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의 불만 - 새로운 우파의 출현과 불안한 징후들
이택광.박권일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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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 강남좌파, 중간계급 등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꼴통 이미지와는 차이를 두는 새로운 우파의 불만과 열망을 분석하고 있다. 3장 김진호의 글 <기독교 우파와 신귀족주의>에서는 해방 정국 이후부터 간략하게 주류 기독교 사회의 변천사를 훑어보고, 오늘날 한국의 중상위 계층이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강남의 대형 교회 신도들이 보여주는 신앙 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짧은 글임에도 무척 흥미롭다. 자본주의와 순접하여 번성해온 한국 기독교 사회의 풍속과 문화사를 사회학적으로 살펴본 책이 좀 더 있지 않을까. 관심이 간다. 그나저나 이 책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젊은 필자들은 좀 더 숙성의 기간이 필요할 듯.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런 식의 책을 통해서 발언의 기회가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같은 또래인 내가 봐도 상대적으로 내공이 많이 딸려 보이는 점은 안타깝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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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나 일기 같은 고백적 글쓰기는 평론 같은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좀 더 스스로에게 윤리적일 수 있는 계기가 열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을 전면에 노출시킴으로써 정신적 포르노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삶과의 거리가 더 가까우며, 그래서 삶으로부터 헛돌지 않고 보다 정직할 수 있으며, 삶을 살아가는 나와 텍스트 상의 나 사이의 괴리를 그나마 가장 좁힐 수 있는 형식인 것이며... 그러나 고백적 글쓰기는 그것이 아무리 엄격한 자기검증을 거친다 할지라도 결국 개인적 감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감상주의가 싫은 것은 그것이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비평이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맹렬하게 비난함으로써 자아의 허장성세 속에서 손쉽고 재빠르게 정의롭고 똑똑한 노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감상주의란 것은 엄살과 응석을 부리면서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격한 감정에 편승하여 쉽게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고, 그러고 나서는 금세 개운해져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도취와 해소의 지루한 반복... 삶에 뛰어들지 않으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해박하고 고상한 척 하는 분석적 비평적 글쓰기, 그리고 이런 식의 글쓰기로 대변되는 삶의 태도가 역겹다면, 삶의 카오스에 빠져 좌표를 잃고 첨벙대는 모습은 딱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감상주의는 내가 경멸하는 문학의 나이브한 면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문학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또한 그 본질의 숭고함을 의심하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섣부른 단견일지라도 내가 느끼기로는 뭔가, 치명적으로) 나약하고 가벼운 점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과장이 심하고 잘 웃고 잘 울고 쉽게 화해하고 뭐든지 순식간에 승화시켜버리는 그런 헤픈 모습이 소박함을 넘어 천박하고 환멸스러워서 문학이라는 영역을 전반적으로 수상히 여기게 되고 심지어는 문학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요사스러워 그 숲 전체를 불질러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이는 것이다. 자꾸만 내가 나 자신의 문학적인 어떤 면을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결론의 자명함을 회의하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지난하게 사유를 진척시켜 나가는 글이라도 딜레마는 상존한다. 비평이든 고백이든 간에 생각이 중층적으로 되어갈수록 텍스트는 입장을 표출하거나 정서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머뭇거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칫 교활한 요설의 혐의를 쓰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그것이 아무리 육중한 고뇌의 무게를 갖는다 할지라도 최종적인 외양은 그저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는 것으로만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양새 때문에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글이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세계에 대한 입장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가버린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글이 되었든 저런 글이 되었든 솎아내고 깎아내고 털어버려야 할 것들은 많은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 경계가 뚜렷이 보이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란 난망해 보인다. 정작 쓰는 글이라 해봤자 이곳에 간혹 들어와 끼적이는, 애써 독후감이라 우겨보는 토막글이 전부일 뿐인 내 처지를 떠올려볼 때 지금까지의 장광설이야말로 과장과 엄살과 응석이 아니면 무엇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 줄이라도 좀 더  결벽적으로 써봐야지 않나 싶은 건 또 무슨 오기일까. 이 모든 게 허망하고 우스운 소꿉질인 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면서. 아니, 허망하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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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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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일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장된 비유일 뿐 오늘날 실제로 일하다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약 어떤 일터에서 그런 일이 빈발한다면 응당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녀들의 세계에서 죽음은 수사가 아니라 엄존하는 현실이었다. 해녀들은 대개 칼 손잡이 끝에 끈을 매달아 손목에 단단히 감고 입수를 하는데, 바위에 달라붙은 전복에 칼을 꽂았다가 칼이 전복에 박혀 빠지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고 숨이 차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네들은 한겨울 바닷물에 얼어 죽고, 해파리에 물려 죽고, 상어에 잡혀먹는 등 실로 갖가지 횡액에 목숨을 잃었나보다. 물질하다 보면 조류에 실려온 다른 마을 해녀 시체를 만나는 일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익사자가 생기면 주로 베테랑급 해녀들이 해수면의 미묘한 색변화를 살피고 바람의 방향과 조류를 계산하여 시체를 찾아냈다고. 그러나 내일의 목숨을 잇기 위해 오늘에 목숨 걸었던 해녀들의 생활사를 누가 감히 처절하다 연민할 수 있을까. 내게는 차라리 위대한 전설처럼 아득하고도 감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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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낯선 소리나 수다스런 말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사람의 개입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어떤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어서 그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곳에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명상뿐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中에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으나 으뜸은 단연 비자림이었다. 입장료 천오백 원을 내고 숲으로 들어서면 수령이 자그마치 500~800년에 육박하는 비자나무들이 빽빽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상서로운 광경이었다. 인간이 가늠할 길 없는 규모의 생을 살아온 비자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가 마을 앞 당산나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당산나무를 앞에 두고 장관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표현이 외람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자림은 절경이로되 감히 함부로 절경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가 저어되는 곳이었다.

 

깊숙이 들어서면 설수록 숲은 온통 신령스런 기운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것은 품어안아 움트고 살리게 하는 생명의 기운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도시에 찌들어 갑각류처럼 변해버린 사람일지라도 대지의 자궁 같은 이곳 비자림을 걷다보면 어느덧 신목(神木)들이 내뿜는 영기에 취해 온몸의 감각들이 싱싱하게 깨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비자림 입구 표지판에는 숲의 효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과학적인 분석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영적이고 신비로운 숲속의 기운을 어찌 음이온이나 피톤치트 따위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선(禪)명상의 핵심을 뇌파 변동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만큼이나 아둔하고 딱한 접근법일 터였다. 비자림은 감히 자연휴양림 따위로 분류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함부로 명명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고 외경의 지역이었다.

 

특유의 아우라를 발산하며 저마다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는 비자나무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면 볼수록 친근하고 다정한 것이어서 숲길을 거닐다 마음이 벅차면 길가에 자리 잡은 비자나무 몸통을 몇 번이고 끌어안아 보기도 했다. 나무들은 아무리 끌어안아도 양손이 맞닿지 않을 만큼 하나같이 육중하고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할머니 손등 같은 나무껍질에 한쪽 볼을 붙인 채 가만히 밑동을 끌어안고 서 있으면 나무의 체온이 은은하게 전해져 오고 어디선가 낮고 긴 숨소리라도 들리는 듯했다. 문득 눈 떠보니 나 자신이 비자나무 밑동에 달라붙어 사는 작은 식물이었더라 말해도 좋을 순간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 비자림을 거닐다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진 탓인지 주변이 몹시 낯설었다. 동행한 친구는 두꺼운 소설책을 읽은 기분이라고 했다.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책을 전후로 하여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게 되는, 그런 경이로운 소설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라고. 뒤를 돌아보니 숲은 방금 전 우리가 다녀간 흔적이라고는 하나 없이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마치 처음 보는 책처럼 우거져 있었다. 백만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제주 천년의 비밀을 품은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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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16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8년이 지났어요. 엄마와 걷던 여름날의 비자림! 수양님 페이퍼 읽는데 그때의 깊고 싱그러운 초록이 마구 떠올라요.^^

수양 2012-10-16 15:09   좋아요 0 | URL
여름에 비온 뒤에 가보면 얼마나 싱그러울까요!! 제가 이제까지 본 숲 중에 최고로 감동적인 숲이었어요 ㅜ_ㅜ
 
[수입]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3번 &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외 작곡, 샤이 (Riccard / Decca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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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을 장만하고 나서 더 이상 다른 주자의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 구해볼 생각을 못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아르헤리치가 가장 완벽한 것 같다. 3악장 피날레가 끝나면 브라보와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그때는 나도 별안간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음반 구하기 전에는 유투브에 올라온 연주 실황을 몇 번이나 봤는데 풍성한 흑발을 늘어뜨린 채 건반을 어루만졌다 내리쳤다 하는 젊은 날의 아르헤리치는 꼭 신단에 앉아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는 여사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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