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지극히 폭력적이고 외상적인 사건이다. (...) 사랑에 대한 라캉의 정의("사랑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주는 것이다")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라는 말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예기치도 않게 열정적 사랑을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인 경험에서 확인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반응으로, 가능한 긍정적인 응답보다 앞서 일어나는 것은 외설적이고 난폭한 어떤 것이 침입했다는 느낌이다.
(...) 사물로서의 타자가 지닌 이 심연에서 우리는 라캉이 '정초적 말(founding word)'로 의미한 것, 즉 한 사람에게 어떤 상징적 타이틀[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을 부여하고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함으로써 그, 그녀를 공언된 존재로 만들어주는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내가 누군가에게 "당신은 내 주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를 대할 의무를 스스로 지며, 마찬가지로 그에게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p.71~73, <HOW TO READ 라캉>,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中에서
사랑을 고백한 자는 초조할까? 아니, 오히려 그는 선제공격을 가한 자로서 여유롭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그동안 암묵적으로 합의되어온 상대와의 심리적 안전거리를 기습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간에 허락없이 침입하여 상대를 함부로 새롭게 명명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일방적으로 장악한다. <HOW TO READ 라캉>(슬라보예 지젝, 웅진 지식하우스, 2005)에서는 이러한 도발 행위를 일컬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의 폭력성'이라고 적고 있다.
사랑을 고백한 자는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처신할 수 있다. 만약 상대가 수락하면 그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그는 불운한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피해자가 되어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받을 수도 있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그는 용기있고 선량한 인간으로 남는다.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것은 오히려 고백을 당한 쪽이다. 고백을 당한 자는 고백한 자의 욕망에 의해 일방적으로 호명과 응답의 게임에 끌려나와 수락 혹은 거절이라는 제한된 선택지를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떤 것도 그에게는 유리하지 않다. 수락할 경우 그것은 상대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결과에 지나지 않으며, 거절할 경우 그는 가해자가 되어 원치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순종하거나 아니면 해를 입히거나.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한이다.
고백을 당한 자가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이 게임에서 손을 떼는 최선의 방법은, 고백이 이루어진 상황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고백을 받지 않은 듯이 행동함으로써 고백 당한 자로서의 지위와 권한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올가미는 이미 던져졌으므로 이 모든 사후적 책략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결국, 이 게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언제나 사랑을 고백한 자다. 그는 고백을 함으로써 명명자가 되고 권력자가 된다. 지더라도 이기는 게임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요는 이것이다. 고백을 당하지 말고, 고백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