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5장에서 저자는 예배의 목적과 기능이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중심에서 피안을 발견한다고 하는 점, 즉 세속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교종에 가까운 입장이고 우파니샤드로 보면 라마누자에 가까운 입장인 듯하다. 

6장에서는 기존의 율법주의적 윤리관(=초자연주의적 윤리관, 예를 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등, 그리스도 교리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생활규범)의 허구를 지적하고 있다. 율법주의 윤리가 ①종교적 근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②예수의 교훈을 깊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도덕계율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비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랑’에 의거한 상황윤리를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 (...)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 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윤리’이다.”(p.151) 

7장 부분- 헉슬리를 중심으로 말하는 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는 ①진화론적 인본주의이며 ②계시가 없고 ③신이 곧 사랑이며(사랑이 곧 신이 아니라) ④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등을 특질로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p.167 하단~p.168 상단까지가 반박 부분인데 이해가 잘 안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구절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까뮈가 비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 즉 극도의 형이상학적인 우주 이해를 말하는 건가? 인본주의자인 헉슬리는 이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다.)  

한편, 초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 이해와 관해서 저자는, 영상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이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 영상들 자체가 아니면 실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 이것들은 우상이 된다고 경계한다. 상징이나 이미지, 영상들이 실재를 중개하는 대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게 될 때 위험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 3의 길(내재신성론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인 그 길)이 자칫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신화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그것이 결코 신화와 상징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신화나 초세계를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불신앙의 근거가 될 위험성을 가진 그러한 신화에 우리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p.172) 

저자는 우상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사색의 훈련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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