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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 느리게 행복하게 걷고 싶은 길
이해선 지음 / 터치아트 / 2009년 12월
평점 :
이 책 덕분에 나도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 온종일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산길을, 밭길을, 해안길을 걷고 있으면 주위의 풍경들이 자분자분 다가와 고스란히 가슴에 스며왔다. 길을 걸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비단 대자연의 장엄한 풍광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비해 한없이 낮았던 담들, 담 너머로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보이던 생활의 정겨운 편린들, 귤즙 두 봉에 천 원이니 우체통에 돈 넣어 두고 알아서 가져가라는 어느 집 앞의 팻말, 내게 귤을 세 개나 건네주면서도 자꾸만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주었다고 미안해하시던 전복죽집 아줌마, 팻말에 써진 찻값 삼천 원이 무색하게 다짜고짜 차를 따라주시며 쉬어가라시던 아저씨, 빈방이 있지만 불을 안 때놓아 추우니 그냥 안방에서 같이 자자고 하셔서 나를 당황하게 한 민박집 아주머니...
▲ '저희 귤은 무농약 귤입니다. 주인이 없을시 돈은 우체통에 넣어 주세요.'
비록 바가지 상흔이 없지는 않은, 이미 어느 정도는 닳아있는 유명관광지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나본 제주 사람들은 아직도 교환 관계보다는 증여와 호혜의 관계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온통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데 익숙해진 나는 그들의 격의 없는 베풂에 연신 꾸벅대면서도 속으로는 습관처럼 아연해지곤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 앞에서 매번 당혹감과 부채감에 시달리느라 미처 제대로 감사함을 표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사람을 냉소하고 불신하며 한없이 꽁꽁 여민 마음으로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