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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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1년 겨울, 일본에서 어느 급진 좌파 학생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비밀 기지를 꾸린다. 이후 두 달 동안 일어난 일은 끔찍했다. 조직원 열두 명이 동료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 권력 다툼도, 치정극 때문도 아니었다. 혁명가로서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정신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신체를 학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생활 태도가 불량하게 느껴지거나 공동작업에서 실수를 한 동료를 골라내어 영하의 추위에 세워놓고, 밥을 안 주고, 집단 구타하는 식으로 차례차례 죽여 나갔다. 

 

“진정한 혁명가는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놓여도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원들은 동료의 죽음을 ‘패배사’로 규정했으며,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동료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땅에 묻었다. 희생자 중 누군가는 자신의 나약함을 반성하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지도부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부하들을 제대로 정신무장 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구타에 참여한 조직원들은 “폭력에 참가하는 것을 죄스럽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죄책감 자체를 뛰어넘어야 할 자신의 정신적인 나약함”으로 여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다고 하나 학생운동조직 멤버들은 대부분 중산층 출신의 고학력자 젊은이들이었으며,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자기 반성 능력도 뛰어난, 지극히 평범한 정상인들이었다. 심지어 조직의 우두머리는 사건 이후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자기 비판을 하기도 한다. “나는 내가 광기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보며 내가 그런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을 만큼 사리 분별을 못하게 된 상태였다거나 상황을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리했던 것이다.” 

 

이성이란 사리에 치우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협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비이성이란 사적인 열정을 대표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불화를 빚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기준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안녕에 으뜸가는 요소라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합리성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시대에는 물론이고, 합리성이란 자신이 동조할 수 없는 부분에서 살인으로 해결해버릴 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의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합리성을 경시하고 거절하는 불행한 시대에는 더더욱 지당하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에서

 

이 책을 읽고 나면 러셀의 이런 말도 도무지 허튼 망언처럼 들리고 만다. 숙청은 결코 우발적으로 행해진 광기의 잔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집단구성원들의 민주적인 결정에 의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급박했던 당시 상황 속에서 숙청이 하나의 기이한 유행으로 자리잡게 된 심리적 메커니즘 역시 어떤 고유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폐쇄 사회 안에서 배출되지 못하고 쌓여가는 공격적인 에너지가 바야흐로 임계점에 육박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든 내부적으로 소진시키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융성하게 된 집단적 향유의 극단적 형식이 곧 숙청이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이성은 무엇이고 비이성은 무엇이며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성과 비이성이란 차라리 뫼비우스의 띠의 안팎과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교한 논리 회로를 따라가서 끝내 비이성의 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야말로 인류가 반복하는 영원한 희비극이 아닐지. 저자의 말대로 이 사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떤 사람이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 '멀리'라고 하는 공간적 간격 역시 따지고 보면 주관적인 기준점으로부터 상정되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겠다. 어쩌면 신체 학대와 고문과 살인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더없이 끔찍한 최악의 행위로 파악하는 현대사회야말로 ‘헤엄을 치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린’ 상태인지 모른다고. 연합적군 사건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적 반응이야말로 유사 이래 전무후무할 만큼 극도로 생명을 중시하는 기이한 휴머니즘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궤변인가. 하지만 무엇이 비이성인가. 무엇이 광기이며 무엇이 비극인가. 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 어디쯤에서 헤엄치고 있는 걸까.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헤엄을 칠 뿐이다. 적군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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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도 모두 이 자리에서 '멀리' 와 있더군요. 여기랑 다른 곳에 가 보면 금방 느껴져요. (그러니까 도시에 있다가 시골에 가 보면. 문명 속에 있다가 인디언들 읽어 보면...등등)

수양 2013-02-24 23:55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종종 일부러라도 '다른 곳에 가보는' 연습을 해야할 것 같아요. 깜짝 놀라기 위해서요.
 

사람마다 궁합이 안 맞는 책이 있을 거다. 막연한 역사적 채무감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못 읽겠는 책.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선악구도가 뚜렷하고 비장하며 엄숙한 데다가 증오와 적의에 가득한 이 책이 나는 좀, 촌스러웠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었다. 정서, 기조, 색채, 뉘앙스, 분위기... 그러니까 선(先)언어적 차원에서의 어찌할 수 없는 구시대성.

 

80년대식 정서에 대해 이렇게 함부로 지껄여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의적인지 잘 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슴 아픈 시대로부터의 완벽한 극복, 깨끗한 작별을 위해서는 일부러 이렇게 함부로 말해버릴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미 돋아난 새살 위에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채로 덜렁대고 있는 거추장스런 피딱지를 무람없이 긁어서 떼어버리듯이.

 

정의와 약자,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이제는 보다 다른 정서로, 그러니까 21세기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이것이 단지 지난 정권 때 광화문에서 정수리에 물대포 한번 맞아본 적 없는 자의 속편한 소리일까. 하지만 내 세대의 정의라는 것은 비판과 부정 속에서 반대급부로서 고양되는 눈물겨운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롭고 엉뚱하고 진기하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좇아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라고 믿는다.

 

예전에는 참 열심히 읽었는데, 이제는 이런 책이나 박노자, 김규항 같은 사람들한테 한계를 느낀다. 나의 정치적 좌표가 예전보다 좀 더 우편향되어서 그런가 하면,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의 경제적 처지나 사회적 지위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고, 사회를 대하는 가치관이랄까 사고방식이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 덕분에 오히려 더 급진적으로 변한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단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유머가 없고 언어에 증오의 핏발이 서려 있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징후니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면 일단은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 정서적 코드가 달라야 하고, 감각을 수용하는 촉수의 형태가 달라야 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변화로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전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촛불 때 내게 제일 멋지고 근사해보였던 사람들은 전방에서 확성기 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전단지 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후방에서 다정하게 참이슬 나눠 마시며 기타치고 북치고 노는 히피 무리들이었다. 난 경직된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하는 그들이야말로 혁명의 진정한 전위라는 생각을 했었다. 음, 근데 무슨 이야길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나. 모종의 의무감으로 이 책을 정독하려 했으나 지겨워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길 하려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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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너머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80
찰스 키핑 글.그림, 박정선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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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가 뉘엿해져 가는 오후 제이콥은 커튼 사이로 창밖을 구경하고 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길은 '제이콥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상'이다. 그 길을 사람들이 '쭈그렁탱이'라고 부르는 노파가 지나간다. 그녀가 키우는 개도 보인다. 그 개는 '비쩍 말라서 뼈다귀에 가죽을 뒤집어쓴 몰골'을 하고 있다. 거리를 청소하는 위레트 씨도 지나간다. 조지도 있다. 과자 가게로 들어가는 조지가 제이콥은 부럽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말 두 마리가 질주해 온다. 양조장에서 뛰쳐나온 모양일까. 사람들이 말을 잡으러 우르르 쫓아 나온다. 제이콥은 궁금하다. "무슨 일일까? 하지만 나는 이층에 있으니까 안전해." 다행히도 마부가 겨우 말을 붙잡아 세운다. 그런데 이때

 

 

개를 꼭 껴안은 쭈그렁탱이가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붉은 장면이다. 사람들이 하나 둘 쭈그렁탱이 곁으로 모여든다. 심상치 않다. 말이 무슨 짓을 한 걸까. "우리 개가 말하고 싸운 걸 거야. 그래, 분명히 그랬을 거야." 하지만 제이콥의 추측은 억지스럽다. 제이콥은 아마도 마음을 편하게 해두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믿고 싶은가보다. 이제 곧 엄마가 차를 끓이려고 이층으로 올라올 것이며, 제이콥은 학교에서 돌아온 누나와 기분 좋게 차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잔상이 남아서였을까. 자리를 뜨기 전에 제이콥은 유리창에 입김을 내뿜어 그림을 그려놓는다.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저것은 이슬일까. 피일까. 눈물일까. 제이콥은 알았을까. 몰랐을까. 알고도 모른 척 했을까. 창 너머 세계이기 때문일까. 제이콥은 왜 이런 걸 그렸을까. 어차피 누나랑 오순도순 차나 마실 거면서.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일까. 여러가지로 모골이 송연한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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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실재는 상징계의 지배에 처하기 이전의 (...) 유아의 신체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점차로 그 신체에는 기표들이 기입되거나 덧기입된다. 쾌락은 일정한 지대들로 국부화되며, 다른 지대들은 언어에 의해 중화되거나 사회적, 행실적 규범들에 순응하도록 구슬려진다. 우리는, (...) 유아의 신체를, 그 어떤 특권화된 지대도 없으며 처음부터 쾌락의 경계로서 구획된 그 어떤 영역도 없는, 다만 단절 없는 하나의 성감대로 볼 수 있다. / 그래서 또한 라캉의 실재에는 지대들도, 하위구분들도, 국부화된 높낮이도, 혹은 틈새와 충만도 없다. 실재는 갈라짐 없고 분화되지 않은 일종의 직물이며, 모든 곳이 충만한 그런 방식으로 짜여있다. (...) 그것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만큼이나 아이의 신체에도 적용되는 일종의 매끄럽고 이음새 없는 표면 내지는 공간이다.” -p.62,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그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형체가 없는 것, 곧 이(夷)라고 부른다. 그것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어서 소리도 없는 것, 곧 희(希)라고 부른다. 그것은 만지려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어서 은미(隱微)한 것, 곧 미(微)라고 부른다. (...) 그것은 위쪽이라고 해서 분명하지도 않고 아래쪽이라고 해서 어두운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것은 무물(無物)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형상이 없는 상태, 무물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맞이해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으며, 뒤를 따라가도 그 꽁무니가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도는 빗물처럼 왼쪽 오른쪽 어디에나 있다. 만물은 이것에 힘입어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공(功)을 이룩하고서도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도 않는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는데, 바퀴통의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수레는 효용을 지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었을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그릇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었을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집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게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中에서

 

도덕경에서 노자가 설명하는 도(道)는 라캉의 실재 개념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도는 곧 우주적 실재를 일컫는 것인가. 깨달음의 체험이란 곧 우주적 실재의 체험인가. 우주의 거대한 무의식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느낌을 얻게 되는 체험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우주적 실재의 체험이라는 것은, 라캉 식으로 말하면 오로지 환상으로만 경험되는 대단히 상상계적인 차원의 앎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기가 어머니에 대해 갖는 일체감 및 그로 인한 황홀감과 충만감=물아일여의 삼매경. 그렇다면 성관계가 없듯이 깨달음도 없는 것(있다고 한다면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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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은 꽃받침이 없다. 잔털도 가시도 없다. 꽃잎은 층층이 여러 겹이 아니라 딱 암수술을 감싸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만 거느린다. 거추장스런 꾸밈을 삼가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로만 형태를 구비하여 꽃의 보편적 본질에 충실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줄기는 고구마 대처럼 곧고 힘차며 밑으로 갈수록 굵어져 아래쪽은 어른 새끼손가락 정도가 된다. 아무튼 귀족적 미니멀리즘의 미학이랄까, 그런 게 이 꽃한테는 있다. 며칠 전 꽃집에서 진홍빛 튤립 세 송이를 데려와 화병에 꽂아놓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개화 직전의 꽃봉오리는 풉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몹시 굶주렸던지 첫날 밤 셋이서 물을 1/4컵 가까이 마시더니 이틀 만에 깔깔대며 나란히 활짝 피었다. 그러나 튤립에게 '활짝'이란 아무리 과해도 밥공기만큼 만이다. 시들어갈 때조차도 각각의 꽃잎들은 암수술을 향해 둥글게 오므린 자세를 유지한다. 생의 마지막까지 절도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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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2-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이 글이 너무나 좋아요.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것이 없네요.
생명연습이군요!! 자세히 보고 스케치하기. 잊고 있었어요.^^

수양 2013-02-25 15:05   좋아요 0 | URL
흐흐(긁적) 네 생명연습...이지요.. 김승옥 선생님 소설 제목 제 맘대로 도용해서...ㅋㅋㅋ 저도 잊고 있었는데 살면서 종종 해볼려고 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