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제브는 이 시대의 문화적 풍조를 ‘동물화’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 즉 자연과의 투쟁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 소비사회의 개체들은 투쟁도 없고 부정도 없이 그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그야말로 ‘동물화’된 인간 유형이라는 것이다. 코제브가 동물화와 더불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스노비즘’이다. 스노비즘이란 형식화된 가치를 고수하는 행동 양식으로, 스노비즘적 주체는 어떠한 형식이 공허한 거짓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마치 거기에 무슨 진정한 내용이 담겨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무의미한 행동이 아니다. 겉으로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 이면에서 그들은 좀 더 실질적이고 유용하고 의미있는 다른 일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연애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든가, 곡비(장례식 때 울어주는 여자)를 고용해서 대신 울게 하고 뒷방에서 유산문제를 처리하는 유가족들을 우리는 스노비즘적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늘날의 시대와 유사한 지점이 미술사적으로 매너리즘의 시대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미술이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는 사이에 일시적으로 출현했던 미술 양식으로, 지나친 각색과 변형, 과장된 기교, 부자연스럽다 못해 가식에 가까운 표현, 인위적인 연출 속에서 나타나는 신경질적인 긴장과 두려움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각 부분의 상호적 연결, 공간구조의 일관된 논리성, 균형과 비례, 조화와 통일 면에 있어서는 가히 완벽했던 르네상스 미술 이후에 등장한 매너리즘 사조는, 르네상스의 아폴론적 아름다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질릴 대로 질려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듯이 온갖 괴상하고 그로테스크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공간의 통일성을 해체하거나, 색채를 거칠게 다루어 마치 그리다 만 것처럼 해놓거나, 비정상적으로 늘어지고 뒤틀린 인체 형상을 만들어 내거나 하는 식이다.
매너리즘 시기의 미술은 흔히 과도기적 단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및 그로 인한 내면적 괴리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매너리즘 시대의 화가들은 완벽에 가까운 르네상스 미술을 세심하게 모방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고전적 가치를 고수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르네상스가 보여주는 지나친 완벽함에 염증과 답답함을 느끼면서, 좀 더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고 활기차고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표현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만한 적절한 미적 형식을 발견해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보다 자유롭고픈 막연한 욕망을 기존의 형식에 기형적으로 투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울릴 만한 형식을 아직 고안해 내지 못해서 새로운 내용을 어쩔 수 없이 기존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런 상태는 앞서 코제브가 언급한 스노비즘적 주체의 모습이기도 하다. 연애하러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직 적절한 사교장이라는 형식을 찾지 못했고, 유가족들은 유산문제를 처리하기 편리한 획기적인 장례 형식을 아직 고안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외적인 형식과 실질적인 내용의 불일치는 결국, 기도하며 연애상대 물색하기라든가 곡비 고용하기라는, 매너리즘 미술처럼 기묘하게 보이는 타협안을 낳게 된다. 이것은 미적으로 기묘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불편한 방식이기도 하다. 새로운 형식은 주체가 이러한 불편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내용은 명분(기존의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형식을 착용하게 될 것이다.
어느 방면의 역사에나 처음에는 참신하고 획기적이었던 제도나 양식이 차츰 과도해져서 이윽고 부자연스런 국면에 처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이 시기가 이후의 어떤 극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전단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정도가 너무나 지나쳐 차라리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미적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매너리즘은 90년대 국내에서 유행했던 화장 스타일과도 일치한다. 90년대의 지나치게 과장되고 인위적이던 화장술은 이천 년대에 들어서 쌩얼의 대유행과 함께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는 화장술로 전격 교체되었다. ‘입체화장’에서 ‘투명화장’으로의 변화는, 매너리즘 시기의 미술이 바로크 미술로 넘어갈 때만큼이나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세계체제의 절정기를 수놓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자본주의 문화 역시 어쩌면, 월러스틴이 전망하는 미지의 세계 체제의 새로운 정신문화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적 스타일은 아닐까. 물리학의 운동법칙을 떠올려 보면 극적인 반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관성의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 최고조의 상태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고무공이라면 방향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제대로 바닥을 쳐야 하는 것이다. 정점으로서의 데카당스를 겪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월러스틴이 말하는 앞으로의 이행기적 세계가 지금보다 더욱 더 기이한 '동물화'의 경향을 띨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