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나 일기 같은 고백적 글쓰기는 평론 같은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좀 더 스스로에게 윤리적일 수 있는 계기가 열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을 전면에 노출시킴으로써 정신적 포르노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삶과의 거리가 더 가까우며, 그래서 삶으로부터 헛돌지 않고 보다 정직할 수 있으며, 삶을 살아가는 나와 텍스트 상의 나 사이의 괴리를 그나마 가장 좁힐 수 있는 형식인 것이며... 그러나 고백적 글쓰기는 그것이 아무리 엄격한 자기검증을 거친다 할지라도 결국 개인적 감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감상주의가 싫은 것은 그것이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비평이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맹렬하게 비난함으로써 자아의 허장성세 속에서 손쉽고 재빠르게 정의롭고 똑똑한 노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감상주의란 것은 엄살과 응석을 부리면서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격한 감정에 편승하여 쉽게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고, 그러고 나서는 금세 개운해져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도취와 해소의 지루한 반복... 삶에 뛰어들지 않으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해박하고 고상한 척 하는 분석적 비평적 글쓰기, 그리고 이런 식의 글쓰기로 대변되는 삶의 태도가 역겹다면, 삶의 카오스에 빠져 좌표를 잃고 첨벙대는 모습은 딱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감상주의는 내가 경멸하는 문학의 나이브한 면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문학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또한 그 본질의 숭고함을 의심하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섣부른 단견일지라도 내가 느끼기로는 뭔가, 치명적으로) 나약하고 가벼운 점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과장이 심하고 잘 웃고 잘 울고 쉽게 화해하고 뭐든지 순식간에 승화시켜버리는 그런 헤픈 모습이 소박함을 넘어 천박하고 환멸스러워서 문학이라는 영역을 전반적으로 수상히 여기게 되고 심지어는 문학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요사스러워 그 숲 전체를 불질러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이는 것이다. 자꾸만 내가 나 자신의 문학적인 어떤 면을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결론의 자명함을 회의하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지난하게 사유를 진척시켜 나가는 글이라도 딜레마는 상존한다. 비평이든 고백이든 간에 생각이 중층적으로 되어갈수록 텍스트는 입장을 표출하거나 정서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머뭇거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칫 교활한 요설의 혐의를 쓰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그것이 아무리 육중한 고뇌의 무게를 갖는다 할지라도 최종적인 외양은 그저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는 것으로만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양새 때문에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글이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세계에 대한 입장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가버린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글이 되었든 저런 글이 되었든 솎아내고 깎아내고 털어버려야 할 것들은 많은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 경계가 뚜렷이 보이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란 난망해 보인다. 정작 쓰는 글이라 해봤자 이곳에 간혹 들어와 끼적이는, 애써 독후감이라 우겨보는 토막글이 전부일 뿐인 내 처지를 떠올려볼 때 지금까지의 장광설이야말로 과장과 엄살과 응석이 아니면 무엇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 줄이라도 좀 더  결벽적으로 써봐야지 않나 싶은 건 또 무슨 오기일까. 이 모든 게 허망하고 우스운 소꿉질인 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면서. 아니, 허망하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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