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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 <신곡> 원전을 이탈리아 어로 낭송하면 어떻게 들릴까. 섬세하게 배열된 각운들이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활자로만 <신곡>을 음미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안타깝다. 비록<신곡>을 아직 읽어본 적 없고, 혹자는 제대로 완독하기에도 버거운 고전이라고 하지만, 설령 완독한다 해도 운율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반쪽 밖에 모르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외국시가 운율의 문제 뿐 아니라 원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낭독했을 때 참으로 멋스럽게 들린다"는 지옥편 제 1곡 첫 3행(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은 이렇게나 다양한 뉘앙스로 해석될 수가 있다.
(1)나 올바른 길 잃고, 인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수풀에 있었노라
(2)인생길 한가운데에,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다
(3)칠십 길 사람 목숨 반 고비에, 올바른 길 잃은 나는, 어느 어스름한 숲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였노라
(4)우리네 생명 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원전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로 <신곡> 자체만 읽게 되면, 시행이 도중에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뀐다 해도 그것이 의도하는 효과라든가 어감의 변화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다듀나 드렁큰타이거가 아무리 좋아도 투팍이나 에미넴은 도무지 넘사벽이더니 <신곡>도 마찬가지다.
2. 천국편을 시작하기에 앞서 단테는 “성광을 더없이 듬뿍 받는 하늘에서 무수한 것들을 보았으나” 그곳을 떠나 내려온 지금 “이를 이야기할 방도를 모르고 또한 그리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천국 묘사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천국은 인간 언어의 길을 실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끊어낼 뿐 아니라, 인간 지성이 포괄하는 힘과 범위를 넘어 기억에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빛으로 넘쳐난다.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의 세계인 천국을 예언적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천국편은 어려울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가 꿈꾸었던 천국의 모습을 가늠해 보면, 그곳은 결코 평화롭고 정적인 상태의 계가 아니라, "무수한 대학자들과의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자연과학, 천문학, 철학, 신학의 학문적 지식이 응축된 장"이다. 천국은 이렇게 “지적 환희의 공간”이면서 또한 “사랑이 작용하며 하계 사람들의 구령(救靈)을 소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단테가 상상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환경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서 결코 피안의 관념적 세계로 여겨지지 않고, 현세에도 얼마든지 다른 버전(?)으로 치환되어 존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단테가 구상한 천국 역시 어찌보면 꽤 현실감 있는 청사진 같지 않은가.
3. 아래는 이 책에서 인용한 천국편 일부. 아무래도 <신곡>을 펼칠 엄두가 안 나서 '신곡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라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이런 멋진 구절을 읽고 있으려니까 원전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너무나 쉽사리 단정 지어
들판의 이삭이 채 여물기도 전에
어림으로 값을 매기는 사람이 되지 마라.
겨울에는 염려스럽기 그지없는 가시나무가,
후에 그 앙상한 가지에 장미꽃을
피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드넓은 창해를 쏜살같이 치달려
머나먼 뱃길을 건너간 배가
항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한 사람이 훔치는 것을, 다른 이가 봉헌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세인(世人)이여 신의 심판이
끝났다 여기지 마라, 있을 수 있는 일은
전자의 갱생 후자의 타락. (p.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