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궁합이 안 맞는 책이 있을 거다. 막연한 역사적 채무감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못 읽겠는 책.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선악구도가 뚜렷하고 비장하며 엄숙한 데다가 증오와 적의에 가득한 이 책이 나는 좀, 촌스러웠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었다. 정서, 기조, 색채, 뉘앙스, 분위기... 그러니까 선(先)언어적 차원에서의 어찌할 수 없는 구시대성.

 

80년대식 정서에 대해 이렇게 함부로 지껄여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의적인지 잘 안다. 하지만 어떤 한 가슴 아픈 시대로부터의 완벽한 극복, 깨끗한 작별을 위해서는 일부러 이렇게 함부로 말해버릴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미 돋아난 새살 위에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채로 덜렁대고 있는 거추장스런 피딱지를 무람없이 긁어서 떼어버리듯이.

 

정의와 약자,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이제는 보다 다른 정서로, 그러니까 21세기적인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지고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이것이 단지 지난 정권 때 광화문에서 정수리에 물대포 한번 맞아본 적 없는 자의 속편한 소리일까. 하지만 내 세대의 정의라는 것은 비판과 부정 속에서 반대급부로서 고양되는 눈물겨운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롭고 엉뚱하고 진기하고 재미있는 무언가를 좇아서 그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라고 믿는다.

 

예전에는 참 열심히 읽었는데, 이제는 이런 책이나 박노자, 김규항 같은 사람들한테 한계를 느낀다. 나의 정치적 좌표가 예전보다 좀 더 우편향되어서 그런가 하면, 결코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나의 경제적 처지나 사회적 지위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고, 사회를 대하는 가치관이랄까 사고방식이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동안 읽었던 책들 덕분에 오히려 더 급진적으로 변한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단은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유머가 없고 언어에 증오의 핏발이 서려 있다는 것은 이미 정신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는 징후니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면 일단은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 정서적 코드가 달라야 하고, 감각을 수용하는 촉수의 형태가 달라야 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변화로서 달성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전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촛불 때 내게 제일 멋지고 근사해보였던 사람들은 전방에서 확성기 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전단지 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후방에서 다정하게 참이슬 나눠 마시며 기타치고 북치고 노는 히피 무리들이었다. 난 경직된 도덕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하는 그들이야말로 혁명의 진정한 전위라는 생각을 했었다. 음, 근데 무슨 이야길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나. 모종의 의무감으로 이 책을 정독하려 했으나 지겨워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길 하려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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