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특별 보급판 세트 - 전9권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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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가슴 저미는 드라마 본 소감 치고는 불경한 얘기일 수도 있겠으나 드라마 보면서 다시금 통감한다. 일이란 얼마나, 사랑해야 하면서도 또한 사랑할 수 없는 그 무엇이냐. 일이란 자기존재증명의 수단이면서 또한 얼마나 고되고 천하고 슬프고 노예적인 것이냐. 일이 주는 고난과 시련이 인간을 보다 겸허하고 원숙하게 만들어줄 지라도 오로지 그러한 효과 때문에 일을 긍정한다는 건 노예의 마조히즘적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리라.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애증의 대상일지언정.

 

드라마 보면서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는 점은, 무슨 궁리를 써서라도 일을 되도록 적게 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을까. 자본과 대지를 소유하는 것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가장 확실한 길일 것이나 그것이 어렵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게 차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하다면, 일을 단순히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 내재적 합목적성을 가지는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격상시켜서 더 이상 일을 일이 아니게 만드는 방법이 있겠다. 어떻게? 

 

①일을 인식하는 내 정신 상태를 개조한다. 즉, 일에 대한 인식의 프레임을 바꾼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기계발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내면화시켜서 정신승리법으로 일을 일이 아니게 만들어버린다 ㅜ_ㅜ;;; ②일 자체를 바꾼다. 일을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키거나 노동요처럼 일에 유희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일의 속성을 변화시킨다. 근무 중에는 ①과 ②를 병행하다가 퇴근하고 나면 최소 두 시간 이상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에 매진하면서 피폐해진 영혼을 달래는 복합적 방안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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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근무 환경이 업무 강도의 측면에 있어서나 급여 수준에 있어서나 이제까지 내가 겪어본 것 중에서는 객관적으로 가장 나은 편이 아닌가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직업 자체로는 무슨 조건으로 일을 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거 같다는 확신이 든다.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해지네."

"완전히 다른 길을 찾기보다는 근무 시간을 조정해보는 게 어떨까. 지금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극단적 혁명이 아니라 수정주의적 조율로..."

(...)

"그래 사실 근본적으로 직장 생활이라는 건 정말 사육 당하는 돼지의 삶에 다름 아니야. 감옥이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내면화하게 되는 어떤 세계관이라 할 만한 게 있다면, 일이란 인간의 천형이며 인생은 출구 없는 감방이고 세계는 절망으로 가득찬 지옥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더 자꾸만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을 가진 철학자들 책을 찾게 되는 것 같아."

(...)

"어쩌면 처음부터 창문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 애초에 창문이라는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행복한지도 몰라. 창문 너머 들판을 봐버린 것이 내 고통의 시작인지도."

(...)

"<프레카리아트>라는 책 한 번 읽어봐. 일본 젊은이들의 실태를 쓴 책인데, 불안정한 노동이 어떻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보게 되네."

"재밌겠는데. 어떤 자율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일본에서 출현한 그 프리터라는 신종 노동 형태에서 발견하기도 하던데, 그러나 내가 직접 프리터로 살아본 바로는 21세기 프리터도 19세기 프롤레타리아 못지 않게 미래가 안 보이는 암담한 인생 같더구만."

(...)

"그리고 난 아직 애도 안 낳았지만 벌써부터 뭐가 걱정이냐면, 이 모든 직업적 고민=존재론적 고민=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고민의 방점을 자식으로 찍어버리는 것- 그래서 오로지 애를 키우기 위해, 그러니까 유전자 보존과 개체 번식이라는 지극히 생물학적 본성에 충실한 나머지 자진하여 감옥에 입소해 스스로 뇌를 제거해버리고 기꺼이 체제의 관리에 따르는 한 마리 양순한 가축이 되어버릴까봐, 좀비가 되어버릴까봐 그게 벌써부터 걱정이 돼. 그래서 난 <모성애의 발견>이랑 <어머니의 탄생> 막 이런 책들을 벌써부터 사놨어. 나중에 태어날 내 자식한테 쉽게 매혹당하지 않기 위한 자기최면으로다가. 자식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러니까 면역력을 보강하기 위한 일종의 지적 백신으로서 벌써부터 미리 몇 권을 쟁여놨다고. 그 책 보면서 최소한이나마 자식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

"주위 여자들을 보면 확실히 애한테 빠져버리는 순간 인생 훅 가는 듯. 대부분의 향락은 시효가 지나면 대체로 빠져나오기 마련인데 애한테 빠지는 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더라. 자식이야말로 종교에 육박하는 블랙홀인 거 같다-_-;;;; 종교든 자식이든 치명적인 외간남자든 돈이든 뭐든 뭘 만나도 끝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면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거 같아."

(...)

"남편이든 아이든 사회 자체든 나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면서 특정 지위를 명명하고 역할을 기대하는 그 어떤 대상에게도 절대로 함부로 간이고 쓸개고 영혼이고 모조리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또한 그 모두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적당히 발란스를 맞추면서 어떻게 살아나갈 건가 하는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해봐야 할 듯. 확실히,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 부양의 한 축을 담당하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정체성, 그리고 훗날 누군가의 엄마라는 정체성... 이런 여러가지 다양한 외적인 자기 정체성들과 내밀한 개인적 자아를 서로 반목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한 다양한 역할 또한 나에게 명백히 성취감과 즐거움을 주고 비록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주니까. 아무튼 내가 관계 맺는 세계와 조화롭게 상생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고유성을 심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동시적으로 추구해나가는 그 절묘한 방법과 기술을 모색해나갈 필요가 있는 듯."

"그래 그걸 깨달아나가는 게 성숙의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 

"남편을 보면, 남편한테는 일이 정말로 삶의 의미거든. 직장인으로서는 드문 경우겠지만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그 분야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해왔고 지금도 자기 일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근데 이 엿 같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은, 무섭도록 효율적이고도 잔혹한 게,? 니가 그 일을 좋아한다고? 어어 그래 너 그 일 정말 좋아한댔지? 그럼 졸라 죽을 때까지 해봐.’ 이런다. 자본의 시스템이 남편을 이렇게 겁박하고 착취한다고. 그니까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도 이 체제가 결국에는 개인을 최종적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든단 말이야. 근데 내가 옆에서 남편을 보면 남편도 그 안에서 여차저차해서 자기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는 게 보여. 내가 남편 보면서 느낀 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든 그게 아니든 간에 누구나 사회의 겁박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거 같고, 때문에 자기소외를 겪지 않을 만큼의 지점을, 각자의 고유한 자기균형점을 잘 찾아나가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 같아. 나중에 애 생기고 나서 더욱 더 집 문제, 교육비 문제로 허덕이고 그러면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기꺼이 정신적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노동을 자처하게 되는 서글프고도 기막힌 상황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럴수록 하루하루 나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아. 결코 좀비가 되어서는 안 될 거 같아."

(...)

"가능하기만 하다면, 오로지 전적으로 창작 활동으로만 생계를 해결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일 텐데."

"그렇지. 나도 자식 낳으면 정말이지 돈도 벌면서 창작하는 직업을 갖도록 세뇌시키려고. 매뉴얼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행정직이나 기술기능직 쪽으로는 절대로 못 가게 하려고. <어머니의 탄생> 같은 책을 정신적 백신이라면서 벌써부터 장만해서 책장에 꽂아두어 놓고서는 또 한편으로 이런 정신분열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니 나도 참 딱하지만, 일단 내가 생각해놓은 직업은 피디랑 기자야. 창조적으로 글쓰고 프로그램 만들면서도 잉여가 아니잖아.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뚜렷한 직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불화하지 않고 상생해서 돈을 벌잖아."

"기자도 창작하는 직업은 좀 아니지 않나-_-;;;"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는 삶이 너무 부러워. 글 쓰고 생각할 수 있는 삶이... 윗선 눈치 보느라 글을 내맘대로 쓰지 못한다는 그런 푸념마저도 부럽다고. 배부른 고민으로 들린다고. 그런데 아직 애도 안 낳아놓고 벌써부터 내 욕망을 미래의 자식에게 투사하기 시작하는 나도 참 별 수 없네-_-;;; 엄마의 욕망, 이게 진짜 무서운 거 같다. 프링글스도 아니고 정말이지 멈출 수가 없네."

 

*

 

친구와 간밤에 카톡으로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비록 사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이곳에 일부 옮겨본다. 간밤의 이런 이야기에 비하면 내가 그간 서재에 끄적여둔 영화 리뷰며 현학적인 책에 대한 요약문 따위는 도무지 삶의 주변만을 에두르는, 삶의 변죽만을 울려대는, 등 따숩던 호시절의 허영스런 소꿉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팔불출 같지만 친구 자랑을 좀 하자면 카톡 주고받은 이 친구는 스무 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당선 소감문이 당선 작품보다 더 근사하게 읽힌다

 

어린 나이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영국의 사회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저는 오이디푸스를 동정하고, 줄리엣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신기한 일입니다.

 

하늘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소리가 있고 쓰레기가 있습니다. 낙엽이 있고 택배 배달 아저씨도 있습니다. 지하철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이 있고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김광섭 시인의 말마따나, 사람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지금 창밖에는 아무래도 추운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 저를 고마워하는 사람, 제가 고마워하는 사람, 저를 미워하는 사람, 제가 미워했던 사람, 저를 원망하는 사람, 제가 원망했던 사람, 저를 싫어하는 사람, 제가 싫어했던 사람,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떻게든 마주쳤던 사람들, 오늘 아침 버스에서 본 해해 웃으셨던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제가 미처 만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모두들 행복한 한 해, 더 나아가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두 번째 문장이 유독 아프다.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줄 아는 내 예쁜 친구가 정말로, 젊은 날에 일찍 지쳐 시들어버리지 않길. 마찬가지로 나도 당신도 그러하길. 시들지 않으려면 친구의 말마따나 노력을 해야한다. 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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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14-12-1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솔직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수양 2014-12-18 18:43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한 일이지요... 이 친구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 예술적 재능... 이런 것들이 활짝 꽃피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늘 응원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면... 등단하기도 쉽지 않지만 등단하고 나서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꼼쥐 2014-1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에게 일이 삶의 의미라기보다는 일이 없어지는 순간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죠.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을 것만 같은 불안감, 그런 게 있는 거죠.

2014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수양 2014-12-22 07:51   좋아요 0 | URL
꼼쥐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너무너무나요!! 벽에 가만히 귀를 갖다대고 있으면 옆방에서 나직이 말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것만으로도 따스한 위안이 됩니다. 온기를 느낍니다. 어쩌면 그 온기로 올해도 살았던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계속 이곳 알라딘에서 동고동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01-21 0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2 0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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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 감독, 샘 워싱턴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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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반 넘어가면서 주인공이 히어로 코스프레 하나 싶어 우려했으나 거장 감독이어서 그런가 수위 조절을 적당히 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끝은 어디일까. 지난 날 자신의 치부와 과오마저 경이로운 스펙터클로 복원하여 상품화시키는... 이민족 수탈의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도, 현란한 cg기술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훌륭해서 기가 다 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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