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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원론적인 신을 구상한다. 하나는 본래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이며 반대편의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신, 즉 실존적인 신이다. 이 책에서는 전자를 선(善)의 신이라고 하고 후자를 지혜의 신이라고 하는데, 이 두 신의 영역을 조악하게나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선(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일반적 의미의 신): 절대 진리로서의 정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천상의 세계를 관할하는 신. 이 계(界) 안에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절대 복종과 순응뿐이다. 이 무지하고 순수한 식물성의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온실 안에서 평화와 안정을 대가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목적이길 포기한다. 실존적 자아를 포기한 대가로 그는 절대 안녕의 계에서 평화(이것은 권태의 또 다른 이름이리라)를 누린다.
2. 지혜(실존적인 신, 이를테면 무신론자들의 신): 성경에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 성경에서는 악마성으로 호도된 신의 존재.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추방된 세계를 관할하는 신. 방만한 자유와 무한한 고통으로 점철된 계(界). 그러나 이 계는 매순간 인간 존재의 주체적 결단을 강요한다.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그러나 한없이 고통스런 자유)를 부여한 세계. 이쪽의 관점에서 보면,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류 최초의 자기 각성이자 반항이며, 동시에 인간이 실존하기 위한 역사적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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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신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야말로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반면, 이 소설에서 창조된 2의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너희에게 빼앗아서 우리에게 더할 아무것도 없으며, 너희를 낮추고서 우리를 높일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너희 고통 위에 우리 즐거움이 있을 리 없고, 너희 슬픔이 우리 기쁨이 될 리 없다.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비롯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p.349)
소설의 주인공인 민요섭은 그리스도교적 신에 회의를 느끼고 반대편의 또 다른 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지만 결국 원래의 신으로 복귀한다. 그런데 다른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되는 민요섭의 복귀의 변이 인상적이다. “쓸쓸하고 두렵다는 거였소. 웃지 않고 성내지 않는 우리의 신, 기뻐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으며, 꾸짖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 우리의 신- 그런 신에게 이제 지쳤다는 거요,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 판단에서 유리된 행위, 징벌 없는 악과 보상 없는 선도 마찬가지로 공허하다는 거였소. (...)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읽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p.366)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도 비극적이지만, 주인공들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민요섭이 2의 신에게서도 회의를 느꼈다면, 그는 1의 신으로 복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애당초 누구의 "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고아임을 천명함으로써 쓸쓸함과 두려움과 지친 마음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써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요섭의 다음 과제가 아니었을까. 절망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오로지 순수한 '절망'인 채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