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제주도 여행 도중 들렀던 이중섭의 생가에는 빈방 벽에 덩그러니 이런 시가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삶은, 종내에는 어찌할 수 없이 그리운 것이라던 이 화가는 나이 마흔에 간염과 영양실조로 요절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사흘이나 방치되었다. 기쁘게 몸 받아 다만 흉터와 옹이 몇 개 새기고 돌아가는 게 어쩌면 우리에게 내정된 섭리인 것일까. 맑고 고요한 심연에 단단한 옹이를 거느린 사람들한테서는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느껴진다. 눈밭을 걷는 목이 긴 사슴처럼 우아하고 의연한 사람들. 표표한 걸음마다 깊은 향이 여운으로 남는 그런 사람들을 앞에서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생의 그 모든 비린 것들이 눅진하게 발효되기까지 나는 얼마나 더 많이 고함치고 울부짖고 날뛰어야 할까. 찰진 밥이 되기 위해 얼마다 더 오랜 동안 뜸이 들어야 할까.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나는 얼마나 더 모진 것들로부터 겁간을 당해야 할까. 가슴 환히 헤치고 끝내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곰삭혀야 할 날들이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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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 느리게 행복하게 걷고 싶은 길
이해선 지음 / 터치아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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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덕분에 나도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 온종일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산길을, 밭길을, 해안길을 걷고 있으면 주위의 풍경들이 자분자분 다가와 고스란히 가슴에 스며왔다. 길을 걸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비단 대자연의 장엄한 풍광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비해 한없이 낮았던 담들, 담 너머로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보이던 생활의 정겨운 편린들, 귤즙 두 봉에 천 원이니 우체통에 돈 넣어 두고 알아서 가져가라는 어느 집 앞의 팻말, 내게 귤을 세 개나 건네주면서도 자꾸만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주었다고 미안해하시던 전복죽집 아줌마, 팻말에 써진 찻값 삼천 원이 무색하게 다짜고짜 차를 따라주시며 쉬어가라시던 아저씨, 빈방이 있지만 불을 안 때놓아 추우니 그냥 안방에서 같이 자자고 하셔서 나를 당황하게 한 민박집 아주머니...


'저희 귤은 무농약 귤입니다. 주인이 없을시 돈은 우체통에 넣어 주세요.'

비록 바가지 상흔이 없지는 않은, 이미 어느 정도는 닳아있는 유명관광지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나본 제주 사람들은 아직도 교환 관계보다는 증여와 호혜의 관계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온통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데 익숙해진 나는 그들의 격의 없는 베풂에 연신 꾸벅대면서도 속으로는 습관처럼 아연해지곤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 앞에서 매번 당혹감과 부채감에 시달리느라 미처 제대로 감사함을 표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사람을 냉소하고 불신하며 한없이 꽁꽁 여민 마음으로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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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바닥에서 물결을 따라 힘차게 요동하는 실지렁이, 타는 여름 매미의 그악스런 울음, 바람 불 적마다 일제히 소리치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들, 아기새처럼 고개를 쳐들고 정오의 햇살을 꿀떡꿀떡 받아먹는 해바라기, 과녘을 주시하는 궁수의 형형한 눈빛... 코나투스, 권력의지, 자기보존욕망, 생명욕동, 양태를 지속하려는 성질 등 이 모든 딱딱한 말들은 결국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어가 아닐까. 철학적 표현이든 서정적 표현이든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실체를 언어화하려는 각기 다른 방식의 노력이 아닐까.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그것'의 존재를 감지하고 만끽하려 하는 모습 또한 생명 가진 것들의 열렬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몸짓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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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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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에티카>원문 일부 발췌 (2)<에티카> 해제 (3)앞서 발췌한 부분에 대한 주석 (4)용어 해설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제와 그 명제의 연역적, 기하학적 증명으로 이루어진 <에티카>에 대해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증명 부분은) 정독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장담한 바 있다. 러셀의 고견을 받들어 (1)부분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읽기 시작. 그러나 이 책은 (2)와 (4)부분 만으로도 책값 4,900원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코나투스’라는 개념으로,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와 상당히 유사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코나투스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힘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데, 코나투스는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관계된 어떤 ‘욕망’이다. 이 욕망의 종류에는 ①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욕망(=내적 역량, 능동적인 정서)과 ②외부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으로서의 ‘정념’이 있다. 전자는 항상 좋은 반면, 후자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 좋다는 것은 양태가 거리낌 없이 발휘되니까, 자기다운 게 자기답게 발휘되니까 좋다는 것, 나쁘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할 양태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억압되고 굴절되니까 나쁘다는 것. 이러한 좋고 나쁨은 선악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신기한 것은, 코나투스를 설명하는 이런 내용이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 적극적인 힘, 반응적인 힘 등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선악 관념이 인간 본위의 자의적인 분류라고 여기고, 선악 관념 대신 힘의 증가와 감소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설명하는 점도 마찬가지다.

한편,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새길, 1997) 1장에서는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인식 차이(전자가 인식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후자는 진리라는 틀을 통해 인식을 시작한다고 생각함)를 대조함으로써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사유를 조명하고 있는데, 구태여 탈근대적이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내용이 좀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부분을 포함하여 나름으로 정리 요약한 것.

1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실체를 이중적으로 정의한다. 무한실체(신)와 유한실체(육체, 정신, 자연)로. 데카르트의 신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여 법칙을 부여하고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세계에 개입하는 존재다. 그러나 스피노자 생각으로는, 신이란 게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인데,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 아닌 또 다른 것’을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인 거다. 때문에 그는, 신의 완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무한실체 하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피안에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하나의 작용이자 섭리이고, 실체의 내재적 원인이다. 모든 양태이면서 또한 양태를 생성하는 내적 동력 같은 것.

2 스피노자는 이렇게, 실체는 무한실체 단 하나만 있을 뿐이고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했던 육체와 정신은 무한 실체의 ‘양태’들이라고 말한다. 즉, 육체와 정신은 동일한 실체의 각기 다른 양태인 것. 정신과 물질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므로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 없고, 따라서 송과선도 필요 없음. 이 말은 스피노자가 정신을 물질의 상태로 소급시켜 설명하는 유물론을 옹호한다는 게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별도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자율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병행론)

3.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그렇게 칭송했던 인간의 자유의지를 깡그리 부정한다. 가상이고 환상이라는 것. 섭리에 의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제 운명을 통제하는 그런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의지 있는 게 아니라고.

4 인식론에 있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앞서 말했듯,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굉장히 대단한 인간만의 고유 능력으로 봄. 그리고 그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ex. 생각하는 나) 확실한 것(진리)이라고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확실한 것이란 ‘확실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일 뿐이다. (진리의 자기규정).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어떤 허위에 대하여 한 치의 의심 없이 철저히 믿고 따를 수도 있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게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 순간 진리가 되어버린 것일 뿐이라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봤다고 하자. 이에 대해 데카르트의 경우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정상인데, 의지(여기서는 자기방어의지 같은 게 작용했을 것이다)가 잘못 개입하여 올바른 판단을 흐렸다고 본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은 확고하므로 의지를 단련하면 올바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구태여 인간의 정신을 인식능력과 의지로 나누어서 오류가 났을 때 의지 탓하는 거는 자기기만 밖에 안 되는 거라고 본다. 마치 땀이 뻘뻘 흐르는데도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이 정도면 따뜻하다고 하는 거랑 똑같은 셈. 자유 의지란 일종의 환각이고 가상이고 환상이고 자기기만인 거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라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본 사람은 그 사람이 ‘잘 못 인식’해서 그러는 거다. 인식능력 부족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식 능력이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허술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탈근대의 포문을 여는 스피노자의 선지자적 생각이었던 것.

5 스피노자에 따르면, 선/악 관념 만큼이나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역시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다. 완전성의 기준은 사물이 가진 자기보존의 힘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한 양태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기보존의 힘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모든 개체의 존재론적 평등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는 선악개념,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모두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라고 하긴 하지만, 그게 꼭 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비록 상대적이고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준에 의거한 여러 가지 판단들이 궁극적으로는 자기보존욕구를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6 정념의 처리 방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런 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념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욕망의 한 모습이기에 억지로 통제, 조절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념을 야기하는 상황이나 현상을 이성의 이해력으로 ‘인식’하고 나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고. 즉, 정념이란 의지가 아니라 정신의 인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정념을 일자(전체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나면 거기로부터 치유, 해방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불가에서 말하는 집착과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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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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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지만, 결코 자폐의 성에 갇혀 주술을 읊어대는 시는 아니다.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배려하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도 하는 시집이다. 그러나 그 같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의 맛이 팍팍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시니컬한 지식인 특유의 지극히 건조하고 까칠한 감성이 시집 전반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서정성을 포기한 나머지 심지어 괴팍하게 느껴질 정도.

해설을 맡은 이는 '시의 언술 방식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시의 존재론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지만, 팍팍한 세계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리기 위해 시를 읽는 나같은 독자로서는 글쎄.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 못 하겠는 바는 아니나, 느끼하고 달달한 서정시가 갑자기 마구 그리워지는 반동 효과를 일으키는 시집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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