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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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을 유발하는 심리에 대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함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주위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보면서 제 영향력을 자각하고, 자신이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불행을 전시하는 이면에는 동정을 받기 위한 열망이 있으며, 그러한 열망은 곧 자신이 지닌 힘을 확인하려는, 즉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열망이라는 것. 더군다나 그것은 이웃의 기운을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것.

 

약자가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 강자를 괴롭혀 자신의 힘을 만끽한다면, 강자는 사교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쾌감을 얻는다. 아마도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사교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토론의 장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토론의 장에서 강자가 상대에게 갖는 호의란 전투적인 호의다. 전투적인 호의 속에서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고 괴롭힘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받고 즐거워한다. 약자의 경우든 강자의 경우든 방식만 달랐다 뿐이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힘과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잔혹한 “치부”에 대해서 니체는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니체의 심리분석은 매력적이다. 읽는 이를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니체가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니체는 거의 항상 부분적으로만 옳다.) 과연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는 약자의 심리가 꼭 강자를 괴롭히기 위해서일까. 동정을 유발하고 어두운 정서를 전염시킴으로서 자신의 힘을 자각하기 위해서일까. 글쎄, 니체는 아마도 조응(혹은 감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조응이라는 말을 몰라서 고작 전염이라는 어휘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맹점이자 무능인 것 같다.

 

괴롭히고 대결하고 투쟁하고 정복하는, 그 모든 엎치락뒤치락하는 즐거운 악의들만이 세계의 힘이 발휘되는 방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갈대가 몸을 누이는 것은 그리스적 호전성 때문이 아니라 조응을 통한 마음 속 깊은 연대에 따른 것이 아닐까. 조응과 교감, 번짐과 확산, 연대와 어우러짐 역시 힘들이 발휘되는 또 하나의 즐거운 방식이 아닐지. 그렇게 본다면, 약자가 불행을 전시하고 동정을 구하려 하는 것은 심연의 연대를 통해 힘을 증강시키려는 몸짓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응과 연대는, 전염도 괴롭힘도 아니다.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어 접합함으로서 힘을 증강시키는 방식이다.

 

내 생각이 궤변이라면 니체도 못지않다. 니체의 철학은 호전적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호전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싸워보고 싶게 만든다. 들어보면 마냥 대단하고 탁월한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수긍이 안 가는 헛소리도 많이 하기 때문에. 허풍인지 심오함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자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광대의 목소리 같기 때문에. 그 경계가 모호하므로 싸워보고 싶게 만든다. 내가 지금 쓴 독후감처럼, 되지도 않는 시비라도 걸어보고 싶게 만든다. 열광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고, 받들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들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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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와 광기 - 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 클리나멘 총서 5
이수영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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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 날 술자리에서 /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 (...) / 형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엄마가 아팠다. 모두 시골 출생이었고, 흡연자였다. / (...) / 과방에서 책을 태우다가 불을 내기도 했다. 과방 복도에 소화기를 뿌려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도 했었다. 그들은 서로가 범인이라고 자랑을 하고, 그 거짓말을 들어주면서 더 진지하고, 친해졌다. -박성준, <대학 문학상> 中에서

 

시인들은 왜 애꿎은 어머니까지 끌어들여 아파야 하나. 시를 쓰기 위해 불을 내고 소화기를 뿌려가며 발광을 떨어야 하는 이 상황은 뭔가. 아니, 질문을 다른 쪽으로 겨냥해보자. 시인들의 이야기에 절실하게 공감하는 우리들은 뭐가 또 그리 아픈가. 정말로 그렇게 상처가 많고 괴롭고 날마다 미쳐버리고 싶고 그런 걸까. 어쩌면 그 모든 질병과 광기와 슬픔이야말로 자기창작의 서사가 아닐지. 사실 우리는 전혀 아프고 있는 게 아닐 지도. 아프다고 자꾸만 인식하는, 그런 아픔에의 과도한 자각이야말로 이 시대 특유의 기이한 문학적 풍습이며 언젠가는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이' 그렇게 사라져갈 존재미학적 양식인지도.

 

이 책은 푸코적 관점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을 탐구해봄으로써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근대적 주체의 독특한 모습을 해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187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이전까지의 개화기를 전근대로, 192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근대로 설정하면서 단절의 시기인 1920년대의 문학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저자는 푸코가 포착했던 19세기 무렵 유럽의 인식론적 지형 변화가 한국에서는 1920년대에 일어났다고 보고, 그 구체적 양상을 문학의 영역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란, 인간이 비로소 인간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신의 내부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모든 인식의 역량을 쏟아 붓는 시대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상황에서 근대 초입에 해당하는 1920년대의 문학계 역시 "인간의 육체와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한없는 탐색", 즉 "인간에 대한 앎의 의지"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앎의 의지는 병리적인 인간을 다룸으로써 관철될 수 있었다. "인간은 병들었을 때 자신의 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섹슈얼리티와 광기가 [모든 병리적 증상의 회전축으로서, 따라서 앎의 궁극적 지점으로서] 중요했는데,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과 진실은 이와 같은 병리적 상태에서만 객관적인 대상으로 표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수 식의 계몽적 주체가 전근대 시기를 풍미했던 문학적 주체의 양식이었다면 1920년대 이후 문학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선각자이길 포기한다. 대신 생의 진실을 마주하고 문학적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앓기 시작한다. 성적 욕망과 죄의식과 망상과 광기와 온갖 신경증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병리성에 대한 묘사와 해부가 20년대 문학을 지배한다. 저자는 이러한 병리성이 단순히 당대의 암울한 정치적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2000년대 등단한 시인인 박성준의 시가 증언하듯 오늘날에도 계속해 이어져 오고 있는 근대 문학의 유구한 특질이라고 보고 있다.

 

구운몽과 홍길동과 전우치라는, 호메로스 대서사시 부럽잖은 고전소설의 천진무구한 영웅들이 별처럼 스러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욕망과 광기에 시달리느라 내면이 비대해진, 심적으로 피로한 근대의 인간들이다. 이들을 뛰어넘는 미래의 주인공을 오늘날 우리 문학이 '출산'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문학의 자기붕괴를 수반하는 사건일 것이다. 상처와 아픔과 고뇌와 번민이 없이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생의 비극성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뛰어넘은 (문학을 찢고 나온) 새롭고 낯선 문학적 주체의 출현을, 진정한 '듣보잡'의 출현을 고대해본다. 아니,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징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의 직관으로부터 가장 먼저 새어나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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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의 불만 - 새로운 우파의 출현과 불안한 징후들
이택광.박권일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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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 강남좌파, 중간계급 등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꼴통 이미지와는 차이를 두는 새로운 우파의 불만과 열망을 분석하고 있다. 3장 김진호의 글 <기독교 우파와 신귀족주의>에서는 해방 정국 이후부터 간략하게 주류 기독교 사회의 변천사를 훑어보고, 오늘날 한국의 중상위 계층이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강남의 대형 교회 신도들이 보여주는 신앙 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짧은 글임에도 무척 흥미롭다. 자본주의와 순접하여 번성해온 한국 기독교 사회의 풍속과 문화사를 사회학적으로 살펴본 책이 좀 더 있지 않을까. 관심이 간다. 그나저나 이 책에 공동저자로 참여한 젊은 필자들은 좀 더 숙성의 기간이 필요할 듯. 젊은 세대들에게도 이런 식의 책을 통해서 발언의 기회가 있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같은 또래인 내가 봐도 상대적으로 내공이 많이 딸려 보이는 점은 안타깝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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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나 일기 같은 고백적 글쓰기는 평론 같은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좀 더 스스로에게 윤리적일 수 있는 계기가 열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을 전면에 노출시킴으로써 정신적 포르노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비평적 글쓰기보다는 삶과의 거리가 더 가까우며, 그래서 삶으로부터 헛돌지 않고 보다 정직할 수 있으며, 삶을 살아가는 나와 텍스트 상의 나 사이의 괴리를 그나마 가장 좁힐 수 있는 형식인 것이며... 그러나 고백적 글쓰기는 그것이 아무리 엄격한 자기검증을 거친다 할지라도 결국 개인적 감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감상주의가 싫은 것은 그것이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쁜 비평이 대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맹렬하게 비난함으로써 자아의 허장성세 속에서 손쉽고 재빠르게 정의롭고 똑똑한 노릇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면, 감상주의란 것은 엄살과 응석을 부리면서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격한 감정에 편승하여 쉽게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고, 그러고 나서는 금세 개운해져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도취와 해소의 지루한 반복... 삶에 뛰어들지 않으면서,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해박하고 고상한 척 하는 분석적 비평적 글쓰기, 그리고 이런 식의 글쓰기로 대변되는 삶의 태도가 역겹다면, 삶의 카오스에 빠져 좌표를 잃고 첨벙대는 모습은 딱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감상주의는 내가 경멸하는 문학의 나이브한 면과도 상관이 있을 것이다. 문학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또한 그 본질의 숭고함을 의심하는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섣부른 단견일지라도 내가 느끼기로는 뭔가, 치명적으로) 나약하고 가벼운 점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과장이 심하고 잘 웃고 잘 울고 쉽게 화해하고 뭐든지 순식간에 승화시켜버리는 그런 헤픈 모습이 소박함을 넘어 천박하고 환멸스러워서 문학이라는 영역을 전반적으로 수상히 여기게 되고 심지어는 문학의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요사스러워 그 숲 전체를 불질러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이는 것이다. 자꾸만 내가 나 자신의 문학적인 어떤 면을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일 것이다.

 

결론의 자명함을 회의하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지난하게 사유를 진척시켜 나가는 글이라도 딜레마는 상존한다. 비평이든 고백이든 간에 생각이 중층적으로 되어갈수록 텍스트는 입장을 표출하거나 정서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점점 더 머뭇거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칫 교활한 요설의 혐의를 쓰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그것이 아무리 육중한 고뇌의 무게를 갖는다 할지라도 최종적인 외양은 그저 망설이고 우물쭈물하는 것으로만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양새 때문에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회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글이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세계에 대한 입장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가버린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글이 되었든 저런 글이 되었든 솎아내고 깎아내고 털어버려야 할 것들은 많은데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 경계가 뚜렷이 보이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란 난망해 보인다. 정작 쓰는 글이라 해봤자 이곳에 간혹 들어와 끼적이는, 애써 독후감이라 우겨보는 토막글이 전부일 뿐인 내 처지를 떠올려볼 때 지금까지의 장광설이야말로 과장과 엄살과 응석이 아니면 무엇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 줄이라도 좀 더  결벽적으로 써봐야지 않나 싶은 건 또 무슨 오기일까. 이 모든 게 허망하고 우스운 소꿉질인 줄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면서. 아니, 허망하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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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제주도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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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일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과장된 비유일 뿐 오늘날 실제로 일하다 죽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약 어떤 일터에서 그런 일이 빈발한다면 응당 사회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녀들의 세계에서 죽음은 수사가 아니라 엄존하는 현실이었다. 해녀들은 대개 칼 손잡이 끝에 끈을 매달아 손목에 단단히 감고 입수를 하는데, 바위에 달라붙은 전복에 칼을 꽂았다가 칼이 전복에 박혀 빠지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하고 숨이 차 죽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그네들은 한겨울 바닷물에 얼어 죽고, 해파리에 물려 죽고, 상어에 잡혀먹는 등 실로 갖가지 횡액에 목숨을 잃었나보다. 물질하다 보면 조류에 실려온 다른 마을 해녀 시체를 만나는 일도 빈번했던 모양이다. 익사자가 생기면 주로 베테랑급 해녀들이 해수면의 미묘한 색변화를 살피고 바람의 방향과 조류를 계산하여 시체를 찾아냈다고. 그러나 내일의 목숨을 잇기 위해 오늘에 목숨 걸었던 해녀들의 생활사를 누가 감히 처절하다 연민할 수 있을까. 내게는 차라리 위대한 전설처럼 아득하고도 감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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