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와 광기 - 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 클리나멘 총서 5
이수영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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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 날 술자리에서 /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 (...) / 형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엄마가 아팠다. 모두 시골 출생이었고, 흡연자였다. / (...) / 과방에서 책을 태우다가 불을 내기도 했다. 과방 복도에 소화기를 뿌려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도 했었다. 그들은 서로가 범인이라고 자랑을 하고, 그 거짓말을 들어주면서 더 진지하고, 친해졌다. -박성준, <대학 문학상> 中에서

 

시인들은 왜 애꿎은 어머니까지 끌어들여 아파야 하나. 시를 쓰기 위해 불을 내고 소화기를 뿌려가며 발광을 떨어야 하는 이 상황은 뭔가. 아니, 질문을 다른 쪽으로 겨냥해보자. 시인들의 이야기에 절실하게 공감하는 우리들은 뭐가 또 그리 아픈가. 정말로 그렇게 상처가 많고 괴롭고 날마다 미쳐버리고 싶고 그런 걸까. 어쩌면 그 모든 질병과 광기와 슬픔이야말로 자기창작의 서사가 아닐지. 사실 우리는 전혀 아프고 있는 게 아닐 지도. 아프다고 자꾸만 인식하는, 그런 아픔에의 과도한 자각이야말로 이 시대 특유의 기이한 문학적 풍습이며 언젠가는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이' 그렇게 사라져갈 존재미학적 양식인지도.

 

이 책은 푸코적 관점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을 탐구해봄으로써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근대적 주체의 독특한 모습을 해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187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이전까지의 개화기를 전근대로, 192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근대로 설정하면서 단절의 시기인 1920년대의 문학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저자는 푸코가 포착했던 19세기 무렵 유럽의 인식론적 지형 변화가 한국에서는 1920년대에 일어났다고 보고, 그 구체적 양상을 문학의 영역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란, 인간이 비로소 인간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의 내부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모든 인식의 역량을 쏟아 붓는 시대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상황에서 근대 초입에 해당하는 1920년대의 문학계 역시 "인간의 육체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한없는 탐색", 즉 "인간에 대한 앎의 의지"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의 의지는 병리적인 인간을 다룸으로써 관철될 수 있었다. "인간은 병들었을 때 자신의 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섹슈얼리티와 광기가 [모든 병리적 증상의 회전축으로서, 따라서 앎의 궁극적 지점으로서] 중요했는데,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진실은 이와 같은 병리적 상태에서만 객관적인 대상으로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 식의 계몽적 주체가 전근대 시기를 풍미했던 문학적 주체의 양식이었다면 1920년대 이후 문학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선각자이길 포기한다. 대신 생의 진실을 마주하고 문학적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앓기 시작한다. 성적 욕망과 죄의식과 망상과 광기와 온갖 신경증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병리성에 대한 묘사와 해부가 20년대 문학을 지배한다. 저자는 이러한 병리성이 단순히 당대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2000년대 등단한 시인인 박성준의 시가 증언하듯 오늘날에도 계속해 이어져 오고 있는 근대 문학의 유구한 특질이라고 보고 있다.

 

구운몽과 홍길동과 전우치라는, 호메로스 대서사시 부럽잖은 고전소설의 천진무구한 영웅들이 별처럼 스러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욕망과 광기에 시달리느라 내면이 비대해진, 심적으로 피로한 근대의 인간들이다. 이들을 뛰어넘는 미래의 주인공을 오늘날 우리 문학이 '출산'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문학의 자기붕괴를 수반하는 사건일 것이다. 상처와 아픔과 고뇌와 번민이 없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생의 비극성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뛰어넘은 (문학을 찢고 나온) 새롭고 낯선 문학적 주체의 출현을, 진정한 '듣보잡'의 출현을 고대해본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징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의 직관으로부터 가장 먼저 새어나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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