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댄서들의 수명은 짧다. 5년 전에 플로어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 중에 지금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1%도 안 될 거다. 인체 장기조직의 세포재생주기가 6개월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담 춤판의 재생 주기는 대략 2년 정도 되는 것 같다. 그 정도를 주기로 해서 구성원의 대부분이 매번 새롭게 바뀐다. 그래서 춤판에서는 얇고 넓은 인간 관계는 쉬운 반면 깊은 사귐은 무척 어렵다. 춤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들과의 헤어짐에 대해서도 쿨해지게 된다. 좋게 말하면 의연해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정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춤판에 오래도록 눌러앉은 소수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고수급들이다. 춤판의 생리를 꿰고 있는 그들은, 그 생리에 어떻게 편승해야 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부단히 강좌를 열어 춤판 인구를 증식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하나 둘 사라질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은 오로지 윤기나는 플로어와 흐르는 음악, 에너지와 열기다. 춤판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정작 사람 외의 것들만이 유구하다는 사실이 가끔은 진정으로 경이롭게 느껴진다. 온갖 소문과 스캔들로 무성한 사교계의 찬란한 덧없음을 상대적으로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

 

춤판에 발을 디딘지는 5년이 지났지만 춤을 끊었다고 할 수도 없고 여전히 춘다고 할 수도 없는 미지근한 상태로 지낸 시절이 춤인생의 대부분이었던 나는 당연히 아직도 고수가 되지 못했다. 하수는 아닌 것 같지만, 고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수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째 늘지 않는 실력으로, 패턴이 가물거릴 때 쯤 되어서야 간간이 춤추러 가는, 그러나 결코 춤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는, 하수도 중수도 고수도 아닌 내 처지는 뭘까. 어쩌면 춤판에서의 나는 이미 개체로서의 수명이 다해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몸인데, 미련 때문에 아직도 유령처럼 플로어를 떠돌고 있는 신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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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악이 듣고 싶음 들어, 싫음 꺼! 이것은 다이나믹듀오 랩 가사 가운데 한 토막이다. 악의처럼 드러나는 오만한 선이 있다. 이것은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한 말이다. 이 모든 말들이 나에게는 한없이 야만적으로 느껴진다. 야만! 그 황홀한 말! 생각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 말! 생명 가진 것으로 태어나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려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딱한 일이 또 있을까. 한없이 야만적이고 싶다. 잔혹하고 싶다. 무자비하고 싶다. 거침없고 싶다. 발산하고 싶다. 당위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 쾌락을 좇아 그것을 당위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고 싶다. 잔인하고 섬뜩하고 호쾌한 야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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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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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도에 출간된 책으로, 이후 발간된 월러스틴의 저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초고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저자가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의 큰 뼈대는 이미 이 책에서도 확고하게 드러나고 있다. 1부는 크게 네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1)역사적 자본주의 경제체계에 대한 분석 (2)경제체계와 상보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체계로서의 국가간체계(더불어 반체제 운동에 대한 서술- 반체제 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성과 및 의의) (3)국가간 체계와 자본주의 경제체계가 상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근대체계를 뒷받침하는 이율배반적인 문화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와 보편주의 (4)근대체계를 지탱하는 도덕적 세계관 혹은 정신적 사조로서의 계몽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진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숭배, 역사적 진보주의 등등에 대한 비판. 즉 그런 것들이 사실은 근대적 체계를 지탱하는 판타지라는 얘기.

2부에서는 자본주의 문명의 득실 분석과 앞으로의 세계체계에 대해 전망하고 있다. 대부분은 이 책 1부, 그리고 먼저 읽었던 월러스틴의 다른 저작들과 겹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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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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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이라는 말이 좋아서 자꾸만 되뇌어 보게 된다. 성냥팔이 소녀가 어둠 속에서 성냥을 켜듯이 자꾸만 자꾸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가만히 좋아하는 것들로 마음이 온통 환해지고 나는 그동안만큼은 따뜻해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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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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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에 해당하는 일본역사의 반복 문제나 일본 문학 비평은 거의 못 읽었다. 역자는 이 부분 안 읽으면 반쪽만 이해하는 거라고 했지만 나로서는 일본 역사를 잘 모르니 어렵고 재미도 없는 거 같다. 다만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앞부분인데,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근대국가체제를 표상시스템(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징계?)으로 보고 각각의 영역에서 화폐와 왕을 시스템의 구멍(존재의 무無, 실재계적 순간, 의식으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이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실재의 한 조각)으로 상정하는 점이나, 월러스틴의 체계 순환의 역사에서 자본과 국가의 반복강박(억압된 것의 회귀)을 읽어내는 부분은 고진의 독창적인 관점인 것 같다.

이 책에서 고진은 경제와 정치 두 방면의 역사에서 각각 결핍(구멍)을 메우기 위한 신경증적 증상으로 공황과 보나파르티슴이 반복강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이미 맑스가 이를 포착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맑스의 저작 <자본론>과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을 각각 자본과 국가의 반복강박에 대한 분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계가 프로이트와 맑스를 만나면 무려 이런 얘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세계체계가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나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반복강박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고진의 말은 범상치 않게 들린다. 반복강박은 죽음충동의 표현이다. 생명충동이 근본적으로 통합과 더 큰 전체를 향해 움직여가는 어떤 구성적 힘이라면, 죽음충동은 그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해체구성적 추동력이다. 죽음충동은 심리학적으로는 긴장을 증가시키지만(반복강박), 생물학적으로는 긴장을 감소시킨다(이화작용).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근대세계체계는 구조적 갈등과 긴장이 심화됨으로써 불쾌가 고조되어가는 체계이면서 동시에 유기체적으로는 점차 해체의 과정을 밟아나가는 체계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음충동의 생물학적 최종단계는 그동안의 갈등과 긴장이 풀리고 휴식과 영면이 찾아오는 '열반' 상태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근대세계체계에 있어서는 바로 이 지점이 보드리야르가 말한 내파가 일어나는 지점이자 월러스틴이 전망하는 체계의 종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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