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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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고 또 읽어도 감동적인 시가 있다면 나에게는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그렇다. 삶의 궁지에서 자신을 이토록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연민도 회한도 머무르면 머무르는 대로 그저 담담하게 자신을 적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그런 생각을 하면 시가 참으로 귀하게 여겨진다. 슬프되 목놓아 슬퍼하지 않고 그 슬픔을 조용히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내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 할까. 얼마나 담대한 용기를 지녀야 할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극도의 자기연민과 자기증오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반복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신파적으로 느껴진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근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여,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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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이라는 게 참으로 신묘하다. 일단 날짜가 잡히면 하나도 반갑지가 않고 그저 벌써 또 회식인가 싶고 어떻게든 빠져볼 핑계 꺼리가 없나 빈곤한 머리를 쥐어짜며 궁리도 해보고 그렇지만 눈치 보여 도저히 말을 꺼낼 엄두는 못 내겠고 그러다가 고삐에 묶여 질질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참석하는 게 회식이라면 회식인데

 

막상 회식이 끝나고 나면 직장이 갑자기 마구마구 사랑스러워지고 직무에 대한 의욕이 불끈불끈 샘솟고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 나와 건배하는 이 군상들과 함께라면 중증 성인병 환자의 석달 분 처방전이 일시에 수십 장 쯤 몰려오더라도 일심으로 동체가 되어 조제기 모터가 활활 타버리도록 열광적으로 조제를 할 수가 있을 것 같고 뭐 그런 실로 괴이한 기분이 드는 거다.

 

그래서 회식 다음날이면 투지와 열정으로 충만하여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처방전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릴 기세로 일을 하지만 며칠 지나면 그것도 약발이 다 하는 모양인지 이내 속절없이 시들해져서는 문득 여기에 내가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구태여 이렇게 충정으로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날카로운 의구심이 생겨나고 이러다 내 청춘이 빛도 안 드는 골방 같은 조제실에서 다 썩어 문드러지겠다고 마음 속으로 절규를 해보기도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퇴근 시간은 자꾸만 더디게 찾아오는 것 같고 뭐 그런 지경이 되었을 때쯤에

 

놀랍게도 또다시 회식 날짜가 잡히니 신묘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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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29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증 성인병 환자의 석달 분 처방전'이 어떠한지 매우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_-;;;

yamoo 2010-07-3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너무 글을 재밌게 쓰시는 거 같아요^^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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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는 '전쟁'이란, 인명을 해치는 수위의 사회 갈등 전반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저자의 관점으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전쟁 뿐만 아니라 폭동, 테러, 무장세력이나 정부에 의한 숙청과 탄압까지도 폭넓은 범주에서 모두 전쟁인 것. 책에 따르면, 세계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와 위험하고 가난한 사회로 나뉘며, 대개 전쟁은 후자의 사회를 끼고 일어난다. 전쟁의 배후에는 반드시 군대, 경찰, 반정부 무장조직, 국제테러조직, 마피아조직 등의 폭력전문집단이 존재하며, 특히 가난한 사회의 폭력집단이 활용하는 폭력의 도구(무기, 자금, 정보, 네트워크)는 주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가 생산하고 수출한 것에 의존한다. 전쟁은 이런 식으로 양 사회 간에 자본과 자원이 순환하는 하나의 거대한 장(場)으로서 기능한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의 대표격은 미국이다. 이 책은 전쟁이라고 하는 장(場)에서 미국이 보여주는 패턴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미국은 자신의 '적'을 봉쇄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하여 전쟁을 벌일 국가나 무장세력을 지원한다. (2)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은 국가의 군대나 무장조직이 성장한다. 이들이 벌이는 전쟁이나 내전이 장기간 지속된다. 많은 무기가 유입되자 현지사회는 폭력화된다. (3)'적'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면 미국은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멈추고 손을 뗀다. 때로는 지원을 멈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어제의 동맹국을 오늘의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토사구팽식 외교정책의 대상으로 이슬람 세력이 많이 이용된다. 이슬람 무장단체가 미국에 테러하는 게 이런 까닭. (4)미국이 지원을 멈추고 나면 분쟁지역은 내전 상태로 방치되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가 된다.  

한편, 이 책에서는 현대세계의 폭력이 주로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를 끼고 일어난다는 점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주민들은 국제적 규모의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을 마치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재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는 그들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때로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선제공격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를 개조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마저 품게 된다고.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행태들이 현대세계의 폭력을 극복하려는 인류의 자세 치고는 대단히 이기적인 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란 본디 자기 안의 '위험하고 더러운 요소'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전가함으로써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저자는 국제사회의 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 국제기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1)무력충돌을 막고 (2)치안과 정치 제도를 정비하며 (3)점진적으로 군축을 감행하고 (4)사회기반을 재건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 내부에 만연한 '폭력의 문화'가 근절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폭력을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외부 세력의 개입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지구 저편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오늘 내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하루를 보낸 데 대한 필연적인 반대급부일 수 있다는 것, 국제사회의 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폭력에 찌든 사회구조의 내부적인 변혁이 궁극의 과제일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시민운동이 중요한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간과하게 되는 명제들을 절실하게 곱씹어보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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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단 말주변이 없고, 사실 말 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또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말로 하면 쑥스러워질 테니까 이렇게 '우리 하고픈 이야기'에 오랜만에 몇자 적어 봅니다. 오늘 우연히 주홍글씨의 위 대목을 읽게 되었는데 읽고서는 마음이 좀 먹먹했던 것 같아요. 직업인으로서의 제 모습이 이 목사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도 신념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죠. 신념이 없다는 게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데, 배부른 환경에서의 불필요한 결벽인가 아니면 배부른 환경에서의 불필요한 허영인가 아니면 그저 게으름인가... 좀더 자기 성찰이 필요한 문제겠죠. 어쨌든, 시험은 떨어졌고 또 일 년 해볼 생각인데 이런 결심은 오기도 아니고 객기도 아니고 용기는 더더욱 아니고 오로지 그저 기존의 제 직업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 집에서는 개를 키우는데요. 개장수한테서 강아지를 사와서 목줄을 채워놓으면 첫날은 강아지가 밥도 안 먹고 어찌나 그악스럽게 짖어대는지 몰라요. 어른 개처럼 우렁차게 짖지도 못하는 어린 것이 밤새도록 그렇게 제 혼이 다 빠져나가도록 바락바락 짖어대는 거예요. 그리고 둘째날이면 목이 완전히 쉬어서 제대로 짖지도 못하고 쇳소리만 내요. 셋째날에는 그럴 기운도 없어서 축 처져 있지요. 그때 쯤에 어머니가 밥을 갖다주면 그렇게 게걸스레 먹을 수가 없어요. 이때가 제일 짠하죠. 그리고 넷째날에 엄마가 또 밥을 주러 찾아오면 이제는 막 꼬리를 흔들고 좋아라 해요. 저는 가끔 제 자신이 개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첫날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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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비틀스 살림지식총서 255
고영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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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후반 영국의 소도시 리버풀에서는 십대 청소년들의 밴드활동이 성행했는데, 비틀즈 역시 여기서 탄생한다. 초반에 산전수전을 겪긴 하지만 결국 히트곡 제조기가 되어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된 비틀즈. 그러나 이들도 나이를 먹고 에고가 성숙해감에 따라 저마다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멤버들마다 예술적 지향이 제각각이 된 것. 폴 매카트니의 음악 취향은 감상적이고 대중적인 반면, 존 레넌은 점점 거칠고 전위적인 음악을 추구하게 된다. 한편, 조지 해리슨은 인도 문화에 심취한다. (확실하진 않지만) 음악적 기량에 있어 멤버들에게 늘 무시당하던 링고 스타는 결국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하고 반항하기 시작한다. 비틀즈는 결국, 머리 넷 달린 괴물이 되어 해체가 불가피한 상황에 이른다. 그룹 해체 후 멤버들은 저마다 추구하는 음악의 길을 걷게 되지만, 비틀즈는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만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는다, 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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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2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링고스타가 녹음해 놓은 드러밍이 도저히 못들을 지경이라 폴이 밤늦게 녹음실에서 다시 연주해서 음반내고 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근데 비틀즈 해체의 주된 원인은 역시 폴과 존의 불화때문 아닌가요? 제가 링고였다면, 어떻게건 해체는 막아보려고 난리를 쳤을 것 같은데 말이죠..(링고옹을 너무 무시하는 발언인진 모르겠습니다만ㅋㅎ)

수양 2012-10-0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의 불화도 불화였지만 다른 멤버들 각각의 상황도 이 불화를 봉합할 만한 처지가 못되었던 듯해요. 링고스타는 해체를 막아볼려고 난리라도 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그는 자기가 다른 비틀즈 멤버들한테 묻혀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착각한게 아닌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