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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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유럽 회화 작품들은 유명도나 역사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정서에 감응하는 작품만을 주관적으로 선정한 것이다. 저자는 프라 안젤리코의 <그리스도의 책형>을 보면서 한국에 정치범으로 수용되어 있는 자신의 형들을 떠올리고, 피카소의 <게르니카>에서 한국의 5.18을 연상하며,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에서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묵묵히 감당해온 누이를 생각한다. 작품 하나하나가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과 상처들을 풀어놓는 매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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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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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 의의와 한계, 박정희의 개인사, 이승만 하야 후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 없이 사분오열했던 정치판, 군부의 성장과 5.16 쿠테타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 5.16 쿠테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거진 일 년 정도 존재했던 장면 내각에 대하여 굉장히 소상히 조명하고 있다. 흔히 장면 내각은 쿠테타를 막지 못한 무능한 정부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는 장면에 대한 세간의 인색한 평가가 쿠테타 세력이 30년 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함으로써 빚어진 역사 왜곡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어떤 역사 연구자는 장면이 단군 이래 최초로 민주주의라는 신화를 역사적 현실로 바꿔놓은 인물이라고까지 평하기도 한다. 어쩌면 무능한 것은 장면이라는 일개인이 아니라, 당시 낙후되어 있던 국내 정치판과 시민 의식 전체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대사는 거진 미국의 배후조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책을 읽어보면, 오로지 국내에서 이루어진 이전투구의 정치사라고만 알고 있던 곳곳에 실상은 미국의 이권과 영향력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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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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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로 뒤늦게 한국 현대사에 대해 알아갈수록 인간 존재의 지극한 동물성에 치를 떨게 된다. 흡사 원시림의 생태계를 방불케 하는 우리네 역사 속에서 인간이 동경하는, 혹은 당위로 여기는 초월적 관념들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만 존재하는 허구가 아닐까. 한국현대사를 살펴보고 있으면 문득 인간 본연에 내재해 있는 동물적 야만성과 잔인성 같은 것들에 대하여 탐구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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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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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반부에 저자가 종교를 '과거에는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불운한 부산물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과거에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이란, 인간이 이원론적이고 창조론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성향을 말하는데,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특질을 낳았고, 종교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되면서 오늘날 전세계적 광신 현상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물(내지는 부작용)'의 개념은 나방 이야기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나방은 광원을 일종의 나침반으로서 이용한다. 즉 나방의 비행로는 빛을 기점으로 한 나선 궤도이다. 만약 광원이 달빛이라면 나방은 직선 방향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달빛이 아닌 인공조명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로등 주위를 미친듯이 맴돌고 있는 나방, 그것은 일종의 '불운한 부작용'이며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자면 에러가 난 것이다.  

종교 활동(정확히는 광신 현상)을 가로등을 맴도는 나방에 비유한 저자의 탁견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 시대의 맹목적인 종교 활동은 오늘날의 자본 사회 시스템과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체나 휴식의 시간이 부재하고 항상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소진시키기를 부추기는 자본 사회의 속성이 광신을 부채질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시야에 나타나 우리를 현혹하는 가로등, 느닷없이 출현하여 인류를 에러 상태로 몰고 가는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혹 자본 사회 시스템은 아닐까...  

2.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러한 성향들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본능이 종교라는 제도로서 현현하는 것인지도. 뭐랄까, 진화생물학적 자기인식은 너무나 정직해서 차라리 앙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는 인간만이 가진 형이상학적 욕망, 꿈과 이상과 낭만과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하나도 없다. 그런 것이 과학이라면, 애석하게도 나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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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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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원론적인 신을 구상한다. 하나는 본래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이며 반대편의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신, 즉 실존적인 신이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선(善)의 신이라고 하고 후자를 지혜의 신이라고 하는데, 이 두 신의 영역을 조악하게나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선(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신): 절대 진리로서의 정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천상의 세계를 관할하는 신. 이 계(界) 안에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절대 복종과 순응뿐이다. 이 무지하고 순수한 식물성의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온실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대가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목적이길 포기한다. 실존적 자아를 포기한 대가로 그는 절대 안녕의 계에서 평화(이것은 권태의 또 다른 이름이리라)를 누린다.  

2. 지혜(실존적인 신, 이를테면 무신론자들의 신): 성경에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 성경에서는 악마성으로 호도된 신의 존재.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추방된 세계를 관할하는 신. 방만한 자유와 무한한 고통으로 점철된 계(界). 그러나 이 계는 매순간 인간 존재의 주체적 결단을 강요한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그러나 한없이 고통스런 자유)를 부여한 세계. 이쪽의 관점에서 보면,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류 최초의 자기 각성이자 반항이며, 동시에 인간이 실존하기 위한 역사적 첫걸음이다. 

*  

1의 신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야말로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반면, 이 소설에서 창조된 2의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p.349) 

소설의 주인공인 민요섭은 그리스도교적 신에 회의를 느끼고 반대편의 또 다른 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지만 결국 원래의 신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다른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되는 민요섭의 복귀의 변이 인상적이다. “쓸쓸하고 두렵다는 거였소. 웃지 않고 성내지 않는 우리의 신,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꾸짖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 우리의 신- 그런 신에게 이제 지쳤다는 거요,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 판단에서 유리된 행위, 징벌 없는 악과 보상 없는 선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거였소. (...)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읽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p.366)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도 비극적이지만, 주인공들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민요섭이 2의 신에게서도 회의를 느꼈다면, 그는 1의 신으로 복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애당초 누구의 "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고아임을 천명함으로써 쓸쓸함과 두려움과 지친 마음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써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요섭의 다음 과제가 아니었을까. 절망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오로지 순수한 '절망'인 채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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