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 문화이다. 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평정과 인내 그리고 자극의 수용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다.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잘 제어하는 것, 가볍게 함부로 끌려다니지 않고, 내 쪽의 균형과 중심축을 유지하면서 잘 drive해나가는 것,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비철학적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이야말로 '악덕'이다.
보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 어린 평정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온갖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와는 반대로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작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춤의 일종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희미하게라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이것이 독일적이다. 독일인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독일인들이 그들의 철학자들을, 그리고 특히 위대한 칸트라고 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에서 가장 기형적인 개념의 불구자를 참아왔다는 사실이 독일적 온화함에 대해 알게 해준다. 춤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사람들이 이런 글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138~140쪽)