길임은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고약한 은행 냄새가 진동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남산 올라가는 길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각은 즐겁고 후각은 괴로워서, 걷다 보면 바야흐로 오감이 분열되고 정신 착란의 조짐까지 나타나는 참으로 상서롭지 않은 길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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