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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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고소한 밀레토스에게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내가 젊은이를 타락시켰다고 하자, 그렇다면 젊은이를 선도하는 사람은 누구냐?' 처음에 밀레토스는 '재판관들'이라고 했다가 소크라테스의 유도질문에 넘어가 '소크라테스만 제외한 아테네의 모든 이들'이라고 범위를 확장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의 일격,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는 단 한명 뿐이고, 그 외의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선도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행복한 환경 속에서 산다고 할 수 있겠군.'

 

소크라테스는 또 밀레토스가 '착한 사람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사람은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든 다음, 이렇게 추궁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이 어린 너도 그 정도는 아는데, 그렇다면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누군가를 타락시키면 타락시킨 자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손해를 입기 쉽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무지몽매하겠느냐? 내가 그토록 무지몽매하지 않다면, 나는 청년을 타락시키지 않았거나, 만약 타락시켰다 하더라도 고의는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법률은 비고의적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범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서 타일렀어야지 않겠느냐. (이 파렴치한 놈아!)'

 

과연 소크라테스로군! 논리가 정연해서 함부로 반박할 수는 없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정체모를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이 이상한 '산파술'로 인해 기원전 399년도 무렵의 아테네 시민들이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겪었을지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본인의 무지를 깨달았으면 조용히 홀로 지적 수양에 매진할 일이지 왜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을 붙들고 돌아다니면서 모두를 그토록 짜증나게 만들었을까. 오늘날 도를 아시냐는 분들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만의 무식한 방식에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권리가 있다. 왜 <I Wanna Rule The World>라는 노래 제목도 있질 않나. 소크라테스는 자율적으로 각자의 내적 세계를 통치해 나가고자 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정당한 욕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형에 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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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 (보급판 문고본)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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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은 자전소설이다.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추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는 서문에서 짐작이 간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실패에 대한 예감 없이는 쓸 수 없는 글, 자꾸만 연막을 치고 안개를 피우고 변죽을 울리고, 그러다 독백에 그치고 마는, 으레 그럴 줄 알면서도 부쩍 허약해진 소설을 끝끝내 붙잡고 있는 사람이 한 고비를 넘어가는 심정으로 감당해야 하는, 그런 글..." 이 고백이 유난히 따갑고 시린 것은, (내가 알기로) 평소 이 작가가 사변에 빠지면 빠졌지 감상에 빠지는 류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는 소설 속에서조차 '나'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도 되지 못하고, '그가 쓴 소설 속의 인물'로서 존재할 뿐이다. 결벽에 가까운 자기객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설정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여하튼 최대한 함부로 발설하지 않기 위해 이런 완곡한 설정을 한 것도 모자라, 작가는 끝내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소설을 완성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욕망과 숨기려 하는 욕망, 펼쳐내려는 욕망과 묻어두려는 욕망이 서로 머리채를 움켜쥐고 사투를 벌이는 이 처절한 격전지를 작가는 ‘수렁’으로 비유했다. <생의 이면>은 그 수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작가가 토해낸, 흡사 천식환자의 기침소리 같은 소설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완성되었고, 작가는 이제 하나의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고비를 넘긴 그가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또 아프다. 이 소설만큼이나 아프고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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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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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금융화 현상을, 하나의 (장기)세기를 주기로 산업화(M-C)와 금융화(C-M')를 되풀이하는 수 세기에 걸친 체계적 축적순환의 최근 세기, 즉 장기 20세기의 특징으로 본 조반니 아리기는, 이러한 반복이 생산과 노동에 대한 탐구와는 ‘별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사회적 삶과 역사의 모든 비밀이 숨어있는 곳으로, 노동의 창조행위와 그에 대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혼적인 저 갈등의 연옥으로 들어가기를 회피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주의를 역사의 장기에 걸친 표면적인 세부들에 고정시킴으로써 실재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에서 폭발해 나올 수 있는 감성적이고 실천적인 해결, 요컨대 '주체적'인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회피의 방법으로 귀착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p.35

 

저자는 '경쟁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라는 세 단계에 따라 경쟁과 독점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존의 전통이 오늘의 제3기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면서, 자본주의 역사는 소유 관계보다 더 깊은 차원인 '생산'의 차원에서 다시 탐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인지노동'인데, 여기서 '인지'란 추론, 분석, 감각, 지각, 기억, 결정, 소통 등 개체적 및 개체간 수준의 정신작용 일체를 말하며, 이를 활용한 노동이 곧 인지노동이다. 저자는 3기 자본주의가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인지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측정하기 곤란하다. 노동시간을 분절하는 것이 곤란하여 시간 척도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애초에 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가치화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주지하면서, "맑스의 가치법칙 개념의 핵심적 기능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를 설정하는 데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투쟁과정에서, 자본이 노동의 저항과 투쟁을 축적 과정에 흡수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기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것은, 계급투쟁 과정 속에서 '자본'과 '강제 동원된 노동'이 합의한 일종의 휴전선이며 정치적 타협안인 것이다.

 

결국, 가치 측정에 있어서의 곤란은 비단 인지노동에서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으로서의 가치법칙에 처음부터 내재"한다.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임의적이고 명령적이고 외부적"이었지만, 인지자본사회에 이르러 더욱 더 그 정도가 두드러지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인지자본사회에 가치 법칙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느냐 붕괴될 것이냐 하는 것은 이 책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초점은 "자본이 부과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실천을 창안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정치적인 문제에 맞춰져야 한다.

 

물론, 이 책의 논리상 가치법칙의 위기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심화하고 있는 것은 맞다. 인지노동의 특성상 노동으로서의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 평가에서 은밀하게 제외되어 버리는 노동의 누락분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노동의 '탈상품화'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혹자는 예비 인력인 실업자 증가를 이유로 이 시대에 오히려 노동력 상품화가 가속화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진실일지 모른다. 실업자 증가는 폐품의 증가, 곧 노동력 '가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증대하려는 자본의 운동이 필연적으로 노동력의 탈상품화와 노동가치 하락을 초래하고 이것이 모든 상품의 가치 퇴락으로 이어져 마침내 가치 법칙이 무력화되고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 예견했는데, 그렇다면 인지자본사회에서는 절정으로 치닫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자본이 부과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실천을 창안하고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노동 형태로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 중 하나가 '프리터'다. 저자는 정규고용으로부터 배제되면서 '욕망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프리터의 확산이 오늘날 새로운 삶의 잠재력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임이 분명하다고 하면서도, 욕망하는 삶에 대한 개인적 추구는 자본관계에 쉽게 포섭된다면서 욕망의 실질적인 충족을 위한 공통적이고 집단적인 연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욕망을 사회적 욕망으로 전화함으로써 공통가치를 창출하라는 얘기다. 골방에 갇혀 그레고리 잠자가 되어가고 있는 프리터 중 1人으로서 뜨끔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사족:

가치화 및 상품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노동, 가치법칙의 외부로 밀려나 임금의 지불 없이 자본에 의해 무단 사용되는 노동, 체계에 기입되지 못하고 누락되어버린 노동, 마치 상징계의 균열점에 위치한 것과 같은, ‘외부효과’로서의 노동... 이런 종류의 인지노동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비경쟁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공공재라는 것의 존재가 대대적인 위기를 통해서 '발견'되고, 역할을 '인정'받고, '지위'를 얻고, '관리'를 받기까지의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을 떠올려보면, '인지노동' 역시 마찬가지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상징계에 기입될 수, 아니 기입되어야지 않을까.

 

그러니까 요는, 무단으로 갈취되고 있는 우리의 공통자산에 대해 어찌되었든 최소한의 보상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시스템의 "명령"(이데올로기적 명령, 자본의 힘이 발휘하는 명령, 군사적 명령)을 자발적으로 수행한데 대한 대가를 난데없이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 이전에 난센스 같은 얘기겠지만, 또 이 난센스 같은 보상이 기적적으로 가능할지라도 대체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적 모색'은 필요하지 않을까. 상상력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인지능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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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테러 이후의 세계 뉴아카이브 총서 4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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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될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지젝의 선동은 두려움과 흥분을 준다. 아마도 내가 냉소적인 식자층, 아니 애당초 식자층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무지하고, 피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귀를 솔깃해 하는(벤야민이 그랬던가, 모든 책은 하나의 전략이라고? 그렇담 지젝의 수다스런 인용은 확실히 전략적이다), 생존을 사수하느라 삶을 잃어버린, 포스트모던 시대의 전형적인 ('전형성'에 있어서 순도 높은?) '말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이들은, 오늘은 매운 게 땡겨서 육쌈냉면 먹으러 가듯이(혹은 요즘은 육쌈냉면이 대세니까 육쌈냉면 먹으러 가듯이), 지젝도 그런 식으로 소비하는 족속들이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종류의 피상성이, 진실되지 못함이, 근본주의적이지 못한 태도가 '마술적 마주침'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젝의 말은 불행 중 다행 아닌가? 내 안의 '저열함의 잠재력'을 믿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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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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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칼을 모은다. 칼로 뭘 어찌 해보려는 게 아니라, 그저 칼이라도 있어야 한숨 돌리고 지낼 수 있는, 그마저도 없으면 도무지 무서워 살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소설 <칼>은 심약한 인간의 비극적인 존재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작가는 분명 간과하고 있다. 칼을 손에 쥔 사람에게서 비로소 살의가 자라나기 시작한다는 유물론적 가능성을. 누가 알 것인가. 칼이 노예에서 주인으로 전화하는 황금의 열쇠가 될어줄지. 하여 나는 작가가 속히 <칼>의 후속편을 구상하기를 청한다. 후속편은 당연히, 칼이라도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가 없는 남자가 우발적으로 누군가를(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죽여버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진정한 악인으로 거듭나는 범죄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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