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불만과 슬픔을 야기하는 모든 현상, 그 현상을 아우르는 어떤 본질적이고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 어쩌면 그 믿음이 내가 처음부터 상정한 진리가 아니었을까. 2005년도부터 갑자기 오락이 아닌 공부의 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책 중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종교나 사상서, 철학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철학 가르쳐 준다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현재의 내 처지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인 무언가를 향해 느리지만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겼던 이러한 여정이 사실은, 내가 처음부터 상정했던 진리(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가 근간이 되어 정당화된 하나의 실천 활동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확신했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의 존재, '진리가 있을 것이다'라는 내가 지어낸 그 진리란 결국, 나를 둘러싼 바로 이 상황, 나의 실천으로 이루어진 바로 이 환경, 내가 만들어낸 이 카르마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나의 인식 수준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믿음이었던 게 아닐까.

 

동원된 믿음과 그러한 믿음을 근간으로 한 일련의 실천들의 기저에서 나를 움직였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내 안의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쪽으로 흘러가게 유도했을까? 어떤, 욕구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열등감, 아류의식, 자기애 부족, 자기확신과 자기긍정의 부족, 부족한 자아 존중감을 보충하려는 욕심 등. 욕심은 사실상 '생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오리지날하게 존재하고 싶은, 내가 나로서 여실하게 존재하고 싶은 그런 욕망. 내 몫의 생에 대한 집착.

 

고통과 불만과 슬픔이 미친 불길처럼 치솟아 올라 문득 습관처럼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우아하게 일거에 종결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사신의 유혹으로 마음이 달뜨는 그런 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살고 싶은 욕망’에 과부하가 걸려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 아닐까.

 

살고 싶은 욕망은 곧 앎에 대한 욕망이기도 할 터, 그래서 나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더욱 더 알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남들보다 늘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대신에 나에게는 곰곰이 끈덕지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니, 이것을 내 장점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또 나는 깨우친 것을 금방 잊어버리기도 잘 하지만, 내게는 생각한 바를 글로 남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한편으로 니체에 따르면 그때그때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능력이라고 하니까 기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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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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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곡> 원전을 이탈리아 어로 낭송하면 어떻게 들릴까. 섬세하게 배열된 각운들이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활자로만 <신곡>을 음미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안타깝다. 비록<신곡>을 아직 읽어본 적 없고, 혹자는 제대로 완독하기에도 버거운 고전이라고 하지만, 설령 완독한다 해도 운율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반쪽 밖에 모르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외국시가 운율의 문제 뿐 아니라 원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낭독했을 때 참으로 멋스럽게 들린다"는 지옥편 제 1곡 첫 3행(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은 이렇게나 다양한 뉘앙스로 해석될 수가 있다.

(1)나 올바른 길 잃고, 인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수풀에 있었노라
(2)인생길 한가운데에,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3)칠십 길 사람 목숨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은 나는, 어느 어스름한 숲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였노라
(4)우리네 생명 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원전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로 <신곡> 자체만 읽게 되면, 시행이 도중에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뀐다 해도 그것이 의도하는 효과라든가 어감의 변화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다듀나 드렁큰타이거가 아무리 좋아도 투팍이나 에미넴은 도무지 넘사벽이더니 <신곡>도 마찬가지다.

2. 천국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단테는 “성광을 더없이 듬뿍 받는 하늘에서 무수한 것들을 보았으나” 그곳을 떠나 내려온 지금 “이를 이야기할 방도를 모르고 또한 그리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천국 묘사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천국은 인간 언어의 길을 실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끊어낼 뿐 아니라, 인간 지성이 포괄하는 힘과 범위를 넘어 기억에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빛으로 넘쳐난다.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의 세계인 천국을 예언적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천국편은 어려울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가 꿈꾸었던 천국의 모습을 가늠해 보면, 그곳은 결코 평화롭고 정적인 상태의 계가 아니라, "무수한 대학자들과의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자연과학, 천문학, 철학, 신학의 학문적 지식이 응축된 장"이다. 천국은 이렇게 “지적 환희의 공간”이면서 또한 “사랑이 작용하며 하계 사람들의 구령(救靈)을 소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환경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결코 피안의 관념적 세계로 여겨지지 않고, 현세에도 얼마든지 다른 버전(?)으로 치환되어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단테가 구상한 천국 역시 어찌보면 꽤 현실감 있는 청사진 같지 않은가.

3. 아래는 이 책에서 인용한 천국편 일부. 아무래도 <신곡>을 펼칠 엄두가 안 나서 '신곡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라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이런 멋진 구절을 읽고 있으려니까 원전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너무나 쉽사리 단정 지어
들판의 이삭이 채 여물기도 전에
어림으로 값을 매기는 사람이 되지 마라.
겨울에는 염려스럽기 그지없는 가시나무가,
후에 그 앙상한 가지에 장미꽃을
피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드넓은 창해를 쏜살같이 치달려
머나먼 뱃길을 건너간 배가
항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이 훔치는 것을, 다른 이가 봉헌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세인(世人)이여 신의 심판이
끝났다 여기지 마라, 있을 수 있는 일은
전자의 갱생 후자의 타락.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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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양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서상복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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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무렵 분석철학을 정초했던 사람이 쓴 책이니 정말 오래된 책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한철하 번역으로 95년도에 대한교과서에서 나온 것인데, 알라딘 도서목록에 없어서 최근에 나온 근사한 책으로 아무 거나 올린다.) 실제로 오늘날 탈근대 철학의 아버지 뻘 되는 철학가들이 이 책에서는 당당히 현대철학자로 분류되어 있고,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선구자로 부각된 니체 역시 아직 비합리주의적 파시즘의 원류로 등장한다. 저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개정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물론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대전 시기 자유진영 철학자가 당대를 바라보던 관점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다.  

러셀은 현대에 와서 방만해진 무정부주의적인 경향들이 급기야 고삐 풀린 낭만주의로 치달아서 그에 반하는 여러 가지 반동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근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타자의 통제 기능이 더욱 더 세련되고 은밀하고 정교하게 진화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가 극에 달했다고 하는 이런 대목은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중간적 타협 철학으로 나온 게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그 한계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유주의 사상’이고, 이보다 더 철저한 반동은 신에게 부여했던 지위를 국가에 대해 부여하는 ‘국가 숭배 사상’(파시즘)이라고. ‘공산주의’는 이와는 상관없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 숭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와 대단히 유사한 사회가 된다.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은 냉전 시대에 숨을 거둔 20세기 철학자 러셀이 서양철학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식이 된다. 즉, 러셀은 기원 전 600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긴 발전을 통해 철학자들이 두 부류로 분류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합을 강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합을 완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간성에서 비합리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하며, 과학을 적대시하고, 교의체계를 제창하고, 영웅적 행위를 중시하는 규율주의자들이다. 후자, 즉 자유론자들은 극단의 무정부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과학적이며, 공리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격정을 반대하고, 심오한 종교들과 적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에서 이진경이 주체의 구축과 해체를 키워드로 하여 서양철학사를 맥락화했던 데 비해 러셀의 이런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신식이고 무엇이 구식인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철학사가 전혀 다른 키워드와 잣대로 새롭게 맥락화 될 수 있다는 점이리라. '맥락화'란 어디까지나 의미 부여의 문제이고 해석하기 나름의 문제이므로, 고정불변의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에 별처럼 빛나고 있는 위대한 철학가와 철학가를 연결하여 거대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란, 모든 창조적인 작업이 그러하듯 언제나 설레고 떨리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렇게 별자리를 연결해나가는 일은 최신의 담론으로 논의되는 당대의 작업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사를 공부하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평생의 작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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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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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통해 접하게 되는 여성주의는-비록 이들이 여성주의의 이념을 생활 속에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체현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여성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적소수자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치열하게 고민과 모색을 거듭해온 여성주의가 오늘날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된 전방의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여성주의 집단 내부에 유독 넘쳐나는 레즈비언들을 보면서, 이론상의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성적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닐 수밖에 없는 여성주의가 자기 내부에 자체적으로 (마치 자기 실험처럼) 성적소수자들을 적극적으로 양산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의지의 과잉'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것 같은 이러한 반동적인 현상 역시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젠더 구분 못지 않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대체 내가 지금 의식하고 있는 '부자연'과 '자연'의 기준이란 건 또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되고.

여성주의 모임의 기현상을 목도하며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역시 섹슈얼리티라는 게 사회화 과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구성되고 규정되는 게 맞긴 맞는 거 같다는 경험적 진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여성주의 그룹 안에서 관찰되는 이 특이적인 성적소수자 과잉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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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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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갖고 미술사를 들여다 볼수록 점점 더 시선이 머물게 되는 쪽은 전성기 작품이 아니라 전성기 바로 전이나 후의 작품인 것 같다. 처음에는 대표적인 시기의 '잘 된 그림'이 먼저 눈에 띄지만, 나중에는 '잘 되려다 만 그림'을 더 살펴보게 된다. 잘 되려다 만 그림이란, 한 시대의 절대적 양식에 도달해 가는 그림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러한 양식으로부터 탈출해 나가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들은 뭔가 야릇하고 조마조마하다. 묘한 긴장감이 있고, 그래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르네상스 역시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도 매너리즘 사조의 작품들이 더 매력적으로 와닿는다. 마치 문고리를 쥐고 문턱에 엉거주춤 서 있는 듯한 그런 그림들에게서는 애매한 위치에서 비롯하는 망설임과 혼란, 회의와 고민이 묻어난다. 어쩌면 과감하고도 이상한 시도에 대해 화가 스스로 느꼈을 법한 해방과 자유의 쾌감도 가늠해 보게 된다. (물론 이 사조가 정치 및 종교적으로 심각한 혼돈에 빠져있던 당시 이탈리아의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도 결코 간과할 순 없겠지만)

매너리즘에 관해 이 책에서는 ‘형태의 높이기와 고갈의 역학으로 보면, 바로크 예술은 어떤 면에서는 매너리즘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기의 카라치도 여전히 매너리즘에 속해 있는 화가라고. 또 한편으로는 카라바조의 그림 <청년기의 바쿠스>에서 바쿠스의 불그뎅뎅한 얼굴에 드리워진 '도발적인 저속함'에서 매너리즘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고.

매너리즘 특유의 지나친 각색이나 어색한 시도가 훗날 바로크 회화의 역동적인 표현을 예비하는 의미 있는 사전 작업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시기를 단지 이행기로만 보는 것은 어쩐지 아쉽다. 독자적인 고유성 때문이다. 매너리즘 시기는 그야말로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으로 충만해 있다. 마치 이 즈음의 미술가들은 균형과 조화, 화합과 완벽함 따위의 아폴론적인 미에 질릴 대로 질린 나머지 일부러 위악을 부리고 반항을 하면서 지난한 모색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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