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보급판 문고본)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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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은 자전소설이다.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추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는 서문에서 짐작이 간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실패에 대한 예감 없이는 쓸 수 없는 글, 자꾸만 연막을 치고 안개를 피우고 변죽을 울리고, 그러다 독백에 그치고 마는, 으레 그럴 줄 알면서도 부쩍 허약해진 소설을 끝끝내 붙잡고 있는 사람이 한 고비를 넘어가는 심정으로 감당해야 하는, 그런 글..." 이 고백이 유난히 따갑고 시린 것은, (내가 알기로) 평소 이 작가가 사변에 빠지면 빠졌지 감상에 빠지는 류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소설 속에서조차 '나'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도 되지 못하고, '그가 쓴 소설 속의 인물'로서 존재할 뿐이다. 결벽에 가까운 자기객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설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여하튼 최대한 함부로 발설하지 않기 위해 이런 완곡한 설정을 한 것도 모자라, 작가는 끝내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소설을 완성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숨기려 하는 욕망, 펼쳐내려는 욕망과 묻어두려는 욕망이 서로 머리채를 움켜쥐고 사투를 벌이는 이 처절한 격전지를 작가는 ‘수렁’으로 비유했다. <생의 이면>은 그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작가가 토해낸, 흡사 천식환자의 기침소리 같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되었고, 작가는 이제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고비를 넘긴 그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또 아프다. 이 소설만큼이나 아프고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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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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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금융화 현상을, 하나의 (장기)세기를 주기로 산업화(M-C)와 금융화(C-M')를 되풀이하는 수 세기에 걸친 체계적 축적순환의 최근 세기, 즉 장기 20세기의 특징으로 본 조반니 아리기는, 이러한 반복이 생산과 노동에 대한 탐구와는 ‘별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사회적 삶과 역사의 모든 비밀이 숨어있는 곳으로, 노동의 창조행위와 그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혼적인 저 갈등의 연옥으로 들어가기를 회피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주의를 역사의 장기에 걸친 표면적인 세부들에 고정시킴으로써 실재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에서 폭발해 나올 수 있는 감성적이고 실천적인 해결, 요컨대 '주체적'인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회피의 방법으로 귀착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p.35

 

저자는 '경쟁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라는 세 단계에 따라 경쟁과 독점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존의 전통이 오늘의 제3기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면서, 자본주의 역사는 소유 관계보다 더 깊은 차원인 '생산'의 차원에서 다시 탐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인지노동'인데, 여기서 '인지'란 추론, 분석, 감각, 지각, 기억, 결정, 소통 등 개체적 및 개체간 수준의 정신작용 일체를 말하며, 이를 활용한 노동이 곧 인지노동이다. 저자는 3기 자본주의가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인지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측정하기 곤란하다. 노동시간을 분절하는 것이 곤란하여 시간 척도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애초에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가치화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주지하면서, "맑스의 가치법칙 개념의 핵심적 기능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를 설정하는 데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투쟁과정에서, 자본이 노동의 저항과 투쟁을 축적 과정에 흡수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기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계급투쟁 과정 속에서 '자본'과 '강제 동원된 노동'이 합의한 일종의 휴전선이며 정치적 타협안인 것이다.

 

결국, 가치 측정에 있어서의 곤란은 비단 인지노동에서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으로서의 가치법칙에 처음부터 내재"한다.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임의적이고 명령적이고 외부적"이었지만, 인지자본사회에 이르러 더욱 더 그 정도가 두드러지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인지자본사회에 가치 법칙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느냐 붕괴될 것이냐 하는 것은 이 책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초점은 "자본이 부과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실천을 창안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정치적인 문제에 맞춰져야 한다.

 

물론, 이 책의 논리상 가치법칙의 위기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심화하고 있는 것은 맞다. 인지노동의 특성상 노동으로서의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 평가에서 은밀하게 제외되어 버리는 노동의 누락분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노동의 '탈상품화'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혹자는 예비 인력인 실업자 증가를 이유로 이 시대에 오히려 노동력 상품화가 가속화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진실일지 모른다. 실업자 증가는 폐품의 증가, 곧 노동력 '가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증대하려는 자본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노동력의 탈상품화와 노동가치 하락을 초래하고 이것이 모든 상품의 가치 퇴락으로 이어져 마침내 가치 법칙이 무력화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 예견했는데, 그렇다면 인지자본사회에서는 절정으로 치닫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자본이 부과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실천을 창안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노동 형태로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 중 하나가 '프리터'다. 저자는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의 확산이 오늘날 새로운 삶의 잠재력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임이 분명하다고 하면서도, 욕망하는 삶에 대한 개인적 추구는 자본관계에 쉽게 포섭된다면서 욕망의 실질적인 충족을 위한 공통적이고 집단적인 연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욕망을 사회적 욕망으로 전화함으로써 공통가치를 창출하라는 얘기다. 골방에 갇혀 그레고리 잠자가 되어가고 있는 프리터 중 1人으로서 뜨끔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사족:

가치화 및 상품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노동, 가치법칙의 외부로 밀려나 임금의 지불 없이 자본에 의해 무단 사용되는 노동, 체계에 기입되지 못하고 누락되어버린 노동, 마치 상징계의 균열점에 위치한 것과 같은, ‘외부효과’로서의 노동... 이런 종류의 인지노동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비경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공공재라는 것의 존재가 대대적인 위기를 통해서 '발견'되고, 역할을 '인정'받고, '지위'를 얻고, '관리'를 받기까지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을 떠올려보면, '인지노동' 역시 마찬가지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상징계에 기입될 수, 아니 기입되어야지 않을까.

 

그러니까 요는, 무단으로 갈취되고 있는 우리의 공통자산에 대해 어찌되었든 최소한의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시스템의 "명령"(이데올로기적 명령, 자본의 힘이 발휘하는 명령, 군사적 명령)을 자발적으로 수행한데 대한 대가를 난데없이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 이전에 난센스 같은 얘기겠지만, 또 이 난센스 같은 보상이 기적적으로 가능할지라도 대체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적 모색'은 필요하지 않을까. 상상력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인지능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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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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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될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지젝의 선동은 두려움과 흥분을 준다. 아마도 내가 냉소적인 식자층, 아니 애당초 식자층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무지하고, 피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귀를 솔깃해 하는(벤야민이 그랬던가, 모든 책은 하나의 전략이라고? 그렇담 지젝의 수다스런 인용은 확실히 전략적이다), 생존을 사수하느라 삶을 잃어버린,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형적인 ('전형성'에 있어서 순도 높은?) '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이들은, 오늘은 매운 게 땡겨서 육쌈냉면 먹으러 가듯이(혹은 요즘은 육쌈냉면이 대세니까 육쌈냉면 먹으러 가듯이), 지젝도 그런 식으로 소비하는 족속들이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종류의 피상성이, 진실되지 못함이, 근본주의적이지 못한 태도가 '마술적 마주침'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젝의 말은 불행 중 다행 아닌가? 내 안의 '저열함의 잠재력'을 믿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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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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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내는 칼을 모은다. 칼로 뭘 어찌 해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칼이라도 있어야 한숨 돌리고 지낼 수 있는, 그마저도 없으면 도무지 무서워 살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소설 <칼>은 심약한 인간의 비극적인 존재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작가는 분명 간과하고 있다. 칼을 손에 쥔 사람에게서 비로소 살의가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유물론적 가능성을. 누가 알 것인가. 칼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전화하는 황금의 열쇠가 될어줄지. 하여 나는 작가가 속히 <칼>의 후속편을 구상하기를 청한다. 후속편은 당연히, 칼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는 남자가 우발적으로 누군가를(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죽여버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진정한 악인으로 거듭나는 범죄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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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윤리 - 칸트와 라캉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4
알렌카 주판치치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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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윤리'를 논하기에 앞서 주판치치는 윤리를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자유의 가능성에 대해 살피고 있다. 주판치치가 자유의 단서로 들고 있는 것은 '죄책감'이다. 자연법칙의 인과성 속에서는 우리의 어떤 행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극히 내적인 심리적 동기들마저도 크게 보면 자연적 인과성의 또 다른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처럼 필연성의 결과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어떠한 자유도 없는 것이라면, 때때로 왜 우리는 벌어진 어떤 일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내 잘못도 아닌 그런 일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미 우리의 자유를 상정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주판치치는 “나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죄가 있다”는 표현이 보여주는 그 분열 속에서, 분열과의 조우 속에서 주체의 자유가 현시된다고 말한다.

 

자유가 ‘분열’ 속에서 현시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후자의 자유란, 굉장히 실재계적인 차원의 개념인 것 같다. 주판치치는 우리가 인식하고 형언할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런 차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실 이런 자유는 정신분석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주체가 자신의 무의식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무의식의 주체로서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칸트가 말하는 ‘소질’의 차원에서 정위되는)했다고 간주되어야만이 정신분석 자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자유를 정신분석의 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외설적 보충물' 같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표면적으로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는 희박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바르샤바에 간 레닌>(모스크바의 미술 전시회에 레닌의 부인이 공산청년동맹의 단원과 침대에 함께 있는 그림이 전시되었다. 그림의 표제는 ‘바르샤바에 있는 레닌’이었고 그림 속에서 레닌을 찾지 못해 황망해하던 관람객이 묻는다. 레닌은 어디 있지요? 레닌은 바르샤바에 있습니다.)이라는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 그림에서 떨어져나가야 했던 ‘레닌’처럼, 정신분석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석의 체계가 완결되기 위해 제거된 잉여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분석에서 부재한 듯 보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정신분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으로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 자체가 순환논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미진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해서 주판치치는 윤리가 본성상 과잉이고 과도함이라고 말한다. 즉, '의무에 부합해서' 하는 행위가 법적인 것이고, '의무에 부합해서, 그리고 오로지 의무 때문에' 하는 행위가 윤리적인 것이라 할 때, '그리고 오로지 의무 때문에'라는 잉여, 그 과도함, 라캉의 대상 a로 치환될 수 있는 이 부분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순수형식으로서의 윤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순수한 경지의 윤리적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선한 종류일지라도 자체의 과도한 본성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에게는 불온하고 위험하며 심지어는 악마적인 교란 행위로밖에 와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판치치의 해석대로라면 칸트가 말하는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이란, '오로지 의무 때문에' 공동체의 조화를 위협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맹목적인 광기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저 오로지 무한한 자기 정화를 통한 점근선적 접근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주판치치는 칸트의 이런 입장 자체가 마치 영원한 고문 속에서 쾌락을 증진시키는 사드처럼, 영혼의 불멸성을 전제로 깔아서 스스로를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덕법칙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지극히 정념적인 방식이라고 말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희생양이란 건 없다. 그것은 그저 사드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같은 맥락으로 최고선은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다. 영혼의 불멸성이 전제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최고선이란, 칸트가 자신의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이제 주판치치는 '욕망'으로부터 '충동'을 분리해내어 이 둘을 대립시키기에 이른다. 그녀는 아마도 우리가 욕망의 인간(사드, 발몽)으로부터 벗어나 충동의 인간(돈주앙)으로 도약한다면 순수형식으로서의 윤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최고선이란(혹 악마적 악이든) 대상의 주위를 에두르며 적당량의 쾌락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방식 대신, 쾌락의 최대치를 누리고 파국으로 치달아버리는 과도한 방식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금욕적인 자기 수양이나 정화가 아니라, 소질의 혁명, 니체적으로 말하면 노예에서 주인으로의 '전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전자의 경우(사드나 발몽)의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영원히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이 도달을 '지연'시키는 것이지만) 언제나 윤리를 목전에 두고 그것을 영원히 '의지의 대상'으로 향유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과잉이랄 만한 게 없으니 이는 애초에 윤리적 국면이 아니다. 그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정상적인, 도덕적으로 쇠약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반면에 후자(돈주앙)의 방식을 통해 주체는 비록 자신의 환상 속에서나마 윤리적인 것에 도달한다. 그러나 도달하자마자 주체는 파멸한다. 주체와 대상 a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도달 이후에는 언제나 너무 멀리 가고 마는, 그럼으로써 자기 파괴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극단적 방법에 따른 행위가 ‘최고선’인지 ‘악마적인 악’인지는 행위하는 주체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최고선과 악마적인 악은 형식상 동일한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사실 칸트의 윤리의 맥락 속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의지와 도덕법칙이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구분만이 가능할 뿐이다. 만약 일치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일 것이며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윤리와 상관없는, 정념적인 행위일 것이다. 선과 악은 의지와 도덕법칙이 일치하는 주체의 어떤 파멸적 행위가 일어난 이후에, 그러니까 그런 실재계적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사후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영역일 뿐이다.

 

주판치치의 칸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쳐다보지 말고 오로지 네 스스로가 정립한 도덕법칙에 준하여 저 실재의 심연으로 뛰어내려라. 틈새를 현시함으로써 너 스스로 세계의 외상(그리고 향락)이 되어라. 환상으로 상연되어라. 네 행위가 (상징계에 사후적으로) '악마적 악'으로 기입되든 '최고선'으로 기입되든 아무도 탓하지 말라. 어떻게든 너로 인해 상징계의 지형은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주체의 윤리다." 이 책은 총 9장까지 있는데 너무 어려워 끝까지 읽지 못했다. 심연의 언저리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상징계 안에서 버텨보려는 나의 안전주의 근성, 사드적 노예근성을 (역시 사드처럼) 쾌락주의적으로 위무하기 위해 <실재의 윤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지만, 반쯤 읽다가 벌써 위무가 다 되어버린 걸 보면 난 역시 윤리하고는 거리가 먼 정념의 인간인가. 아래는 역자 블로그에서 가져온 정오표.

 

12쪽 하2: 욕망의 --> 욕망을
21쪽 상8: 연관되 --> 연관된
215쪽 상1: 경우이다 --> 경우가 아니다
222쪽 상2: 잔여물 이외에 다름아니다 --> 잔여물에 다름아니다
315쪽 하1: 완수한다 --> 완수하는 것이다
357쪽 상1: 그녀는 신의 법칙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지탱물로 만들지 않는다 --> 그녀는 신의 법칙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확보"는 고딕체)
377쪽 하4: 위치시킬 수 있다. 첫 번째 것의 -->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행 자체는 두 가지 상이한 행로를 취할 수 있다. 첫 번째 것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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