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낳은 아기를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류를, 온생명을, 세계를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정한 마음이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규모로 확장될 수 있을까. 역사에 남은 성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을 떠올리면 가없는 존경과 경외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다.

오래 전에 딱 한 번 친구 따라 성당에 가본 일이 있다. 미사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던가, 신부님의 제안으로 지구 저편에서 오늘도 기아로 고통받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었다. 남을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도란 절박한 일을 앞두고 나 잘되게 해달라고나 비는 건 줄 알았는데. 그때 받은 뜨거운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 자신도 그다지 썩 사랑하지 않는 내가 이제 곧 아기를 낳게 생겼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 자문해보면 머리만 가렵다. 자신을 비하하고 조소하고 경멸한 적이 얼마나 많았나.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아기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 긍정을, 무조건적 사랑을 퍼붓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음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까.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출산이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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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9-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가 출산예정일이신지 모르지만 건강한 아기 잘 출산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축복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그만한 댓가를 치르고 받는 축복이기는 하지만요 ^^

수양 2017-09-09 19:34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육아야말로 헬게이트라고들 하는데... 아직 겪어보질 못해서... 치러야 할 댓가가 얼만큼인지 상상조차 안 되고 있어요 (겪어봐야지만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ㅠ_ㅠ) 지금은 다만 폭풍 전야의 이 호사스런 고요와 평화를 열심히 누리고 있을 뿐이네요ㅋ

빵가게재습격 2017-09-0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블로그에 낙서 저장하러 잠시 들렀다가 놀라운 소식을 보았네요. 건강한 아기 순산하세요.~~~~~

수양 2017-09-09 19:33   좋아요 1 | URL
재습격님 안녕하신가요^^ 감사해요~ 순산!! 해야죠^^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흰머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게. 내 나이에 흰머리라니 용납할 수 없다! 아니, 용납은 커녕 용서할 수조차 없다! 처음엔 악의에 불타올라 눈자위가 뻐근해질 때까지 두 눈 치켜뜨고 보이는 족족 뽑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많아져 뽑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숱도 없어져 가는 마당에 머리가 더 휑해질까봐 더 이상 뽑지도 못하겠다. 흰머리가 삐죽삐죽 보이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여자는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왜 굳이 앞에 여자를 붙이느냐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늙어가도 밀롱가에서는 보여지는 게 다르더라니까.

 

똑같이 늙었어도 밀롱가에 앉아있으면 늙은 아저씨는 나름 멋있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런데 늙은 아줌마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늙은 아저씨만큼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남성에게만 춤 신청권이 있고 여성은 거의 수동적으로밖에 처신할 수 없는 탱고라는 춤 자체의 속성에도 그 원인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밀롱가에서 늙은 아줌마는 어찌할 수 없이 쓸쓸해 보여. 화장을 안 하고 있으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으면 화장을 진하게 했다는 이유로 더 더욱 처량해 보여.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실제로도 밀롱가에 늙은 아저씨가 늙은 아줌마보다 더 많은 걸 보면.

 

젊었을 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게 화근일까, 늙으면 반대로 너무나 애처로워지는 생물이 여자인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아가씨는 꽃 같다. 아가씨가 걸어가면, 아기들도 어린이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심지어 아가씨도 아가씨만 본다. 모두가 아가씨만 본다고! 아가씨는 존재 그 자체로 어디서나 환영받는다. 그러나 늙으면? 쳐다도 안 본다. 밀롱가에서 남녀 막론하고 사람들이 쏘아대는 강렬한 시선들, 인기도, 춤 신청의 빈도를 추적해보면 여자의 일생의 이러한 생물학적 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 비정한 현실이여.

 

조지 클루니를 보라. 남자는 확실히 '외모' 이상의 어떤 것이 중요하다. 내뿜는 에너지, 카리스마, 매너, 제스처, 자신감. 총체적으로 말하면 외모가 아니라 풍모랄까. 매력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남자는 풍모 그러니까 간지가 중요하다. 밀롱가에서 관찰해보면 못 생긴 남자는 없다. 풍모가 찌질한 남자만 있을 뿐. 그리고 남자는 대체로 사회적 성취도가 높을 경우에 늙으면 늙을수록 간지난다. 개기름 잘잘 흐르는 사기꾼 춤선생 같은 간지 말고 정말로 중후함이 넘쳐흐르는 간지, 카이사르 같은 간지 말이다. 왜 밀롱가에서 늙은 남자는 도태되지 않는가. 나름의 경쟁력을 확보하는가. 춤 실력도 실력이지만 늙은 남자들이 내뿜는 바로 이런 간지 때문이지. 아는 사람은 알지.

 

그러나 여자는, 내가 볼 때 여자는 정말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한다. 간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자는 꽃 같아서, 젊을 땐 안 예쁜 여자가 없지. 젊으면 웬만하면 다 예쁘지. 화장 안 해도 예뻐. 움직이고 재잘대는 거 자체가 귀여워. 정확히 그 반대급부로, 늙으면 바로 그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웬만한 동년배 남자보다 더 처량해지고 만다. 속절없이 시들기는 쉽고 곱게 늙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젊은 시절이 너무나 화려해서일까. 그에 대한 응보일까. 여자의 경우 드라마틱한 생물학적 시듦 앞에서 간지의 항거는 무력하기 쉽다. 남자보다 더 그래.

 

좋음=예쁨=아름다움=싱싱함=생기발랄=생명력. 특히나 여자한테는 이게 다 같은 말 같다. 이 무슨 반페미니즘적인 무식한 발언이냐고 힐난해도 어쩔 수 없다. 여자는, 아, 이런 직관적 등식을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냉철하게 재고해볼 만한 정신머리도 채 차리기 힘들 만큼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엄습하듯이 훅 예뻐버린다고.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예쁘기 때문에 이런 괴상한 등식이 너무나도 쉽게 본능에 호소력을 발휘하고 마는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라. 그녀가 내뿜는 아름다움, 향기, 그 눈부심, 찬란함.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자를 생각만 해도 여자에 홀린다. 여자는 왜 이토록 예쁜가. 너무나 예뻐서 그 예쁜 것에 갇히고 마는 것이 여자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상 스스로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늙어서도 정성들여 분칠하고 꽃무늬 스카프로 멋을 내는 할머니들도 물론 예쁘다. 티비에 나오는 프랑스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우신지. 김선우 시인의 <봄날 오후>라는 시에서는 탑골공원 공중변소에서 "새악시처럼 연지바르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그려놓았던가. 그렇지만 늙어서도 애써 여자임을 주장하는 여자 말고, 어떻게든 여자임을 잃지 않으려 안달하는 그런 여자 말고, 여자임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까. 성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여자는 없을까.

 

도인 같은 할머니는 어떨까. 그러려면 일단은 장신구를 멀리하고 화장을 안 해야 한다. 화려한 꽃무늬 옷도 안 어울린다. 몸매는 마른 듯이 날씬하면서도 자세는 바르고 곧아야 한다. 눈빛이 형형해야 하고 피부는 깨끗해야 하며 몸에선 갓 말린 빨래 냄새나 솔향 같은 게 나야 한다. 하지만 그런 할머니는 너무 무섭지 않을까. 너무 금욕적이어 보이고 B사감 같아 보이지 않을까. 진주목걸이에 챙이 깊은 모자를 쓰고 홍차 마시는 프랑스 할머니는 고와보이지만 한편으론 늙어서도 끝내 여자임에 매몰되어 있는 그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도인 같은 할머니는 니체가 말한 금욕적 이상주의자, 니체가 그렇게 비난한 '사제' 같잖아. 역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군. 머리가 온통 백발로 뒤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연구해봐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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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철학 들뢰즈의 창 1
질 들뢰즈 지음, 이경신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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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수과학을 포함하는 근대 이후 모든 인간과학에서 과학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행동과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해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행동을 실리에 의해서 판단한다. 저러한 행동은 (사회 전체를 위해) 유용한가 유해한가. 행동의 동기는 무엇이고 결과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렇게 제3자적 입장에서 (마치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는 듯이) 실리를 따지는 태도 자체가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것. 그는 자신이 시도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에서 그가 시도하지 않는 행동을 주시한다. 행동하지 않는 그는 그 행동에 대한 자연권을 소유하고 있고, 그는 그것의 이득이나 이익을 이용하거나 거둬들일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힘과 힘의 의지를 파악하려면 언제나 그 힘이 발휘되고 있는 당사자, 즉 행위자, 화자, 독점한 자, 명명한 자 등등의 입장에서 살펴야지 제3자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제3자의 관점으로 보니까 왜곡이 생기는 것임. 반응적이고 수동적인 기존의 과학을 비판하며 니체가 주창하는 적극적인 과학(=미래의 철학)의 3과지 분과는 징후학, 유형학, 계보학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징후들을 해석하는 의사이자 새로운 유형을 창조하는 예술가이자 새로운 계보를 정립하는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

 

2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형이상학자들은 가령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식한 질문이다. 그렇게 묻는 대신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누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물이 고려되었을 때,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묻는 것. ‘누가 그 속에서 표현되고, 표명되고, 자신을 숨기기조차 하는지’를 묻는 것. 우리는 ‘누가?’라는 의문에 의해서만 비로소 본질로 인도된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누가'에 초점을 맞추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을 때,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그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지를 묻는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들은 무엇이고, 그 힘들에 복종하는 힘들은 무엇인가. 혹은 그와 반대로 누가 그것에 저항하는가. 현상 파악에 있어서 이것은 관점주의적이고 복수주의적인 기술이다. 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소유하고 그 속에서 표현되는 힘 속에서 발견되고, 그 힘과 유사한 힘들 속에서 발전되며, 그것에 대립하고 우월할 수 있는 힘들에 의해서 위태롭게 되거나 파괴된다.

 

3 우리가 질문의 방식을 전환하여 현상의 이면에서 현상을 만들어내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때, 여기서 의지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 대상이나 목표, 목적이 아니다. 대상, 목표, 목적, 동기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징후적인 어떤 것들일 뿐. 그렇다면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거나 혹은 반대로 자신과 차이 나는 것을 부인하는, 바로 그 의지 자체의 성질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질, 상응하는 힘들의 성질이다. 자기가 지닌 힘의 성질의 심화, 자기로부터 비롯하는 힘의 성질의 지속과 강화, 힘의 어떤 성질, 유형, 경향성의 심화. 이것이 바로 의지가 원하는 것.

 

반응성과 수동성은 인간과학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러한 성질 자체가 곧 인간이 보여주는 힘의 유형이다. 반응적 힘들의 승리가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 자체가 반응적임. 계보학, 유형학, 징후학의 방법으로 우리가 힘의 성질에 주목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존의 힘의 유형 외에 또 다른 새로운 힘의 유형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힘들의 유형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며 초인간적인 것이다. 대지를 긍정할 수 있는 의지이며, 그 자체로 대지의 성질인 그것은 바로 ‘가벼움’이다.

 

4 니체 이전에 권력의지나 유사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니체 이전의 의지철학은 몇 가지 오해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 이전의 철학자들은 권력을 그저 하나의 표상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홉스, 헤겔, 아들러의 철학에서 보여지는 권력은 항상 실질적으로 의식들의 비교를 가정하는 표상의 대상, 재인식의 대상이다. 투쟁해서 빼앗고 탈취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고 비교하는 대상으로서의 권력. 우월감이나 열등감, 허영심을 자아내는 권력.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을 전제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권력은 노예가 자기 자신에게 만들어주는 권력의 표상일 따름이다. 노예만이 이러한 권력 개념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면 노예만이 항상 타인(주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권력을 표상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면, 권력의지라는 건 기존의 사회 내에서 현행하는 가치들, 이미 인정된 가치들(돈, 명예, 권력, 명성)에 자신을 결부시키는 의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거야말로 순응주의다.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권력의지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를 보여주는. 

 

표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 개념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탈취하기 위한 투쟁을 상정한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 전쟁, 경쟁 이런 것들은 니체의 의지철학에서는 낯선 개념일 뿐이다. 이런 식의 투쟁과 전쟁과 경쟁은 결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다. 이때의 투쟁은 그저 약자들이 강자들을 이기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것이 창조하는 유일한 가치들은 승리하는 노예들의 가치들일 뿐이다. 니체는 투쟁을 배제한 권력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권력의지를 표상의 대상으로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필히 전쟁과 투쟁을 상정하게 되고 그 결과 권력의지를 탐구하면 할수록 비통해진다. 의지라는 것은 점점 더 참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무엇이 된다. 또한 권력의지 자체가 굉장히 가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허상으로 여겨지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에게 의지는 부인하고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다. 허무주의, 염세 철학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6 권력의지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기원적이고 미분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허무주의적 해석술을 고안해내는 약자들의 권력의지조차도 얼마나 창조적 작업인가) 그것은 결코 표상되지 않고, 결코 해석되거나 평가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이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위 기원적 요소에서 파생된 것을 원한다. 기원적 요소(권력)는 힘과 힘의 관계를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힘들에게 성질을 부여한다. 조형적 요소인 그것은 그가 결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결정하고 그가 성질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성질을 부여한다.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은 그 같은 힘의 관계이고, 그 같은 힘들의 성질이다. 그리고 또 그 같은 권력의 성질이다. 즉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매 경우에 있어 변화하는 그 복합체는 주어진 현상들이 상응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모든 현상은 힘들의 관계들, 힘들과 권력의 성질들, 그 성질들의 뉘앙스들, 요컨대 힘들과 의욕의 어떤 유형이다.

 

권력은 의지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움직이고 변화하며 조형적인) 어떤 것이며, 권력은 뭔가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주는 것,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권력의지다. 권력의지는 조형적이고 그것이 자신을 결정하는 매 경우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영원회귀가 존재이지만 생성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인 것처럼, 권력의지도 하나이지만, 다수에서 긍정되는 하나이다. 그것의 통일은 다수의 통일이고, 다수에 의해서만 언급된다. 권력의지의 일원론은 복수적 유형론과 분리될 수 없다.

 

고귀하고 우아한 힘의 유형이 있고, 저속하고 비루한 힘의 유형이 있다. 사람들은 왜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로운지 물을 것이다. 긍정은 왜 부정보다 가치로운가. 해답은 영원회귀의 시련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즉 되돌아오는 것, 되돌아옴을 견디는 것, 되돌아오길 원하는 것이 보다 더 가치롭고, 절대적으로 가치롭다. 영원회귀의 시련은 부정적이고 반응적인 힘들이 살아남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2장 말미에서 했던 얘기. 영원회귀의 지속적인 운동 속에서 어떤 원심력이 작용하여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떨어져 나가고 필연적으로 긍정적인 것만 잔존함. 이것이 긍정의 긍정, 이중의 긍정이라는 영원회귀의 원리) 

 

7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은 첫 번째로 원한, 두 번째로는 가책, 마지막으로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모두 반응적 힘들의 승리의 모습이고, 또 허무주의적 형태들이다. 니체는 원한을 가상적 복수, 본질적으로는 정신적인 제재로서 제시한다. 또한 원한의 구성은 오류 추리를 함축한다. 즉, 못한 것을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혹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해버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 원한이 있기 때문에 그 짝패로서 가책이 생긴다. 그리고 이 삼단논법은 금욕적 이상으로 완결된다. 금욕적 이상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신비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영혼의 오류추리 속에서 원한이 생겨나고, 원한 속에서 세계는 전도되어 도덕과 삶이 대립을 이루게 되고, 그러한 이율배반의 사태 속에서 가책이 생겨나고, 이 모든 부정적 허구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금욕적 이상이 도출된다.

 

8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종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비판을 가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공손한 비판이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들을 믿으면서 그것들을 비판한다. 인식과 도덕과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참된 인식과 참된 도덕과 참된 종교라는 성역을 남겨둔다. 칸트의 비판은 그런 가치들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반면에 니체가 덕을 고발할 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허위의 덕도 아니고, 덕을 가면으로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바로 본래적인 덕 그 자체에 대해 고발한다. 참된 덕의 빈약함, 참된 도덕의 믿기 어려운 편협함, 참된 가치들의 저속함에 대한 비판. 우리가 상정하는 모든 참된 가치들이란 관점주의에 따른 것일 뿐이다. 사실이나 도덕적 현상은 없고, 현상들의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한다. 인식 자체는 하나의 환상이며, 인식은 오류이고, 설상가상으로 왜곡이다. 저 진리의 참된 세계에 비할 때 이 삶은 가상과 오류투성이의 세계가 되겠지만, 사실 저 진리의 세계야말로 이 ‘가상세계’에 덧붙여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

 

9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비판이 이성 자체에 의한 이성 비판이어야만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다. 이성을 재판관이자 동시에 피고로 만드는 것이므로. 그가 말한 인간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초험철학은 우리가 인식한 것들의 내적 기원의 원리가 아니라 단순히 인식 조건의 원리일 뿐이다. 이성이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따라야 할 여러 범주들과 절차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 자체의 기원은 따로 있다. 이성 속에 숨겨진 것, 이성 뒤에 버티고 선 것은 이성이 아니라 어떤 의지다. 권력의지라는 니체의 원리는 칸트적인 초험적 원리가 아니다. 기원적이고 계보학적인 원리, 입법적 원리로서 권력의지만이 진정한 내재적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오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깨달으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하단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복종에 불과하다. 이성을 벗어난 영역에 대해서는 마음의 필요, 도덕, 의무를 끌어들이며 역시 복종을 강요한다. 그의 비판철학은 부활한 신학, 프로테스탄트적 취향을 가진 신학 이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칸트의 철학은 현행 가치들을 내재화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칸트에게서 능력들의 올바른 사용이란 이상하게도 그 기존의 가치들, 즉 참된 인식, 참된 도덕, 참된 종교 등에 맞물린다.

 

10 칸트와 대비되는 니체의 비판철학은 다섯 가지 점에서 근거한다. ①니체의 비판철학은 사실들을 위한 단순한 조건인 초험적 원리들이 아니라 믿음∙해석∙평가들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는 기원적이고 조형적인 원리들이다. ②니체의 비판철학은 이성에 복종하는 사유가 아니라 이성에 반대해서 사유하는 사유이다. ③칸트가 기존의 가치들의 재분배를 감시하는 재판정의 법관, 평화의 법관이라면, 니체는 전쟁을 예고하는 계보학자이다. ④니체의 비판철학은 정신이나 이성, 자의식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취하는 비판적 심급은 권력의지다. 니체의 비판적 관점은 권력의지의 그것이다. ⑤니체의 비판의 최종목적은 초인, 극복되고 추월된 인간에 있다. 비판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것, 즉 다른 감성이 문제이다.

 

11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기원을 추적해보자. 진리의 개념은 어떤 세계를 참된 것으로 규정한다. 참된 세계를 지시하는 참된 인간, 그는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 속임 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곧 길을 잃게 하고 속이고 감추고 현혹시키고 눈멀게 하는 어떤 것임을 전제한다. 그렇다, 이것은 삶이 가진 고귀한 거짓의 힘이다. 그런데 진리를 원하는 자는 이 고귀한 거짓의 힘을 비하하길 원한다. 그는 삶을 하나의 오류로, 세계를 하나의 외관으로 만들어서 삶에 인식을 대립시킨다. 현 세계를 피안의 세계와 대립시킨다. 그는 이제 도덕가가 되어서 현세와 내세를 선악으로 나누고 이 세상의 삶을 비난하고 심판하며 이 세계의 허구성을 고발한다. 소위 참된 세계, 그것은 삶에 반대하는 삶이다. 그는 삶이 그 자신을 수정하고 외관을 수정하길, 고결하게 되길, 그것이 참된 세계로 이행의 구실을 하길 바란다. 삶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로부터 등 돌리길 원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파헤쳤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이 같은 도덕적 금욕주의자의 모습이다. 금욕적 이상의 인간에게서 니체는 허무주의, 즉 무의 의지를 발견한다. 무의 의지에서 비롯한 반응적 힘들이 인식, 과학, 종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끊임없이 금욕적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

 

12 도처에 금욕적 이상이 있지만, 그것은 시류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고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한다. 처음엔 종교의 옷을 입었다가, 종교에서 도덕의 옷으로 갈아입고, 또 그 다음엔 도덕에서 과학으로. 끊임없이 출현하는 금욕적 이상을 발본색원하려면, 비판은 진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반대하는 판결’은 금욕적 이상이 진리의지 너머에는 더 이상 은신처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를 대신해서 대답할 그 누구도 데리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때 금욕적 이상은 자기 지위를 상실하며 가면을 잃고 더 이상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인물도 이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니체는 <다르게 느끼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이상을, 다른 인식 방식을, 다른 진리 개념을,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지 속에 전제되어 있지 않지만 완전히 다른 의지를 가정하고 있는 어떤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13 삶을 인식에 봉사하게 할 때 삶은 반응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유를 삶에 봉사하게 할 때도 삶과 사유의 모형이 되는 것은 반응적인 삶이다. 니체의 새로운 사유는 “삶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데리고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 삶을 긍정할 사유”이다. 여기서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이고, 사유는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다. 삶을 긍정하는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불확실성 속으로 끊임없이 투신하도록, 낯선 체험을 하도록, 정착할 새로운 장소를 끊임없이 찾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하는 자들의 삶은 위대한 항해자들의 탐험과 같다. 험난하지만 비범한 삶들. 그런 삶 속에서만 창의력, 사색, 과감성, 절망, 이상이 존재한다.

 

14 진리를 추구하는 금욕적 이상주의자의 의지와 그 성질이 전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의지다. 예술은 ‘사심 없는 활동’과는 반대이다. 예술은 사심을 없애지도 않고, 욕망과 충동과 의지를 중지시키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예술은 권력의지의 자극제, 의욕의 흥분제이다. 예술은 오로지 적극적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극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냄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사유를 펼치는 자들이다. 삶의 활동은 원래 속이고 현혹시키고 유혹하는 거짓의 힘으로 점철되어있다.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오류인 한에서의 세계를 확대하고, 거짓말을 신성화하고, 속이려는 의지를 우월한 이상으로 만든다. 예술은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은 거짓을 더 고귀한 긍정의 힘으로 고양시키는 허구들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은 죄다 헛된 거짓이고, 살 가치가 없고, 천국에 갈 일만이 관건이다’라는 반응적인 생각과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거짓된 세상을 더욱 아름다운 거짓으로 만들자’는 적극적인 생각의 차이. 사고관의 차이.

 

15 우리에게 익숙한 독단적인 사유의 이미지가 있다. 사유는 그 안에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본유관념) 정념에서 비롯한 오류를 피해서 올바른 방법으로 사유하기만 하면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생각. 이에 반하여 니체는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요소는 진리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이다. 사유의 범주들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유 자체를 독점하고 있는 힘들의 본성에 의한 우아함과 비루함, 고귀함과 저속함이다.

 

또한 니체에게 있어서 사유의 부정적 상태는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고 저속함이다. 반응적 힘들에 의해서 지배된 정신상태. 노예의 승리를 표현하는 어리석고 저속한 사유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부정적 상태를 고발함으로써 사유를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임무다. 시대를 역행하는 사유, 반시대적 고찰이야말로 철학의 소명인 것.

 

그런데 모든 사유는 항상 사유를 독점하는 어떤 힘에 의존한다. 어떻게 사유하도록 훈련시키고 교육하고 강제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의 최종 목표는 삶을 긍정하며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안해내는 예술가와 철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를 세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교회와 국가가 문화의 이러한 사유 훈련을 전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반시대적 고찰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공격하고 체제비판적인 사유의 힘을 길러야 할 문화가 어용문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스적인 것에서 독일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 문화의 퇴락.

 

이처럼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유는 사유를 독점하는 힘들에 의존하는 바, 사유는 언제나 그 기저에 복잡한 힘들의 관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여러 힘들의 유형, 힘들의 다양한 위상이 실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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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장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내-존재 일반
12절 안에-있음 그 자체에 방향을 잡아 세계-내-존재를 대강 그려봄

현존재는 선험적으로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구성틀에 근거하여 고찰되어야 한다. 세계-내-존재란 무엇인가. 먼저 내-존재,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머무르다, 거주하다, 체류하다, 습관이 되었다, 친숙하다, 보호하다, 사랑하다, 돌봐주다, 몰입해 있다 등등의 의미. 즉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친숙한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에 몰입해 있는 채로 거주한다’는 것. 세계-내-존재는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다. 현존재가 하나의 존재자로서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이 문제되고 있는 것. 세계는 존재자가 아니라, 오직 현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가 세계로서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를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현존재의 이해 안에서만 비로소 세계로서 드러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세계라는 개념 역시 내-존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존재에 속하는 실존주임.

 

‘<세계>-곁에 있음’은 세계-내-존재에 기초한 하나의 실존주이다. <세계>-곁에 있음이란 현존재가 세계 내의 존재자들에 몰입하면서 그것들과 관계한다는 것, 건드린다는 것, 만난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자가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존재자가 본성상 ‘안에-있음’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을 때뿐이다. 즉 그의 거기-있음과 더불어 이미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그에게 함께 발견되어 있고(세계-내-존재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 통일된 현상이므로), 그 세계로부터 존재자가 접촉 속에 드러날 수 있을 때에만, 그 존재자가 그것의 눈앞에 있음에서 접근 가능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세계 내부에 존재하나 무세계적인 그런 두 존재자는 결코 서로를 건드릴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다른 것 곁에 있을 수 없다.

 

‘안에-있음’은 ‘배려함(=고려함)’의 존재양식을 가진다.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 배려함 또는 고려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하다, 처리하다, 공급하다, 마음 쓰다 등의 의미. 배려함이란 곧 현존재가 현존재 이외의 존재자들과 실천적으로 관계하는 방식들 일반을 가리키는 존재론적 용어 즉 이또한 실존주.

 

13절 어떤 한 기초지어진 양태에서의 안에-있음의 범례화: 세계인식
인식함 자체는 선행적으로 ‘이미-세계-곁에-있음’ 안에 근거해 있고, 현존재의 존재는 그 사실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세계-곁에-있음’으로서의 현존재가 가지는 인식이란 눈앞의 것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게 아니다. 세계-내-존재는 배려함으로서 배려되고 있는 세계에 의해서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인식작용은 선행적으로 세계와 배려하는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존재자 자체를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현존재는 그러한 인식작용에 의해서 그때마다 이미 개시되어있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존재관계를 역동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인식작용은 결코 폐쇄된 자신의 내부에서 고립적이고 정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식은 그 자체로 세계-내-존재가 취하는 하나의 실존론적 양상일 뿐이다. 인식 자체가 현존재의 한 양태인 것. 따라서 인식작용에 앞서 그러한 인식작용의 근거가 되는 세계-내-존재에 대한 선행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 대체 이 책에서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존재'라는 게 뭔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그것.
-어떤 하나의 존재자에 대해 '그것이 있다' 혹은 '그것은 ~이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나와 존재자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선(先)술어적 조건.
-존재는 존재자가 비로소 존재자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해의 기반'이다.
-존재는 선술어적 조건이자 이해의 기반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 이해를 갖느냐에 따라 존재자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그 내용을 달리 한다.
(인식의 가능 조건?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란 푸코의 에피스테메 같은 것인가? 후설의 이념적 본질 같은 것인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됨. 하나님 이런 게 아니야. 하나님 같은 것도 존재자에 불과.

 

3장 세계의 세계성
14절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모든 현존재는 각기 우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란 결국 주관적인 종류가 되는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하는 하나의 공동의 세계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가? 이런 의문 속에서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아닌 세계 자체의 ‘세계성’이 문제가 된다. 세계성은 일종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물을 때, 우리는 결코 현존재분석론의 주제적 장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 자체의 한 성격이다.

 

세계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다양한 의미 중에서 이 책에서는 세계를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곳’으로 이해한다. 이때의 세계는 공적인 우리-세계이기도 하고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고유한 가정적 주위 세계이기도 하다. 둘의 경우 모두 세계는 실존적 의미를 가진다.

 

데카르트 이후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다르게, 세계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서의 평균적인 일상성의 지평에서 분석론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뒤밟아야 하며, 그것을 현상적인 발판으로 삼아 세계와 같은 것이 시야에 들어와야 한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친숙한 생활세계이다. 이 생활세계, 주위세계의 세계성 분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가. 주위세계성 및 세계성 자체의 분석

15절 주위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

가장 가까이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현상학적 제시는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를 실마리로 삼아 달성될 것이다. 일상적인 세계-내-존재는 ‘세계 안에서의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의 왕래(교섭)’를 부단히 수행하고 있다. 왕래(교섭)는 배려함의 방식이다. 만지고 다루고 사용하는 적극적인 실천. 이때의 존재자는 어떤 이론적인 세계-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칸트의 사물(Ding) 같은 게 아님. 사물이 아니라 도구라고 칭해야 한다. 도구의 존재양식을 살펴야 한다. 존재자들은 일차적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 의해서 드러난다.

 

도구란 본질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어떤 것이다. 유용성, 기여성, 사용성, 편의성 등과 같은 여러 방식들이 하나의 도구전체성을 구성한다. 가령 망치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망치를 들고 망치질을 할 때 우리는 대개 이 망치라는 존재자를 주제적으로 눈앞에 놓여있는 사물로서 파악하지는 않는다. 존재자의 외양을 아무리 날카롭게 바라본다고 해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손안의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손안에 있음의 이해’를 결여한다. 우리가 존재자를 눈앞의 대상으로 놓고 날카롭게 관찰할수록 도구는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은폐할 뿐이다.

 

우리는 망치라는 물건을 그저 멀거니 바라보는 게 아니라, 손에 잡고 활기차게 사용한다. 그렇게 망치를 능란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우리와 망치의 관계는 보다 더 근원적이 될 것이고, 망치는 보다 더 가려지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망치는 망치 그 자체로서, 도구 그 자체로서 우리와 비로소 만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들이 고유하고 자명하게 ‘그 자체로 있음’을 그 사물들을 사용하면서 ‘명확하게 주목하지 않는 배려함’ 속에서 만나게 된다. 내가 지금 도구를 사용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능숙하게, 제 손발과 같이 능숙하게 도구를 다루면서 비로소 그 도구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 그런데 우리가 망치를 능숙하게 사용하면 할수록 정작 우리는 망치라는 존재자에 대해서 잊는다. 오히려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망치로 박는 못이다. 도구가 사용되는 존재자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구들이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경우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 도구의 존재성격을 ‘그 자체에 즉해 있음’이라고 한다.

 

하나의 도구는 그 도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내포한다(지시한다). 우리는 하나의 도구를 보면서 도구가 가지는 목적(무엇에 사용될  도구인가), 도구의 유래와 재료, 도구를 이용하는 사람 혹은 도구를 착용하는 사람 기타 등등 여러 가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품과 함께 손안에 있는 존재자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도구의 착용자 또는 이용자 아울러 그들과 더불어 있는 공공의 세계, 주위세계 자연까지도 만나게 된다.

 

16절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에게서 알려지는 주위세계의 세계적합성(세계연관성)
존재자를 배려하는 세계-내-존재에게 세계와 같은 어떤 것이 문득 스스로를 내보이는 현상, 다시 말해 현존재가 손안에 든 도구에 배려/고려/몰입되는 가운데 현존재에게 배려된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함께 일정한 방식으로 그것의 세계성이 빛나게 되는 그런 사태는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손안의 도구가 파손되었을 경우 혹은 도구가 아예 부재한 경우 혹은 도구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를 떠올려보자. 여러 가지 이유로 도구가 사용불가능해질 때 비로소 도구는 우리 눈에 띄게 된다. 변양된 도구와의 만남. 바로 이때 앞서 말한 바의 사태가 드러난다.

 

도구가 작동불가능하게 되어 눈에 띄거나, 도구가 아예 없어져서 절실해지고, 도구가 사용이 원활하지가 않아서 억지로 버티면서 사용해야 할 때, 어떤 의미에서 도구는 손안에 있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자기 자신(‘그 자체로 있음’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결별하는 것이다. 손안에 있음이 다시 한 번 자신을 내보이기는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또한 손안의 것의 세계적합성도 드러난다.   

 

즉, 도구가 제 기능을 못할 때, 그 도구의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는데, [여기서 도구의 구성적 지시란, 도구의 존재를 구성하는, 도구와 연관된 모든 내용들: 도구의 목적, 도구의 유래, 도구의 이용자, 도구의 이용으로 인해 수혜를 입는 자, 도구가 세상에 쓰이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도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온갖 세계 양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도구가 지시하는 것들임] 지시의 방해 속에서 역설적으로 지시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결여와 부재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감.

 

도구에 문제가 생길 때에야 비로소 그 도구가 지시하는 것, 그 도구와 연관된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제야 비로소 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 도구를 손안에 가지고 있었던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다시금 주위세계가 스스로를 알려온다. 세계가 열어 밝혀진다. 세계가 훤히 열어 보인다. ‘손안의 것의 탈세계화’와 동시에 ‘세계의 빛남’이 이루어진다.

 

반면, 주위 세계의 일상적 배려 속에서 손안에 있는 도구를 그것의 ‘존재 자체’로 만나려면 도구를 도구의 존재마저 잊을 정도로 능란하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경우여야 한다. 도구의 작동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나도 그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런 때는 세계가 전혀 자신을 알려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러한 때라야만 그 도구 안에 도구의 자체 존재의 현상적 구조가 구성되어 있다.

 

눈에 안 띔, 강요하지 않음, 버티지 않음- 다시 말해 도구가 원활하게 잘 작동하는 성질, 유용성, 편리성, 편의성. 도구의 이런 성질들은 곧 ‘손안에 있는 것의 존재의 긍정적인 현상적 성격’을 의미한다. 손안의 것이 자체 안에 머물러 있는 성격. ‘그 자체로 있음’, ‘자체 존재’로서의 성격. 요약하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자체 존재는 오직 세계현상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가령,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반원을 떠올려보자. 반원의 부단한 회전 속에서 비로소 홀로그램처럼 현상하는 ‘구’는, 회전하는 반원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론적으로 파악가능하다.]

 

17절 지시와 기호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계는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에서 도구의 도구적 성격과 함께 개시된다. 다시 말해 도구의 지시연관 속에서 세계성이 구성된다. 도구의 지시연관성, 지시전체성이 세계성을 구성하는 바, 지시들이 발견될 수 있는 도구의 하나로서 기호를 분석해봄으로써 도구의 성격(지시적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명해보자. (이후로 무슨 말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음)

 

18절 사용사태(용도)와 유의미성(유의의성), 세계의 세계성
도구는 지시적 성격을 갖는다. 즉 도구는 어떤 것으로 지시되고 있으며(가령 망치란 못 박는 것이고 옷걸이란 옷을 거는 것이다) 이것(=용도)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의 특정한 도구로서 발견된다. 그런데 어떤 도구가 사용되는 용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를 지시한다. 가령, 어떤 도구가 A를 하기 위한 도구인데, 그 A는 B를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연쇄가 계속되면 결국 필연적으로 어떤 용도도 더 이상 갖지 않는 궁극의 용도로 귀착된다. 이렇게 더 이상 다른 용도들을 위한 용도가 될 수 없는 것이 궁극목적이다. 궁극목적은 세계 내부에서 도구의 존재양식을 갖는 존재자가 아니라 그 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규정되고 있으며 그 존재구조에는 세계성이 속하는 존재자인 현존재의 존재에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현존재만이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가 어떤 도구를 특정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해서 현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이미 어떤 용도를 갖는 도구로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것의 도구적 성격에서 발견하면서 그것을 이러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 존재자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쓰일 용도에 따라서 존재하게 함’은 모든 도구를 도구로서 개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현존재가 존재자들 사이의 용도 연관의 전체, 즉 용도 전체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도전체성=지시연관의 전체성. 현존재의 궁극목적에서 시작되는 목적연관의 전체성이야말로 세계의 본질 즉 세계성이다.

 

앞서 말했듯 현존재는 다른 용도를 위한 용도가 될 수 없고 그 자체가 궁극목적이다. 가령, 현존재가 A하기 위함이 궁극목적이라면, A를 위해 B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고, B를 만들기 위해 C가 필요하고 C를 얻기 위해 D가 요청된다고 하자. 이렇게 궁극목적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직접 다루고 있는 도구에까지 이르는 목적연관의 전체를 유의미성이라 한다. 목적연관의 전체성=세계성=유의미성. [하나의 도구를 단어라고 치면, 유의미성이란 문법이나 글 전체의 맥락을 의미하는 것인가?]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항상 친숙하게 이해하면서 살고 있는 곳인 세계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유의미성이다. 유의미성을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이러한 이해 안에서만 존재자가 용도라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현존재가 항상 이미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러한 유의미성 자체는, 현존재가 의미와 같은 것을 개시할 수 있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가 낱말과 언어를 기초 짓는다.

 

나. 데카르트의 세계해석과 대조하여 세계성을 분석함

19절 연장적 사물로서의 "세계"에 대한 규정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아와 물체적인 사물을 구별한다. 이 구별이 나중에 정신과 자연의 구별이 되고, 자연은 공간이며 세계가 된다. 데카르트는 물체적인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본규정을 연장에서 본다. 즉,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와 같은 연장이 물질적 실체의 본래적 존재를 형성한다고 보면서 이것을 세계라고 부르고 있음. 분할가능성, 형태, 운동, 촉감, 색깔의 변화와 같은 물성 변화는 연장의 양상(양태)일 뿐 연장의 본질은 아니다. 연장은 어떠한 양태 변화 속에서도 자신을 견지하며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체사물에서 그러한 지속적인 머무름을 만족시키고 있는 바로 그것이 그 물체사물에서의 본래적인 존재자이며, 이것이 곧 물질적인 실체의 실체성을 형성한다.

 

20절 “세계”의 존재론적 규정의 기초들

물체적 사물(존재자)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데카르트의 두드러진 특징은 데카르트가 존재의 의미를 눈앞의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실체성을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보는 존재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 데카르트 뿐만 아니라 고대 존재론과 중세 존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존재를 눈앞의 자명한 존재로 간주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는 이제껏 제대로 구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를 눈앞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실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회피할 뿐 아니라, 실체 자체, 즉 실체의 실체성은 그 자체로는 드러날 수 없음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실체는 그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우리의 감각을 촉발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는 인식되지 않는다. 결국 존재를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단념되고 데카르는 일종의 도피로를 찾게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론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존재자를 눈앞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도구적 존재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실체성으로서의 눈앞의 존재는 도구적인 존재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눈앞의 존재자들인 실체들이 갖는 ‘존재적 속성’을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과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21절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에 대한 해석학적 논의
데카르트는 세계의 존재를 연장으로 보면서, 지성을 통해서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길이, 폭, 깊이라고 하는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을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으로는 눈앞에 존재하고 수학적으로 인식되는 항존적인 것만을 본래적 존재로 보는 것은,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존재를 극단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존재자를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이후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 주위세계성의 주위성과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가 갖는 공간성은 내부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공간 안의 존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내부성이란 연장을 갖는 어떤 존재자가 보다 큰 연장을 갖는 다른 존재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현존재가 공간이라는 커다란 그릇 안에 있다는 식의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 현존재가 공간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내부성과는 구별되는 현존재의 공간성이란 무엇인가.

 

22절 세계 내부적인 도구적 존재자의 공간성
모든 도구적 존재자는 각각의 방역을 갖는다. 방역이란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물을 때의 그 ‘어디로’에 해당. 도구가 갖는 자리. 방역=도구의 자리=도구가 놓이는 공간=어디. 도구의 방역 즉 공간은 일상적인 고려를 통해서 발견되고 둘러봄에 의해서 해석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둘러봄에 의한 해석 속에서, 공간은 유의미성에 따라 발견되고 분절된다. 공간은 발견되고 구획되고 조정되고 만들어지는 것.

 

23절 세계-내-존재의 공간성
현존재는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존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성이 귀속된다면, 그것은 오직 이러한 안에-있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안에-있음(=세계-내-존재)의 공간성은 ‘거리 제거’와 ‘방향을 잡는다’는 두 성격을 갖는다. 먼저 현존재의 존재양식으로서의 거리제거는 어떤 것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두는 것을 의미한다. 둘러보는 고려에 의해서 조달하고 마련하며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두는 것. 편리한 곳에 두는 것.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면서, 둘러봄에 의해서 발견된 방역 안에서 각각의 도구들에게 적합한 자리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일상적 주위세계를 확대해 나간다.

 

현존재는 거리를 제거하는 내-존재인 동시에 방향을 잡는다는 성격을 지닌다. 둘러보는 고려는 방향을 잡으면서 거리를 제거한다. 방향을 잡는 것은 거리 제거와 마찬가지로 세계-내-존재의 존재양상으로서 고려의 둘러봄에 의해 선행적으로 인도되고 있다. 방향의 결정은 순전히 주관적으로 현존재의 신체를 중심으로 해서만 행해지는 게 아니라, 도구들의 용도전체성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다시 말해 방향 결정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것. 우리는 그때마다 이미 숙지되어있는 세계를 통해서 방향을 잡는다는 것. 따라서 방향을 제대로 취하려면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를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체를 기준으로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하는 느낌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와 같이 거리 제거와 방향 잡음은 세계-내-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 발견된 세계 내부적 공간 안에서 둘러봄에 의해서 고려하면서 존재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규정한다.

 

24절 현존재의 공간성과 공간

도구가 귀속되어야 할 방역은 고려의 궁극목적을 정점으로 하는 용도들의 전체를 통해서 그 윤곽이 그려진다. 즉, 현존재가 도구를 사용하기 이전에 용도전체성이 개시되어 있고, 이러한 용도전체성과 함께 공간도 개시되는 것. 용도전체성에 대한 개시는 유의미성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유의미성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용도전체성을 개시하고, 용도전체성에 입각하여 거리를 제거하고 방향을 잡으면서 어떠한 것이 어떠한 방역에서 적합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도록 존재케 한다.

 

이렇게 세계의 세계성과 함께 개시되는 공간은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3차원적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공간이 주관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세계는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간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공간이 현존재의 고려에 의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공간을 해명해야지 데카르트처럼 공간 내지 공간적 연장을 통해서 세계를 파악하려 해서는 안 됨.

 

방역으로서의 공간은 용도전체성으로서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항상 주제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구의 공간성이 둘러봄에 의해서 주제화되면 비로소 공간은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둘러봄에 의해 주제화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을 우리는 순수한 주시에 의해 계산하고 측정할 수 있다. 순수한 주시에 의해서 공간을 보게 될 경우, 주위세계적 방역들은 순수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변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세계 내부적 도구들이 자리하는 공간은 용도라는 성격을 상실한다. 세계 역시 특수한 주위세계적인 성격을 상실하며 그 자체로 무세계적인 주체가 인식하는 자연세계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동질적 자연공간은 도구들의 세계연관성을 탈세계화하는 발견양식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이런 공간(동질적 자연공간)을 하나의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고, 칸트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는 직관형식으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런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추상된 것으로 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동질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생활세계적인 의미를 사상해버린 추상물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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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연히 죽어있는 서재에 들르면 누군가의 무덤에라도 방문한 것마냥 사뭇 경건해진다. 나혼자 절도 하고 술도 뿌리고 오래도록 무덤가에 누워있다 보면 어디선가 귀신 울음이라도 들려오는 것 같다. 아름다운 폐허로구나! 누군가는 이토록 찬란한 정신의 문명을 건설하고 떠났구나.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제 몫으로 주어진 전쟁 같은 삶을 바쁘게 치르고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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