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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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의 원서를 직접 읽는 것은 물론 몹시 지난한 일일 것이나,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들의 사상을 각각 한 문장으로 재미나게 요약하고 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구어체로 쉽고 평이하게 쓰여진 입문서이지만 곱씹어볼만한 대목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저자는 니체가 '초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노예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항상 바꾸어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니체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바꿔치기'가 사고의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꼬집는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말을 바꾸게 되면, 결국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고양시킬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혐오를 불러일으켜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존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착적인 결론이 유도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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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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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자주 자연과학으로부터 사례를 빌려왔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차용이 단순한 설명적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고 낮잡아 말했다지만, 이 책에서 지젝이 욕망의 작동방식을 양자물리학과 상대성 이론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목(요는 이렇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마치 물질이 원인이고 그 결과로서 물질의 주위로 공간이 휘어진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 여기는 것은 공간의 휘어진 효과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욕망의 기저에는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낯선 괴물 같은 무언가가 있는 거 같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걸 실재라고 부르지만, 사실 실재라는 건 상징계의 균열과 빈틈이 만들어낸 효과에 다름 아니다.)을 읽다보면, 자연과학의 이론이 그저 '단순한 설명적 도구'에 불과하지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어떤 신비한 예감이 생긴다. 어쩌면 정신분석과 현대물리학 사이에는 단순한 유비 관계 이상의, 우리가 모르는 어떤 우주적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가장 깊고 내밀한 영역에 자리잡은 욕망의 활동과 광대무변한 우주적 현상 사이에 이런 유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말이다.

 

지적 엄밀성에 대한 자기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일반 독자의 특권을 남용하여 상상력을 좀 더 제멋대로 발휘해 보자면, 원인으로서의 대상a, 즉 결핍에 대해 민감한 사람일수록, 행성으로 치자면 질량이 무거운 행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거운 행성일수록 주위의 공간을 많이 휘어지게 하고, 왜곡된 실재를 만들어내고, 운석이라든지 먼지라든지 하는 주위의 것들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리비도가 강한 사람 역시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휘어지게 만들고(불가에서는 흔히 아상我相, 즉 '나'라고 하는 실체에 대한 고집과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만들어낸 왜곡된 세계의 허상 속에서 번뇌하게 된다고 얘기하지 않던가), 주위의 것들을 강하게 빨아들여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시킨다. 그는 부가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지식이 되었든 주변의 것들을 강하게 끌어당겨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집결시킨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물질'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그만큼 '존재하려는 경향성, 발생하려는 경향성'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한편, 리비도가 강한 사람의 극단은 블랙홀에 빗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는 엄청나게 허기진, 내면은 온통 허무로 가득한 괴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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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기치도 않게 열정적 사랑을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응답보다 앞서 일어나는 것은 외설적이고 난폭한 어떤 것이 침입했다는 느낌이다.

(...)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에서 우리는 라캉이 '정초적 말(founding word)'로 의미한 것, 즉 한 사람에게 어떤 상징적 타이틀[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을 부여하고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함으로써 그, 그녀를 공언된 존재로 만들어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내 주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를 대할 의무를 스스로 지며,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p.71~73, <HOW TO READ 라캉>,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中에서 

사랑을 고백한 자는 초조할까? 아니, 오히려 그는 선제공격을 가한 자로서 여유롭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그동안 암묵적으로 합의되어온 상대와의 심리적 안전거리를 기습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간에 허락없이 침입하여 상대를 함부로 새롭게 명명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장악한다. <HOW TO READ 라캉>(슬라보예 지젝, 웅진 지식하우스, 2005)에서는 이러한 도발 행위를 일컬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의 폭력성'이라고 적고 있다.  

사랑을 고백한 자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처신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수락하면 그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그는 불운한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피해자가 되어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받을 수도 있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그는 용기있고 선량한 인간으로 남는다.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은 오히려 고백을 당한 쪽이다. 고백을 당한 자는 고백한 자의 욕망에 의해 일방적으로 호명과 응답의 게임에 끌려나와 수락 혹은 거절이라는 제한된 선택지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떤 것도 그에게는 유리하지 않다. 수락할 경우 그것은 상대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거절할 경우 그는 가해자가 되어 원치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순종하거나 아니면 해를 입히거나.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한이다. 

고백을 당한 자가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이 게임에서 손을 떼는 최선의 방법은, 고백이 이루어진 상황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고백을 받지 않은 듯이 행동함으로써 고백 당한 자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올가미는 이미 던져졌으므로 이 모든 사후적 책략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게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언제나 사랑을 고백한 자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명명자가 되고 권력자가 된다. 지더라도 이기는 게임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요는 이것이다. 고백을 당하지 말고, 고백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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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내가 보기엔, 이 시가 비극인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사실 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간절하게도 너무나 간절하게도) 무엇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호명'되는 그 무엇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는 '호명'되기 위해 딱히 꽃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치 도마뱀이 자신의 꼬리를 자르듯 스스로 떼어내 은폐시킨다. 그리고 그는 호명되기 위해 스스로를 꽃으로서 연기한다.  

그는 꽃이라는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꽃이 되지만, 억압된 것들은 언제나 반드시 돌아온다는 명제에 따라, 그는 조만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가증스런 연기에 넌더리가 날 것이다. 밤마다 자신이 떼어낸 꼬리의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그는 꽃이 되어버리고 만 자신의 현재를 자조하고 증오하며 꽃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불온한 상상(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이전에 포기했던 꼬리를 되찾는 상상)으로 밤마다 미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또 다른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간절히 욕망하면 할수록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최대의 난관이자 비극이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거세를 감행하면서까지 타인에게 종속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은 의미는 항상 불완전하며, 게다가 우리는 이 불완전한 의미들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조차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구일 뿐. 신이 우리에게 던진 이 가혹한 블랙유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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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제브는 이 시대의 문화적 풍조를 ‘동물화’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 즉 자연과의 투쟁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소비사회의 개체들은 투쟁도 없고 부정도 없이 그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그야말로 ‘동물화’된 인간 유형이라는 것이다. 코제브가 동물화와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스노비즘’이다. 스노비즘이란 형식화된 가치를 고수하는 행동 양식으로, 스노비즘적 주체는 어떠한 형식이 공허한 거짓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마치 거기에 무슨 진정한 내용이 담겨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다. 겉으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 이면에서 그들은 좀 더 실질적이고 유용하고 의미있는 다른 일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연애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든가, 곡비(장례식 때 울어주는 여자)를 고용해서 대신 울게 하고 뒷방에서 유산문제를 처리하는 유가족들을 우리는 스노비즘적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의 시대와 유사한 지점이 미술사적으로 매너리즘의 시대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미술이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는 사이에 일시적으로 출현했던 미술 양식으로, 지나친 각색과 변형, 과장된 기교, 부자연스럽다 못해 가식에 가까운 표현, 인위적인 연출 속에서 나타나는 신경질적인 긴장과 두려움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각 부분의 상호적 연결, 공간구조의 일관된 논리성, 균형과 비례, 조화와 통일 면에 있어서는 가히 완벽했던 르네상스 미술 이후에 등장한 매너리즘 사조는, 르네상스의 아폴론적 아름다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질릴 대로 질려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듯이 온갖 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공간의 통일성을 해체하거나, 색채를 거칠게 다루어 마치 그리다 만 것처럼 해놓거나, 비정상적으로 늘어지고 뒤틀린 인체 형상을 만들어 내거나 하는 식이다.

매너리즘 시기의 미술은 흔히 과도기적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및 그로 인한 내면적 괴리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은 완벽에 가까운 르네상스 미술을 세심하게 모방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고전적 가치를 고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르네상스가 보여주는 지나친 완벽함에 염증과 답답함을 느끼면서, 좀 더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고 활기차고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표현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만한 적절한 미적 형식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보다 자유롭고픈 막연한 욕망을 기존의 형식에 기형적으로 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울릴 만한 형식을 아직 고안해 내지 못해서 새로운 내용을 어쩔 수 없이 기존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런 상태는 앞서 코제브가 언급한 스노비즘적 주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연애하러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직 적절한 사교장이라는 형식을 찾지 못했고, 유가족들은 유산문제를 처리하기 편리한 획기적인 장례 형식을 아직 고안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외적인 형식과 실질적인 내용의 불일치는 결국, 기도하며 연애상대 물색하기라든가 곡비 고용하기라는, 매너리즘 미술처럼 기묘하게 보이는 타협안을 낳게 된다. 이것은 미적으로 기묘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불편한 방식이기도 하다. 새로운 형식은 주체가 이러한 불편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내용은 명분(기존의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형식을 착용하게 될 것이다.

어느 방면의 역사에나 처음에는 참신하고 획기적이었던 제도나 양식이 차츰 과도해져서 이윽고 부자연스런 국면에 처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 시기가 이후의 어떤 극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전단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도가 너무나 지나쳐 차라리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미적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매너리즘은 90년대 국내에서 유행했던 화장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90년대의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위적이던 화장술은 이천 년대에 들어서 쌩얼의 대유행과 함께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는 화장술로 전격 교체되었다. ‘입체화장’에서 ‘투명화장’으로의 변화는, 매너리즘 시기의 미술이 바로크 미술로 넘어갈 때만큼이나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세계체제의 절정기를 수놓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자본주의 문화 역시 어쩌면, 월러스틴이 전망하는 미지의 세계 체제의 새로운 정신문화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적 스타일은 아닐까. 물리학의 운동법칙을 떠올려 보면 극적인 반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관성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 최고조의 상태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고무공이라면 방향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제대로 바닥을 쳐야 하는 것이다. 정점으로서의 데카당스를 겪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월러스틴이 말하는 앞으로의 이행기적 세계가 지금보다 더욱 더 기이한 '동물화'의 경향을 띨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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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1-01-31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비즘적 주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주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의미 없는 형식 자체가 오히려 현실과 욕망 사이의 합리적인 타협과 적절한 균형이라는 새로운 의미(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거니까 스노비즘적 주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왠지 자책하시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