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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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입문자를 화나게 만드는 입문서. 차라리 그림이라도 예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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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 개정판
존 러스킨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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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러스킨은 ‘애정’이 “평범한 경제학자의 계산을 모조리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힘”(61)인 동시에 인간의 경제활동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얘기한다. 또한 그는 “경제의 궤도를 혼란시키는 불온한 힘이 아니라 일관된 지배력”(41)으로서 정직에 대해 강조하기도 한다. 러스킨에게 정직이란 부의 획득을 위한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 조건이기도 했다. 애정과 정의에 대한 러스킨의 이러한 생각은 연민과 애정으로서의 ‘인’과 도덕과 정의로서의 ‘의’를 강조했던 맹자의 인의사상과도 퍽 닮아있다.

이 책 곳곳에서 러스킨은 확실히 이상주의적인 유교 사상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군인의 직업이 국민을 수호하는 것이고 목사의 직업이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며 (...) 상인의 직분이 국민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것”(77)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 ‘인’을 강조한 공자가 떠오르며, “한 개인의 손에 있는 부가 다수의 사람에게 미치는 지배력을 줄이고, 사람들의 연쇄를 통하여 그 힘을 널리 분배”(135)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상업을 엄격히 제한하여 과도한 독점자본의 형성을 막았던 유교식 산업정책이 연상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는 상호부조와 호혜 경제에 기반을 둔, 정치적으로는 왕도정치가 행해지는 유교적 이상에 근접한 사회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러스킨은 아나키스트 계열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기며 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점은 “정부와 협력은 모든 사물에서 생명의 법칙이고, 무정부와 경쟁은 죽음의 법칙이다”(144)라는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러스킨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사이를 단순히 그리고 일방적으로 적대관계로 환원해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서 <자기 생각을 특정한 일에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불쾌한 감정>을 노동의 개념 속에 포함시킨”(130) 존 스튜어트 밀의 견해에도 확고하게 반대 입장을 취한다. 러스킨은 노동에 대한 밀의 정의에서 왜 ‘불쾌한 감정’은 포함되고 ‘유쾌한 감정’은 포함되지 않았는지 물으면서, 노동을 방해하는 감정이 노동을 촉진하는 감정보다 더 본질적으로 노동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이어서 그는 불쾌한 감정에 의한 노동의 경우 노동자는 단순히 배상을 받을 뿐이지만, 유쾌한 감정에 의한 노동의 경우에 노동자는 일의 교환가치 가운데 일부를 생산하는 동시에 가치의 실제 분량도 현저히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유쾌한 감정이란 러스킨의 맥락에 따르면 사회적 애정에서 기인하는 것이겠다. 그가 유교 사상가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이라면 이렇게 애정을 대단히 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하나의 동력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동력으로서의 애정이란, 뒤집어 얘기하면 애정이 곧 비-경제적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착취가 가능한 잉여 자원이라는 얘기가 아닐까. 노동자가 ‘유쾌한 감정’을 발휘하여 이루어낸 가치의 현저한 증가분은 어디까지나 결국 맑스가 말한 상대이윤으로 환원되어버리고 마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애정’은 확실히 경제학의 변칙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선 러스킨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변칙적이다. 이 시대의 애정이란, 체제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거나(ex. 공동체적 애정과 유대를 기반으로 한 호혜경제가 시장경제의 모순을 완화시켜주는 버퍼로 기능하고 있는 개도국의 경제 메커니즘) 작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활용 또는 착취하는 체제 외부적 요소로서,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분하게 강요되고 있는 정서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그 어떤 지난날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상냥하지 않은가. 고객님을 향한 사랑이 이토록 뜨거웠던 시절이 또 있었나. 애정 표현이 나날이 격렬해지는데도 왜 고객님은 성질이 점점 더 사나워지고 우리는 갈수록 피곤할까. 어쩌면 우리는 경제학에서 애정의 문제를 사고할 것이 아니라, 변칙적인 요소인 애정마저 경제학의 빈틈을 메우는데 소용되고 있는 체제 자체의 문제를 사고해야 하지 않을까. 그 편이 좀 더 '정직'하고 도의적인 고민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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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연인사이 - No Strings Attach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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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사랑에 단단히 빠져 사리판단에 장애를 겪고 있는 일당들(동생과 그의 여친)에게 또 다시 집을 비워주기로 약속하였으나 정작 퇴근하고 나니 불쌍하게도 마땅히 갈 곳이 없고 날은 또 왜 이리 추운지 약속한 시간까지는 어디라도 은신할 곳이 필요한데 그때 문득 영화관에나 가볼까 싶었던 것은 며칠 전에 이 영화를 보고 온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으로 그러니까 뭐라더라 나한테 들려주고 싶은 대사가 나오더라나 뭐라나. 그래서 구천 원이나 내고 영화관에 들어갔던 것인데 웬걸 절반쯤 보고 나서 그냥 스르륵 기어나와 버렸다. 이 영화의 결말을 나는 영원히 모를 테지만 주인공들의 미래는 전혀 염려할 수준이 아니었고 그래서 별 미련은 없다. 사실

할 수 있는 걸 지켜보는 건 좀 지루한 일이다. 운동을 지켜보거나 1박2일을 지켜보거나 무한도전을 지켜보거나 영화관에 앉아 남의 연애를 지켜보거나 등등. 운동이나 도전이나 여행이나 사랑 같은 것들은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느니보다는 차라리 직접 뛰어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니 이왕이면 앞으로는 사람을 쏴죽이거나 신종 전염병에 감염되거나 좀비 떼한테 물어뜯기거나 화산 폭발 지역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좋겠다. 그런 영화에서는 내가 도저히 못하는 일 혹은 내가 당하기는 싫은데 지켜보는 건 재밌을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니까. 아무튼 동생이 내게 들려주고 싶다던 주인공의 명대사는 결국 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뭐라더라 사랑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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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3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1-02-13 11:21   좋아요 0 | URL
앗, 근데 영화는 괜찮았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추천이어요. 흠 그러나 이게 과연 영화를 반토막만 보다 나온 자가 할 말인지는...-_-;;;

제가 끝내 직접 듣지 못한, '사랑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는 주인공의 명대사를 곰곰이 씹어보니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사랑 역시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않겠어요. 역시 '할 수 없는 것'들은 대리만족을 해야 하는 거였어요.

영화도 괜찮고 대리만족도 해볼 기회였는데 뛰쳐나와버렸다는 거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제가 남의 연애에 배가 아팠었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요. 윽 맙소사 ㅎㅎㅎ

2011-02-14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4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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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의 대담에서 둣치오는 맑스주의자가 푸코에게 가질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의문들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그는 푸코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분석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근대세계의 모든 사회에서 유사하게 작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당신의 이런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전체주의나 민주주의체제 간의 차이가 무의미해져버리지 않나. 물론 당신은 이를 부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담론이 가져올 결과와 그것의 정치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신의 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회의주의, 무관심주의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사유의 토대나 방식이 워낙 다르다 보니 어떤 답변은 종종 질문과 단절된 채 흘러가는 면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푸코의 답변을 읽고 나서도 뭔가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푸코와 맑스라고 하는, 여간해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만남은, 푸코가 끝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연구가 (회의주의가 아니라 무려)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다고 밝히는 순간 오묘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모든 연구는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요. 당신이 어떻게 갇혀 있는지 보시오.’라고 말하기 위해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물들이 변형될 수 있다고 믿는 한에서만 그것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165)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섣불리 말을 하지 않는 거라는 푸코의 말이 다소 수사적으로 들린다면, 이 책에서 푸코가 자신의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다음의 대목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들을 구축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주체성의 수준을 전환하고, 그 자신을 상이한 주체성들의 무한하고 다양한 계열들로서 구성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우리를 ‘인간’이라고 가정되는 그 무엇과 마주치도록 만들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며, 그는 대상의 영역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 자신을 바꾸고, 해체하고, 변환하고, 주체로서 탈바꿈하는 무한한 과정 속에 놓여있습니다.”(120)

푸코는 “인간이 인간을 생산한다”는 맑스의 경구를 돌아보면서, 이 경구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어떻게 될지 그리고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생산”이라는 문제가 곧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 즉 전체적인 혁신을 창조하는 문제”(119)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더 이상 자기-동일성 속에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 그리고 그 결과, 주체가 그 자체와 결별하고, 그 자신과의 관계를 깨뜨리며, 동일성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경험”(53)을 수반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담에서도 여전히 푸코는 ‘현재의 우리를 파괴하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생산해내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지식인의 역할은 해결책을 처방하거나 규칙을 설립하거나 도덕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163) “문제를 전체적인 복잡함 속에서 드러내어 의심과 불확실함을 유발”(154)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푸코에게는 개별적인 주체의 실천적 측면을 다루는 것이 곧 사상적 자기모순을 자초하는 일이므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는 그 자신이 일생에 걸쳐 지난하게 밀고 나갔던 지적 탐구의 여정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꿈꾸는 실천적 주체의 한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한편, 이 책에서는 맑스주의 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푸코의 생각도 들여다 볼 수 있다. 푸코는 근대 이성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시도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큰 매력을 느꼈다고 거듭 밝히면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채택된 ‘주체’에 대한 생각이 대단히 전통적인데다가 맑스주의적 형태의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사유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확실히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것 혹은 구속되어 있는 우리의 본성이나 인간의 근본적인 진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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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이하 방): 책읽기를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영화를 보며 즐기거나, 등산을 하며 즐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 과하면 소비성입니다. 한국의 도서관에는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하는 낙이 있지요. 
주인장(이하 주): 제게 독서는 소비이자 자기계발이자 성장입니다. 영화나 등산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려운 것 같네요. 요즘에는 도서관에도 좋은 책이 많습니다. 
방: 미국 동네에는 벤자민 프랭크린의 지시로 만들어진 공공도서관에 엄청난 양의 책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 읽기란 불가능하지요. 도서관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책을 찾아 읽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주: 목적 있는 독서도 좋고 목적 없는 독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면서 목적은 수정되고 만들어지고 변경되는 것이니까요. 
방: 돈, 취직, 연애를 지적 성장보다 더 중요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진지하게 토론하려는 것을 일종의 낭비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거든요. 
주: 낭비로 볼 수도 있지만 생산적 토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돈, 취직, 연애가 궁극 목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방: 책 읽는 것으로 토론하는 것은 학창시절에는 도움이 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거의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책이 만들어진 다음의 정보는 실제로는 가치가 없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점을 깨닫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 
주: 동의할 수 없군요. 
방: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분들의 가족은 반드시 큰 고생을 하게 됩니다. 특히 부인으로 되시는 분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 점도 아셔야 합니다. 
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아마 괜찮을 겁니다. 
방: 책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책에 파묻혀 살다가 실수로 몇 권의 책을 폐지로 버려버린 아내에게 매질을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거의 반복되는 이야기지요. 
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요? '매질'을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네요. 
방: 그리고 좀 아프시겠지만,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저는 님과 아무런 이해득실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인생의 선배로 진심어린 충고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할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책을 자꾸 찾는 것이 아닌지를. 
주: 제 직업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네요. 저는 '책 만드는' 출판 편집자로서, 책을 읽는 것은 자기계발이자 업무이자 취미이자 삶이자 이념입니다. 독서는 저의 가장 중요한 '현실'입니다. 
방: 편집일로 직업상 매일 책을 읽어야하는데 취미로 또 책을 읽는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시면 삶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나요? 
주: 기계적/중립적 균형보다는 몰입의 극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독서에 몰입해 있을 뿐이지 삶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  

평소에 간간이 들여다 보는 어느 다독가의 블로그에 갔더니 주인장이 방문객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라딘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결코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방문객의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이 대화에서 주인장은 책읽기의 소모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항변으로 자신의 직업을 내세우고 있기라도 하지만, 나의 직업을 떠올려보면, 나 자신은 이런 자기합리화조차도 가당치 않은 처지가 아닌가. 나는 출판 편집자도 아니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도 아니며 진보단체의 활동가는 더더욱 아니다. 구태여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거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찾아 읽어야 할 하등의 이유나 필요성이 내게는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책과 삶을 철저히 분리시키게 되었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작품을 다룬 서적을 탐독하면서도 나의 이력은 결코 현대미술적(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이 좋으면서도 내 삶은 결코 낭만주의나 리얼리즘이나 실존주의로 치달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좌파 사상가들의 글귀에 감전이 되더라도 책을 덮고 나면 그 뿐, 나를 둘러싼 이 부조리한 세계 만큼은 끝끝내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발칙하고 불온하고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것에 탐닉하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미로서만 지속되어야 할 뿐 내 실제적 삶은 결코 그리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지독히도 이율배반적인 자기준칙... 어쩌면 욕망과, 그러한 욕망을 금하려는 욕망 간의 애증 관계, 이 사도마조히즘적 자기 쟁투야말로 내 삶의 행보인지 모르겠다.

독서, 특히 인문학 방면의 독서는 현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잠시 동안이나마 불온한 상상에 빠져들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불온한 상상은 절대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위안이 될 뿐이다. 저 방문객의 말처럼 내게는 독서가 명백한 도피의 수단인 것이다. 독서는 내게 좌절된 욕망의 출구이며 사치스런 지적 쾌락주의에 다름아니다. 돈 쥬앙이 아름다운 여인을 탐하듯 나는 내게 지적 자극을 주는 책을 탐할 뿐이다. 목적도 없고 대의도 없이 그저 현실을 벗어나서 책을 읽는 상황 자체를 즐길 뿐이다. 방문객은 이런 짓이 실제 생활에 거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적고 있다. 나 역시 독서 활동 일체를 작파할 정도의 통렬한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일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아직 안 읽은 책들, 탐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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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0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수양님. 글. 와닿네요. 혹시 제 블로그에 옮겨 놓아도 괜찮을까요?^^

수양 2011-03-0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그러면 영광이지요^-^ 저도 빵가게님 글 잘 읽고 있답니다^-^

2011-06-17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책은 다들 재미로 읽는것 아니였나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