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내가 보기엔, 이 시가 비극인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사실 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간절하게도 너무나 간절하게도) 무엇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호명'되는 그 무엇이 되고 싶다. 그래서 그는 '호명'되기 위해 딱히 꽃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적절한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마치 도마뱀이 자신의 꼬리를 자르듯 스스로 떼어내 은폐시킨다. 그리고 그는 호명되기 위해 스스로를 꽃으로서 연기한다.  

그는 꽃이라는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비로소 꽃이 되지만, 억압된 것들은 언제나 반드시 돌아온다는 명제에 따라, 그는 조만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가증스런 연기에 넌더리가 날 것이다. 밤마다 자신이 떼어낸 꼬리의 악몽에 시달릴 것이다. 그는 꽃이 되어버리고 만 자신의 현재를 자조하고 증오하며 꽃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불온한 상상(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이전에 포기했던 꼬리를 되찾는 상상)으로 밤마다 미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무엇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또 다른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타인의 욕망을 간절히 욕망하면 할수록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에게 닥친 최대의 난관이자 비극이다.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거세를 감행하면서까지 타인에게 종속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얻은 의미는 항상 불완전하며, 게다가 우리는 이 불완전한 의미들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조차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구일 뿐. 신이 우리에게 던진 이 가혹한 블랙유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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