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다지 총명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공부를 하려고 하는 까닭이 뭘까. 생각해보면 결론은 역시 공허감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나야말로 전형적인 히스테리 자아가 아닐까. 히스테리적 자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공허감이다. 거대한 무(無)로 이루어진 유(有)인 그들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어떤 것’을 찾아내어 그것으로 무(無)라고 하는 자기를 덮어 씌워버림으로써 오로지 그 윤곽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때문에 그 ‘어떤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해야 한다. 공허를 제대로 덮어 씌워버리기 위해서. 쉽게 구멍이 뚫리거나 벗겨지면 안 되므로 또한 견고하고 튼튼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이 남편이나 가정이나 직업 따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관계의 산물인데, 관계라는 건 허물어지기가 너무도 쉬우니까. 강력하고 안전하고 견고한 어떤 것. 내가 찾는 그것이 현재로서 학문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모든 학문 중에서도 가장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목매달게 되지 않을까. 철학이나 신학 같은.

 

2 삶이라는 총체적인 비의에서 오는 고독과 단순히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은 다른 종류의 것일진대 나는 자꾸만 그 둘을 혼동한다. 견고한 자폐의 성 안에 틀어박혀 그간 수집한 몇 되지도 않는 책들을 세계의 전부인 양 끌어안고 마이 프레시어스를 연발하며 사는 것이 내 모습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만들어낸 이 국지적인 공간의 어둠과 음습함을 존재자의 서글픈 필연이라고 거창하게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내부로 파고드는 습벽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실재로서의 주변을 외면하는 것, 아니 심지어 냉소하고 경멸하는 것, 나와 주변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는 그 편협한 생각의 틀이 잘못된 게 아닐까. 배움이 결코 자폐의 성을 축조하는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인데, 오히려 배움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가교를 놓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인데, 나는 왜 자꾸만 골룸이 되어가는지. 앎이 계속될수록 책에 대한 집착과 탐욕은 늘어나고 심지어는 책에 대한 물신화 증세까지 생겨난다. 더욱 더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3 지금 이 순간이 고독하다면 그건 내가 전적으로 사랑이 고갈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면서 또한 아무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단단한 껍질을 두른 채 나는 지금 그 안에 단단히 갇혀있다. 가능하면 부딪힘의 횟수를 줄이고 내부로 은신하려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배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지금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만이 안전하고 나는 오로지 그것만을 견딜 수 있다. 독서는 사실 배팅하지 않은 데 대한 알리바이인 것이다. 알리바이가 술이나 춤이 아니라 책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부유하는 선택지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휘저어 낚아챈 것이 때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4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에 관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할 것이다. 흐릿한 추정과 상상 속에서 스스로를 옭아매지 말자. 무엇보다도 과거의 사건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행동은 현재로의 투신을 지연시킬 뿐이다. 아니, 과거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검고 슬픈 틈 앞에서 더 이상 하릴없이 서성이지 말자. 정념에서 벗어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몫의 생을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절망 속에서 진군할 것. 일체의 희망 없음 속에서 미소 지을 것. 현재로서는 확실히, 탐닉하고 몰두할 만한 순수하고 지고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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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구약 성경 이야기 명화로 보는 성경 이야기
헨드릭 W. 반 룬 지음, 원재훈 편역 / 그린월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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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의 처지로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려니 여러모로 답답한 점이 있어서 대략적인 이야기라도 알아두고자 읽었다. 성서 내용을 모르고서는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에 읽어보기는 하였으나 읽고 나서 드는 의구심은 과연 구약에서 어떤 종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 가혹한 요구를 하는가 하면, 인간사에 일관성 없이 개입하여 편파적으로 자비를 베푼다. 그는 공평하지 못하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심술궂기마저 하다. 유대의 영웅들 역시 인격적으로 썩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동방의 영웅이 덕스럽다면, 그리고 그리스로마 영웅이 용감무쌍하다면, 유대의 영웅은 영리하고 재주와 수완이 좋아 보인다. 도덕에 크게 구애함이 없어 일견 교활해 보이기도 한다.

 

구약은 그야말로 불가해하고 가차 없는 자연과 범속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풍부한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더도말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구약이 과연 인류의 성서가 될 만큼 독자적이고 심원한 종교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부족 설화 혹은 소수민족사 이상의 가치가 있는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차로 시편과 잠언 및 전도서 부분만 따로 떼어 엮은 책을 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끄트머리에 나오는 아래 대목 때문이다.

 

<시편>의 주제는 지난 6세기 동안 지어졌던 시의 주제만큼이나 다양하다. 선악과 복수의 장엄함에서부터 자연에 이르기까지가 가장 오래 전에,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바라고 기도했는지가 희망과 위안을 노래하는 시들 속에 녹아들어 있다. <시편>은 (...) 후대의 위대한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서양 최고의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그 장엄함은 우리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도드라진다. (...)

 

<잠언>은 다르다. 여기에는 비전이나 열정이 없다. 다만 현명한 옛사람들의 지혜로운 격언들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 <잠언>은 보통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며, 고대 유대인들의 관점에 대해 여러 역사서나 예언서보다 더 많이 말해준다.

 

그 다음 책인 <전도서>는 순전히 종교적인 책이다. (...) 저자는 묻는다. 평균적인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70년 동안의 고통과 근심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의 끝은 무덤일 뿐이다. 착한 사람도 주고, 악한 사람도 죽는다. 모두 죽는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의로운 사람은 박해를 받으며, 세속적인 사람은 부유해진다. 인간의 고통에는 아무 의미가 없단 말인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장 전체가 모두 이 말이다. -400~401쪽 中에서

 

흥미롭게도 구약이라고 하는 이 도저한 대하극에서 여호와는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차라리 비중은 적으나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조커 역할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호와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동원된다. 봉합이 끝나면 그는 다시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까먹어서 헤매고 있을 때 감독이 돌연 스크린에 등장하여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사라지는 형식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예전에 완행버스를 타고 지방의 소도시에서 소도시로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구약을 읽으면서 난데없이 그때 일이 생각났다. 서울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딱히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운전기사에게 말을 붙이는 승객이 거의 없다. 사실상 운전기사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탔던 그 완행버스에서는 아주머니 승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면서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기사님한테까지도 사과를 마구 입에 넣어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맛나지라우, 하면서.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버스는 수시로 출렁대는 와중에 보자기를 풀어헤치고 사과를 깎는 승객들하며, 클클대며 그 사과를 받아먹는 기사님하며, 그들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하며, 하여간 이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뭐랄까 그야말로 구수한 문화충격이었다. 아, 수많은 방법 중에 이렇게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구나.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못했지. 구약이 내게 준 신선함이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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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의 거의 모든 것 -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가장 알고 싶은 81가지
김병훈 지음 / 원앤원스타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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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무언가에 대해 정성들여 쓴 책을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따스함으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설령 실용서라도 그와 같은 독서 체험은 가능하다. 이 책이 그렇다. "자전거를 사라, 만약 네가 살아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로 시작되는 이 책은, "우리 땅이 좁고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면, 꼭 한번 자전거로 이 땅의 속살을 깊숙이 파고드는 강변길을 달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구한 역사를 가진 풍경인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는 저자의 제언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정말로, '자전거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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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널 경멸해왔다. 요즘도 이따금 네 블로그에 들어가서 글을 읽을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 없이 역겨운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 대한 관심을 확 끊어버릴 수 없는 까닭은 네 글에 면면히 흐르는 섬세한 지성 때문이리라. 그래, 너는 재기가 있고 명석하다. 그래서 너는 아름답지. 아, 차라리 네가 시시하기라도 해버렸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초에 너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이 점이 나를 얼마나 곤혹스럽게 하는지 너는 영원히 모르겠지.

 

왜 나는 너를 혐오하는가. 너는 얄팍하다. 피상성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얄팍하지. 하지만 얄팍한 가운데서도 주어진 조건 안에서 눈물겨울 만큼 정직하고 겸허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있어. 그러나 너는 얄팍하면서 오만하다. 얄팍한 주제에 권위적이고, 얄팍한 주제에 어른 행세를 하려 든다. 네 역량을 갉아먹는 너의 가장 큰 폐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특유의 교만함이다. 네 교만이 너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정의와 진리를 확정짓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너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그럴싸한 참된 것을 발견해 내어서는 그 뭣도 아닌 앎을 전시하고 계몽하려 한다. 아, 거기서 오는 역겨움을 대체 어쩔 것인가. 구제불능의 그 끔찍한 지적 속물주의를 어쩔 것인가.

 

네가 추구하는 정의라는 것은 내가 볼 땐 순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너는 깊이 고민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과 맹렬하게 싸우지 않는다.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 자신에 대해 모질게 회의하려고 하지 않아. 모르지. 속으로는 열심히 회의하는지도. 그러나 너는 설령 너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하더라도 그것을 좀처럼 글로 적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회의한 것을 글로 쓰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거의 다 헛소리고 개소리다. 그런 것은 그저 다 매캐한 연막 같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하지만 너는 특유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영원히 그 연막을 걷어내지 못하겠지.

 

사회적 능력, 인간관계, 지적 경험, 네가 갖춘 교양과 지식 등 갖가지 방면에서 너는 무의식적으로 끝없이 너 자신을 스타일링하려고 한다. 좀 더 파고들어도 모자랄 시간을, 자기를 예쁘게 연출하고 포장하는데다가 다 써버린다. 너의 글을 보면 마치 집 앞 슈퍼에 나갔다 올 때도 화장을 하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취향의 강요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대체 그 화장이 무슨 소용이냐. 그 화장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내가 볼 때 네가 하는 화장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 그러더라. 자세를 필요로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하여튼 너는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으니 이건 뭐 희한한 태생적 기질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질 않는다.

 

너는 대체 너의 민낯을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들여다보고 울어본 적은 있느냐. 운 것을 글로 써본 적은 있느냐. 써놓은 것을 보고 역겨워서 더 크게 울어본 적은 있느냐. 너는 없다. 앞으로도 없을 거다. 영원히 없을 거다. 그게 바로 너의 한계다. 네가 영영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너의 끔찍한 한계다. 너는 너 자신을 심지어 스스로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하지 않아. 왜일까. 그건 네가 늘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지. 근본적으로 너는 너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별로 없는 거야. 오로지 자존심만 있지. 그래서 너의 에고이즘은 견고하지 못하다. 애처로울 만큼 위태롭다.

 

자기 자신에게 투철하지도 않으면서 타인으로부터는 끝없이 인정과 선망을 얻고자 애쓰는 너의 끊임없는 자기 연출, 나이브함, 허술한 에고이즘, 어설픈 소녀 취향의 정치적 올바름, 속물성과 허영기... 아, 나는 정말이지 네 등짝이야말로 발로 차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도무지 네 밉상스런 글을 쉽사리 끊질 못하는 것일까. 네 글에서 나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일까. 너를 혐오하기에는 우리가 꽤나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저 술 먹고 네 생각이 나서 떠들어댔다고 해두자. 역시 나는 너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불쾌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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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처음으로 책의 세계라는 것을 접하였을 때는 그 방대한 규모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급기야 온갖 도서 분야를 두루 섭렵하여 마침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추고야 말겠다는 터무니없는 결심을 품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어나가면 갈수록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는 일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지고 차라리 가장 본질적으로 여겨지는 분야의 고전적인 저작들을 공들여 독파해 나가는 편이 훨씬 의미가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데, 요즘 들어 춤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추는 춤이 소셜댄스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드는 의문은 과연 춤을 다양한 사람들과 출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요즘은 해피데이에도 플로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잘 추는 사람들이 별로 안 보인다. 예전에는 온통 잘 추는 사람들밖에 안 보여서 해피데이 출빠가 두려울 지경이었으나 이제는 춤 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저마다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사가 빠진 것처럼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들썩이는 사람, 화려하게 추는 듯 하지만 텐션이나 모멘텀을 하나도 살리지 못한 채로 추고 있는 사람, 제멋에 겨워 추는 사람, 춤이 아니라 운동을 즐기고 있는 사람 등등. 물론 내가 이런 말 할 계제는 아니다. 내가 추는 춤도 동영상으로 찍어보면 틀림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게 될 테니. 그러나 여기서의 핵심은 내가 해피데이의 전반적 수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니 넘어가자.

 

아무튼 요는, 춤 실력이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향상됨에 따라 제너럴 현장에서의 나 자신의 선호가 점차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 한 곡을 추더라도 나와 스타일이 맞는 상대를 만나 그 곡을 멋지고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완성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 무척 파트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춤판의 아나키스트라고 자위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거의 범동호회적 왕따나 다름없는 현재의 내 처지를 고려할 때, 나와 스타일도 수준도 딱 맞는 그런 100%의 파트너를 대체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 파트너만 구해져도 내 춤인생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

 

퇴근이 늦어져 지금 가면 한 시간도 채 못 출 거 같았는데도 기어코 갔다. 30분 만이라도, 딱 30분 만이라도 춤출 수 있다면 오늘 하루는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겠단 생각으로. 한 40분 정도 추고 온 것 같다. 춤이라는 건 참, 화려하고도 허망하다. 무상하고도 찬란하다. 그래서 눈이 부신 나머지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이 춤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허무감 때문에 발길을 끊게 되고 그러다가도 이내 또 미련과 그리움 때문에 다시 춤판을 기웃거리고... 가슴 벅찬 환희와 공포에 가까운 허무를, 열광과 환멸을, 충만과 결핍을, 의미와 무의미를, 살아있음에 대한 생생한 감각과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쓸쓸함을,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는 춤! 참으로 알 수 없는 춤! 헛되고 헛되다며 치를 떨다가도 지하철에서 내려 스윙빠가 가까워져 오면 여전히 가슴이 뛴다. 난생처음 스텝이란 걸 밟았을 때처럼. '명랑한 허무주의'를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춤판에 버금가는 장소가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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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에 절은 채로 빠 나오면서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스윙감에 있어서 날마다 최고치 경신 중. 이 얼마만에 만끽하는 지복의 체험인가. 살아있었다. 나는 오늘 정말로 살아있었다.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살아있었다. 스윙아웃 할 때의 느낌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점성이 붙고 있다. 갈수록 걸쭉해짐을 느낀다. 스텝은 더욱 더 경제적으로 구사되고 왼손은 구심력에 힘입어 저절로 뮤지컬리티 같은 게 이루어진다. 이 모든 변화가 점도의 상승 그리고 구심력의 증가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내 몸이 하나의 채찍이 된 기분. 더 탄력있고 더 낭창낭창하고 더 야무진 채찍이 되고 싶다. 요즘은 정말 춤 출때 너무너무 즐겁고 상대방도 행복해 하는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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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뤄로서 리더의 리딩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유머가 필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춤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성격의 문제 내지는 삶의 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 부분이 내 한계인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유머를 몹시 좋아한다는 것. 나 스스로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일단은, 춤출때 여유를 잃지 말자. 이것저것 염두해둘 점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추진 말자. 서로 함께 즐거우려고 추는 게 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

 

그나마 다행한 일인데, 확실히 스윙은 쉰다고 해서 그 실력이 퇴보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 번 깨우친 것을, 몸은 몇 달이 지나도 놀라우리만치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구체적인 패턴이 아니라, 커넥션과 모멘텀, 균형 감각을 기억하는 것이다. 멈출 때와 가야할 때를 알고 적시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것. 균형 잡힌 턴을 할 줄 아는 것. 정중동과 동중정. 원초적이고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앎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부분들은 일단 습득을 하고 나면 반드시 '체화'가 된다. 신기해라.

 

 

사실상 리더가 백이면 백 가지의 바운스와 백 가지의 커넥션과 백 가지의 스윙아웃이 있는 셈인데, 각각의 리딩에 대해 최적으로 반응한다는 게 여전히 쉽지 않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그렇고 남의 깊은 속을 헤아리는 일이 그렇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예전보다는 확실히 다양한 스타일의 리딩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듯. 예전에 리더의 리딩을 읽는 화소가 10이었다면 지금은 한 100정도로 그 감도가 확장된 것 같다. 그러나 제대로 섬세해지려면 아직도 멀었다.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귀 기울일 것.

 

*

 

습관적인 풋워크를 지양할 것.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데 꼭 쓰리스텝일 필요는 없는 거다. 호 그리면서 갈 수도 있고 슬라이드 하면서 갈 수도 있는 거다. 좀 더 자유로워져 보자. 좀 더 변화를 줘보자. 자유. 변화. 표현. 이런 것들이 다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습관에 안주하지 말고, 조금씩 꾸준히 새로운 걸 시도해 보자. 아울러 늘 명심할 것- 수용, 이해, 배려, 조화, 다정한 마음.

 

*

 

카라가 보여주는 간지의 비결은 무엇일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몸매와 비율 때문인가 하면 꼭 그런 거 같지도 않다. 국내 유명 고수 팔뤄 아무개 몸매도 카라처럼 마른 듯 날씬한 체형이지만 춤사위에서 나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아무개 팔뤄의 춤이 익살맞고 신명나다면 카라는 좀 더 단정하고 절제된 듯한 춤사위를 보여준다. 유독 견고해 보이는 상체 프레임도 그렇고, 확실히 카라의 춤에서는 어떤 절도 같은 게 느껴진다. 가령 이 여자는 아무리 웃긴 이야기를 들어도 결코 의자에서 뒤집어질 정도로는 웃지 않을 것 같다. 깔끔하고 차분하고 우아한 가운데 반짝이는 센스와 세련된 위트. 확실히 리더든 팔뤄든 춤추는 걸 보고 있으면 그 사람 성격이 어느 정도는 짐작되는 것 같다.  

 

*

 

왜 사람들이 프리다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프리다의 춤은 예술적이라기보다는 기예에 가까워 보인다. 기예적인 춤은 멋지고 대단해보이기는 하지만 예술적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샤론이나 카라 같은 팔뤄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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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7-1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려놓은 블로그에서 오래 전 일기들을 다시 읽었다. 반가워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